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가장 큰 사막인 사하라를 횡단한뒤, 사람들은 “그래, 네 삶에 무엇이 바뀌었냐”고 물어온다. 사실 변한 건 없다.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뀌겠는가. 단지 시커멓게 그을렸던 얼굴과 물집 터진 발바닥이 제 모습을 찾았을 뿐이다.
혹시 한번의 도전으론 부족했던걸까? 정글에도 다녀 왔지만 내 인생은 그대로였다.
가끔 어떤 사람은 나를 의지 충만하며 도전으로 점철된 삶을 사는 사람으로 여기기도 한다. 고백건데 절대 그렇지 않다. 수많은 결심들을 작심삼일로 끝내버리는 대표적인 일반인, 아니 평균 이하다.
대학 졸업 후 프리랜서로 10년가까이 자유로운 삶을 살다가 결혼 후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새로 입사하여 직장 안에서 많은 일들과 관계들을 배워 나갈 때였지만
마음 한켠에는 히말라야에 오르고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꿈을 묻어두고 먹고사는 데에 묶여 있다보니 삶의 의미가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책없이 히말라야에 다녀오겠다고 하는 월급쟁이를 환대해주는 직장은 없다.
직장을 그만두어야 가능할 것 같은 ‘그 짓’을 월급쟁이인 채로 하려 했다. 입사한지 1년도 안된놈이 말이다.
하고싶을때 하지못하면 할수있을때 하지못한다는 글귀를 보며 결심을 할때면, 마트에서 천원 한 장 아끼려고 물건들을 집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나는 고개를 흔들고 만다.
등산은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무상의 행위다. 히말라야에 오른다고 누가 알아주지도, 돈이 나오지도 않는다. 갈때는 왕복티켓을 끊고 가지만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 위험한 곳을 간다고 보험사에선 보험도 들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것들이 중요하지 않았다.
깨어있는 모든 시간 동안 꿈이냐 밥이냐를 놓고 머리를 싸맸다. 몇 날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먼 훗날 인생을 뒤돌아볼 때, 무엇이든 다 될 수 있는 청춘이라는 시기에 그저 시키는 일만 하면서 살고싶지는 않았다.
젊음은 성스러운 질병이라고 한다. 정신보다 육체가 먼저 성숙해버리기 때문이다. 정신이 따라갈때쯤엔 이미 육체는 약해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인이 되어서야 젊음을 추억하며 후회한다. 젊음은 황금같은 보석이지만 그때는 모르다가 한참 지나서야 소중함을 깨닫고 후회한다고 한다. 나는 젊음이라는 황금시기를 황금처럼 쓰고 싶었다. 그렇게 인생의 어느 한페이지라도 그저 장 수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채우려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히말라야(Himalaya)는 산스크리트어로 눈을 뜻하는 Hima와 집,거처를 의미하는 alaya의 합성어이다.
나지막이 발음해 보는 ‘히말..라야’. 내 안에서 솟아난 단어를 입 속에 머금어 조용히 반복하니 이내 내 가슴에 폭풍이 되어 다가왔다.
어떤 유치함이 여기까지 이끌었는지 나도 모른다. 다만 세상의 모든 월급쟁이, 평범함, 나약함과 결핍에 대한 자기연민이 대책없는 모험을 무릎쓰게 했다.
그저 인터넷 사진으로, 유튜브 영상을 본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지낼까 고민도 많이 했다.
하지만 길을 아는것과 걷는 것은 다르다.
한여름 내내 땀을 흘린 농민이 바라보는 가을의 황금 들판과, 차 안에서 운전을 하며 바라보는 가을 들판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가만히 녹스는 삶보다는 닳아 없어지는 삶을 살기로 했다.
운이 좋게도 대표님은 히말라야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해 주셨고, 그렇게 나는 히말라야로 떠났다.
사랑하는 가족과 직장을 뒤로하고
그토록 꿈에 그리던 히말라야에 도착해서 내뱉은 말은 Never coming ( 내가 다신오나봐라 )” 였다.
한국에서는 필요한 것들을 손만 뻗으면 쉽게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히말라야에서는 작은 것을 얻으려고 해도 정말 몸을 많이 움직여야 했다. 히말라야에서 하는 모든 것이 다 불편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정작 히말라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편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겐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생활의 일부이자 당연한 일상이었다.
기계의 편리함에 빠져 인간의 노동이 갖는 가치를 소홀히 하고 생산과정의 노고를 생략함으로써 결과에만 집착하는 인간의 허약함을 히말라야는 내게 반성하게 했다.
