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하경 Feb 21. 2024

마지막 출근

모두들 정말 감사했습니다.

180도 바뀌어 버린 커리어를 더 단단하게 다듬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회사에 오프보딩 의사를 전하자 1달간 면담이 줄지어 잡혔고, 많은 말씀을 나눈 끝에 사직서가 수리되었습니다.


팀원들에게는 한 명 한 명 1on1을 잡아 퇴사 소식을 전하고


저의 자리를 이어 맡아줄 사람들에게 인수인계를 진행하며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마지막 출근일, 저의 자리를 인수인계받을 분과의 마지막 1on1 시간을 앞둔 때였습니다.


저는 날씨가 좋을 때면 사옥의 옥상 정원으로 올라가, 일명 '진실의 의자'라는 별명을 가진 편안한 선베드에 누워서 하늘을 보며 1on1 하는 것을 선호했기에 오늘도 팀원분과 함께 옥상정원으로 올라갈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on1 시간이 10분 정도 남은 시간, 갑자기 20여 명의 팀원들이 앞다투어 우르르 옥상 정원으로 달리듯 빠르게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디 가요? 다들 회의 있어요?"하고 물으니 당황한 한 팀원이


"화, 화장실 가요!"라고 대답하고 뛰어가 버렸습니다.


남녀 다같이 동시에 뛰어나가면서 하필이면 화장실이라니, 그냥 회의에 간다고 하지.


김칫국을 안 마실래도 너무나 티가 나는 서프라이즈 준비에, 충분한 준비시간을 주기 위해 2분 정도 늦게 옥상 정원으로 올라갔습니다.


무언가 준비했다는 것을 너무나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옥상 문을 열었을 때 제 눈앞에 보인 모습은 인생의 모든 순간이 사진이라면 그중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파란 하늘에 햇빛이 쏟아지는데, 20여 명의 팀원들이 제가 들어올 문을 둘러싸고 큰 원을 그려 선 뒤 저를 향해 밝게 웃으며 박수를 쳐주고 있었습니다.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는 커다란 꽃다발과 함께 평소 티를 좋아하던 저를 위한 고급 차세트가 놓여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감정이 지나가 오히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꿈과 같은 모습이라 실감이 나지 않고, 이 순간을 그저 최대한 오래 느끼고 싶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박수를 쳐주는 팀원들에게 다가가 여자 팀원들과는 포옹을, 남자 직원들에과는 악수를 나누며 한 명 한 명에게 하고 싶었던 마지막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우리 첫 팀원 ㅇㅇ님, 든든한 기둥 ㅁㅁ님, 들어올 땐 아기였는데 어느새 에이스로 자라 버린 ◇◇님, 한 명 한 명 껴안을 때마다 들어오기 전부터, 들어온 이후 초기 팀에서 함께 구르며 함께 성장해 온 순간들, 그리고 지금 이 마지막의 모습까지가 한 명도 빠짐없이 기억이 났습니다.


모든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니, 몇몇 팀원들은 팀과는 별개로 따로 손 편지를 적어 건네주었고


자리로 돌아가니 모바일 롤링페이퍼 페이지가 공유되어 있었습니다.


얼떨결에 끌려들어 온 이 길의 마무리가 이렇게 따뜻하게 마무리되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팀원들의 편지를 한 장 한 장 읽는 내내 기쁘다 못해 마음이 시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말도 안 되죠.
역량도 부족하고 애초에 회사 생활 자체가 처음인데요."


그리고 저보다도 더 편견 없이,


사회생활 경험도, 경력도, 기존 커리어도, 그 무엇도 보지 않고 오로지 잠재력과 책임감만을 믿고 제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으로 저를 냅다 던져주셨던,


그리고 그뿐 아니라 신규 팀 세팅에 대해 위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권한을 위임해 주시고 수많은 기회를 제안해 주셨던 그룹장님을 뵈러 갔습니다.


정말 많이 함께 일하고 배웠던 분이지만 그만큼 부딪히는 일도 서운한 일도 많았기에


그리고 그분 입장에서는 제가 나가는 일 자체가 많이 서운한 일이셨기에 마음에 담긴 감사함의 크기에 비해 마지막 인사는 담백하게 오고 갔습니다.


"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래요. 잘 들어가요. 아주 못 보는 것도 아니고. 종종 연락해요."


힘들고 답답한 마음에 당장 쏟아내던 설움과 서운함보다 더 큰 감사함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언젠가는 편히 말씀드릴 기회가 있으려나 생각하며 짐을 들고 유리문을 나섰습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팀원들이 모두 몰려나와 마지막으로 수다를 떨며 배웅해 주었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저는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며 팀원분들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문이 닫혀도 잠시간 팀원분들의 목소리가 섞인 따뜻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웃음합창을 다시 들을 기회가 없으리라는 생각에 맘이 아렸습니다.


이제는 매니징이 '어쩌다 보니 들어온 전환점'을 넘어서,


정말 내가 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하고 주도적으로 기회를 잡은 분야가 될 수 있게, 시장 전체에서 팀 또는 프로젝트를 매니징 한다고 했을 때 그 안에서 내가 손꼽히는 인재가 될 수 있게 더욱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그래서 저는 아늑한 편안함을 즐길 팔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깨달았지만


마치 헤어질 이유를 머리로는 다 알아도 차마 그 자리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 연인과의 이별날처럼 사옥에서 쉽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래의 제가 '그냥 그곳에 안전하게 있을 걸'이라고 후회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


이 좋은 사람들을 떠나면서 나의 성장을 위해 한 베팅이 성공적일 수 있도록 악착같이 또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사옥문을 나섰습니다.


옥상 정원에서 보였던 푸른 하늘과 쨍한 햇빛이 얼굴에 닿았습니다.


한 팀원분이 적어주신 편지가 떠오르며 텅 빈듯했던 마음이 다시 소복이 차올랐습니다.




훌륭한 팀원들의 팀장이 되었다 (完)


20화로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이전 18화 이젠 저 없어도 진짜 괜찮을 것 같아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