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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하경 Feb 17. 2024

지금의 저를 대체해 주세요.

미래의 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바보로구나. 자기 발목을 자기가 잡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을 시절, 친구로부터 '아는 오빠 이야기'를 듣게 된 적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막내였던 그분의 후임으로 새로운 막내 사원이 들어왔는데, 본인보다 잘하게 되면 위협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완전한 실무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채 허드렛일만 시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정작 말을 하는 친구는 그것이 '재미있는 생각'이라는 정도로 웃어넘겼지만, 당시의 저에게는 경악스러운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갓 막내를 벗어난 사원이 얼마나 기밀스러운 시크릿 레시피를 가지고 있길래 작정하고 후임을 물경력 만들지?'


'만약 그 막내 사원이 이를 악물고 실무 강의나 실무자 부트캠프에 참여해서 역량을 채워오면 얼마나 괴롭힐까?'


'대체 불가능한 인재가 되라는 말을 창의적으로도 받아들였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안 가르쳐주면 시키지도 못할 텐데, 후임에게 지금 자기가 맡은 일을 넘겨야 자기가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못하는 바보로구나. 자기 발목을 자기가 잡네.'


그리고 팀원들에게 매니저의 역할을 전혀 위임하지 않고 혼자 전부 끌어안고 낑낑대다가 널브러져서 팀원들 손을 붙잡고 겨우 일어났을 때,


새삼 이 몇 년 전 저의 생각이 지금의 저를 향해 매섭게  내리꽂혔습니다.


완전히 힘이 빠져 겨우 서있는 저를 보고, 직장 생활은 시작도 못해 본 몇 년 전의 제가 혀를 끌끌 차는 것만 같았습니다.


적어도 나는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고. 단지 실무자에게 관리자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 변명들은 과거의 저로부터 날아든 비난으로부터 지금의 저를 지켜주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안 가르쳐주면 시키지도 못할 텐데,

후임에게 지금 자기가 맡은 일을 넘겨야

자기가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못하는 바보로구나.

자기 발목을 자기가 잡네.



현재의 저를 대체해 주세요.
미래의 저로 성장할 수 있게.


본인 스스로가 앞으로 성장할 욕심이 없고, 하지만 자리는 유지하고 싶은 경우, 내 조직의 구성원들 또는 나의 후배들을 성장할 수 없게 방해하는 것이, 지혜롭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유일한 선택지일 수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빠르게 성장해서 계속해서 새로운 일을 해나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지금 내 손에 든 바통을 받아줄 사람들을 끊임없이 성장시켜야 하는 것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내 상황을 남의 상황에 대입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사회생활 경험이 아예 없던 나의 눈에도 보이던 것이, 직접 그 상황에 처하니 잘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 새삼 '혼자 이것저것 이뤄냈다고 으스댔지만 객관화 하나를 제대로 못 해서 이렇게까지 주저앉아 버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시니어 팀원들, 그것도 저보다 훨씬 좋은 성품과 역량을 가진 저희 팀의 시니어 팀원들과 함께 매니징 역량을 키워볼 시간이었습니다.




팀원들이 훌륭한 걸 자꾸 잊는다.


일할 시간도 없어죽겠는데 갑자기 팀장이 일정을 따로 잡고 독서 토론을 하자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놀랍게도 있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관리자로서의 역량을 성장시키기 위해 따로 스터디를 진행하고자 한다.'라고 하자 팀원들은 놀랍게도 반색을 했고, 심지어 이제는 분리되어 다른 매니저 소속이 된 전 팀원들도 저의 스터디에 함께하고자 했습니다.


책을 지정하고, 그것에 대해 전반적인 인상에 대한 토론만 주고받다가 끝나는 것이 아닌


정말 책에 이 항목이 실제 회사 생활에 적용되었을 때는 어떤 모습이겠는지, 이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가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등을 집요하게 캐묻는 방식으로 스터디가 진행되었고,


방법론적인 파트에서는 해당 방법론을 이용해 직접 서류를 적어오라는 과제까지 내드렸습니다.


근무 외 시간에 진행해야 하는 숙제를 냈으니 대강 구색만 맞추고 불만을 토로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지만


놀랍게도 팀원들은 해당 스터디에 진심이었습니다. 제가 놀랄 정도의 가상 보고서를 적어오고, 제가 미리 준비한 질문지에 대해 답하는 시간에도 열성적인 토론이 이어지며 저 혼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인사이트들을 내어주곤 했습니다.


장장 17주에 걸쳐 시니어 팀원들을 대상으로 한 매니징 스터디가 마무리되었고, 교육을 통해 모든 시니어들은 각각 주니어 1명씩을 업무적 멘티로서 매니징 하게 되었습니다.


시니어 팀원들도 자신들이 1명이라는 작은 단위로, 피드백을 받으며 관리자 체험을 있다는 사실에 대체로 만족스러워했고, 지정 사수가 생긴 주니어 분들의 만족도도 컸습니다.



내 자리를 온전히 맡을 수 있도록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저였습니다. 든든한 시니어 팀원들에게 주니어 팀원들을 믿고 맡기자 관리 공수가 놀랍도록 줄어들었고, 팀 운영상 큰 변화나 문제가 리포팅되지도 않았습니다.


너무나 훌륭하게 '1인 팀 매니저' 역할을 해주시는 팀원들을 보며


'이렇게나 성장에 대한 욕심이 큰 분들인데 내가 또 우리 구성원들을 과소평가하고 겁을 냈구나.


나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진작 기회를 드리고 길을 보여드렸다면 진작부터 짐을 덜 수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한 팀원을 매니징 하는 것을 넘어 주간 회의의 한 코너를 진행하는 일, 매일 아침 진행하는 그리팅의 일부진행하는 일 등을 부분적으로 팀원들에게 맡겨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팀원들의 회의 진행 비율을 높여나갔고, 안정되기 전까지는 제가 참여해서 아직 불안한 부분들에 대해 조금씩 도움을 주었습니다.


시니어 팀원들이 어느 정도씩 자신들이 담당한 회의를 진행하는데 익숙해진 이후로는, 팀 회의만으로 빡빡 히 차있던 제 캘린더에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한 킥오프, 타 부서와의 협력 미팅, C레벨 분들과의 미팅 등이 대신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팀원들의 성장이 있을 때 비로소 팀장이 성장할 기회가 열린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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