또한 그들은 결핍이 불행이라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어렸을때부터 부모님께 용돈을 거저 받았고 다른 아이들처럼 넉넉하게 받지 못하면 흙수저라며 쪽팔려했다. 그러한 결핍이 열등감을 낳았고, 협력보다는 경쟁, 개성보다는 학벌, 사람보다는 돈을 추구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히말라야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과 더불어 결핍속에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익힌 것 같았다. 오히려 작은 것에도 굉장히 감사하고 행복해 했다.
나는 그 속에서 무엇이 참다운 행복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육체적인 안락이 행복인가? 더 많은 소유가 행복인가? 맑은 영혼을 가진, 보석처럼 빛나는 셰르파들의 순수한 웃음에 답이 있었다.
히말라야의 모든 것이 불편했지만 산은 나에게 편하려고 오는 곳이 아니라고 다시한번 말해주었다. 여기는 겸손과 인내를 배우는 곳이라고 말이다.
불편과 결핍을 공손히 받아들이고 겸손과 인내가 몸에 경험으로 녹아들자, 히말라야에서 느껴지는 바람은 참 시원하고도 따뜻했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공부 잘하는 친구를 밟고 넘어서야만 좋은 대학에 간다고 앞에서 실컷 떠들어댔다.
하지만 산은 말이 없다. 어설픈 교사일수록 함부로 가르치려 드는 법이다. 산은 계절에 따라 몸소 자신의 변화를 보여줄 뿐 나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말없는 가르침, 그것이 히말라야의 가르침이다.
카트만두에서 파는 기념티셔츠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네팔이 당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지 당신이 네팔을 변화시키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교육이란 말없이 스스로 깨우치도록 만들어주는 것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나는 왜 이렇게 무모한 도전을 하는걸까?
극한의 상황에서 완전한 체력의 방전을 느끼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왔다갔다 하다보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장엄하고 숭고하기까지 한 거대한 자연 대상물과 마주하면 누구나 거기에 압도되어 작아진다.
산악인들의 도전에 대해 종종 ‘험난한 자연에 맞선 인간의 도전’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는 자연을 정복할 수도 없다. 자연은 싸울대상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만 있을 뿐이다. 성층권까지 치솟은 설봉의 웅장함에 압도되면 사람은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성찰하게 된다.그동안 우리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왔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실패할 가능성을 등에 짊어진 배낭처럼 늘 함께 지고 다니는 것이다. 게다가 히말라야와 같은 고산에서 실패를 겪는다는 것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엄중하다. 인간이 아무리 많은 준비와 훈련을 하더라도 히말라야에 오르는 순간 그 모든 노력은 발가벗겨져 버린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할수 없기에. 히말라야에서는 왼발이 저승이고 오른발이 이승이라고도 한다.
풀한포기 자라지 않고, 사람들이 살지않는곳에는 다 이유가 있다.
죽기전에 해보고 싶은것을 다 하고 죽으려다가 남들보다 일찍 죽을 수도 있다는걸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히말라야 5000미터 지점을 넘어가면 평평한 눈밭을 걷다가 갑자기 크레바스에 빠지거나, 설벽에서 추락사를 하거나, 살인적인 추위를 견디지 못해 결국 동상에 걸린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해야하는 경우도 많다. 한밤중에 자다가 눈사태로 텐트 속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렇게 늘 죽음과 가까이 살면서 한계에 부딪히다 보면 온전한 나를 마주하게 된다. 죽음을 생각할때 사람은 소중하지만 잃어버렸던 것들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삶이란 사람을 선하게 만든다. 그리고 겸손하게 만든다.
히말라야에서의 사고는 예측불허다. 옷하나만 잘못 입어도 저체온증으로 치명적일 수 있고 , 히든 크레바스에 빠지는것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산악사고 뿐만이 아니다. 고소에서 먹는 밥은 고소증에 시달리며 삼켜야 하는 밥이기도 하다. 두통이나 호흡곤란이 오면 즉각 낮은 지대로 내려오는 수밖에 없다. 억지로 버티다가는 폐나 뇌에 물이 차는 폐수종,뇌수종으로 죽게된다. 수면중에는 호흡이 잦아든다. 호흡을 맘껏 하지못하면 고소증세에 시달린다. 에베레스트에서는 최대한 수면시간을 줄여야한다. 그래서 산은 위험하다. 그리고 냉정하다. 함부로 까불면 목숨을 잃는다. 그래서 항상 겸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것을 몸으로 느끼며 배웠다. 그곳에는 인생이 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자신의 졸렬함도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고도가 점점 높아지고 신의 영역으로 들어설수록 두려움에 떨고 힘들다고 불평하던 모습은 가관이었다. 낮아지는 산소포화도와 요동치는 맥박은 두개골을 부수어 뇌를 꺼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마음은 오르기를 원했지만 몸은 내려가기를 바랐다. 매일 이를 부딪치며 지긋지긋한 추위를 견뎌야 했고 먹는 족족 토해내야 했다. 잠깐 선글라스를 벗었더니 강렬한 빛이 설산에 반사되어 눈에 유리가 박힌것처럼 엄청나게 괴로웠다. 설맹이었다. 호흡은 점점 가빠지고 달에 착륙한 우주인같이 다리 한짝을 들어올리기도 너무 벅찼다. 나는 이 등정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진이 쏙 빠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젠장, 매정하게도 내 앞에 끝없이 펼쳐진 급경사는 너무도 선명하다.
산소가 지상의 3분의 1밖에 안되는 예측불허의 자연속에서 로프에 몸을 의지한 채 밤새 정상을 향해 오른다. 강력한 바람에 움직일 수 없고, 고소증으로 머리는 깨질것 같았으며, 숨쉬기가 힘들어 발이 안떨어진다. 암흑 속에서 그렇게 벌벌 떨며 죽음의 공포와 싸운다. 기필코 오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와 도저히 못하겠다며 내려가야한다는 육체적 고통이 끊임없이 싸운다. 그렇게 씨발을 외치면서 차라리 죽여달라는 외침으로 한발 한발 억지로 들어 옮긴다. 그렇게 끝이 없을것같던 긴 터널같은 시간이 지나고, 어느 순간 눈을 뜨자 구름 사이를 뚫고 아침 햇살이 나를 비춰 주었다. 수고했다고 토닥여 주는것만 같았다. 아래를 보니 주변이 온통 구름바다를 이루고 히말라야 산맥들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펼쳐진다. 그 대자연의 경이로움 앞에 선 순간 짧은 탄식이 입에서 터져나온다.
'아, 해냈구나 ’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구름뿐, 사방을 둘러싼 웅장한 설산들은 고요하게 나를 바라봐주고 있었다.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고,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정상에 오르고 거기에 머무는 시간은 인생에서 불과 20분이 채 안되지만 그곳에서 본 광경과 뜨거운 감동은 내 평생의 무지개가 되었다.
산은 산자락에서 정상까지 모두 산이다. 정상을 딛는 마지막 한 걸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모든 걸음이 똑같은 의미가 있다.
한걸음 한걸음이 쌓이지 않으면 결코 정상에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위험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상상도 못할 만큼의 놀라운 경험을 얻기도하고, 또 그만큼 귀중한 것을 잃기도 한다. 잘못하면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 도착하면 죽음의 문턱에서 되찾은 소중하고 기적같은 삶이 감사해서 가슴이 벅차다. 도전을 통해 만나게 되는 불편함이 나를 성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산이 내게 가르친 것은 익숙한 것들과 이별하고 새로운 것들과 만나 사귀는 법을 경험하게 해준 것같다. 다혈질이고 모난 곳 투성이였던 나를, 의지할 곳 없는 공간속으로 내동댕이쳐 그곳에서 만나는 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경험을 쌓게 해주었다. 그래서 산을 신이 만든 위대한 도서관이라고 하나보다. 마침내 조금 넓어지고 용감해진 나를 ‘긍정하는 법’을 히말라야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떠난자리로 돌아올 무렵 곁에 있는 것들을 더 많이 사랑하라고.
“고난과 역경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아름다운 이유는 그 속에서 발견하는 오아시스와 같은 배움이 있기 때문” 이라고 어린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는 말했다.
사하라 사막에 가고. 정글에 가고. 에베레스트에 간것은 쓸모없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쓸모없는 짓들을 하다보니 내 인생의 쓸모는 커졌다. 쓸모없는 일들을 할수록 나는 점점 내가 되어가는것 같았다.
히말라야 등반과정에서 극한상황을 만날 때마다 오해받는 일도 있었고 나를 정말 힘들게 하는 일도 많았지만, 이 말로 마무리를 짓고 싶다.
“산 정상에 오른 사람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비극에 웃을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