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우리 반 이야기를 에세이로 쓰기 위해서 자신만의 글쓰기 틀을 만들어 놓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글쓰기 틀이 있어도 글이 잘 안 써질 수 있다. 그럴 때는 옆에 두고 참고할 수 있는 글이나 책을 만들면 좋다. 나에게는 김소영 작가가 쓴 《어린이라는 세계》가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첫째, 이야기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독서 교실의 이야기다. 저자는 독서 교실에서 학생들과 지내면서 일어난 일들을 글로 썼다. 물론 독서 교실 이야기와 우리 반 이야기가 완벽하게 같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독서 교실과 우리 반 모두 어린이와 관련된 공간이라서 비슷한 점이 많다. 《어린이라는 세계》 속 아이들 모습을 살펴보다 보니 우리 반 아이들이 떠올랐다. 우리 반에서도 소소한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지 않는가. 책을 읽다가 우리 반에서 있었던 일이 갑자기 떠오르면 놓치지 않고 노트에 메모했다. 그 메모들은 나의 소중한 글감이 되었다. 둘째, 어린이 이야기가 특별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평범한 아이들 이야기이다. 그런데 베스트 셀러로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다. 사실, 나는 이전까지 아이들 이야기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순수한 이야기에 감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들 이야기를 글로 쓰다 보니 내 얘기가 너무 평범한 것 같아서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이 책을 꺼내 들었다. 그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우리 반 교실 이야기를 30편가량 모을 수 있었다. 《어린이라는 세계》가 없었다면 내 첫 번째 책인 《선생님, 오늘도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글쓰기 절차 세분화해 보기
글쓰기 틀도 만들었고 나에게 영감을 주는 책도 찾았다면 이제는 직접 쓰는 일만 남았다. 이제부터는 무작정 그냥 쓰면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 말이 너무 막연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글쓰기 절차를 세분화해 보려고 한다. 첫째, 특별한 사건을 포착해야 한다. 교실에서는 순간순간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런데 교사가 주목하지 않으면 그 일이 금세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기자가 특종을 찾는다는 마음으로 교실 속 이야기를 주목해야 한다. 그런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학생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다양한 사건을 정리하다 보면 글로 쓸 만한 특별한 이야기고 선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내가 과거에 쓴 글인 〈불타는 학교〉에는 미술 시간에 학생들이 수채화를 그린 모습이 담겨있다. 한 학생이 우리 학교를 그리고 온통 빨간 색으로 색칠해 놓았다. 나는 그 모습이 글감으로 삼을만한 특별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사건을 간단하게 기록한다. 사건을 포착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으로 남겨 놓아야 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사건을 A4 용지 2~3장 분량으로 적으려고 하면 부담스럽다. 그래서 처음에는 간단하게 단어나 문장 위주로 적는 편이 좋다. 조금 더 여력이 있다면 사건을 순차적으로 적어 보는 것도 좋다. 꾸준히 기록할 수 있는 글쓰기 공책을 갖고 다니면 틈날 때마다 기록을 정리할 수 있다. 공책이 불편하다면 휴대전화, 컴퓨터에 남겨 놓는 방법도 있다. 한글 프로그램에 파일로 꾸준히 정리해 놓거나, 카카오톡 나에게 쓰기, 이메일 나에게 쓰기, 블로그, 노션 등 자신이 편한 플랫폼에 기록을 남길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사건 발생 후에 간단하게라도 적어 놓는 편이 좋다. 교사가 그때그때 적기 어렵다면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기록할 수도 있다. 또는 학생들이 하교하고 나서 편안하게 적는 방법도 좋다.
셋째, 간단하게 기록했다면, 이제는 그 기록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 사건 발생 전후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에 더욱 깊이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쓰는 사람은 사건의 전후 맥락을 정확하게 알겠지만, 독자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황을 구체적으로 적어주면 독자가 글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건 내용을 직접 설명하는 방식보다는 가능하다면 학생들의 표정, 말투, 목소리의 크기, 몸동작 등을 구체적으로 적는 편이 좋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건 속에서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을 그대로 적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는 〈불타는 학교〉에서 불타는 학교를 그린 학생과의 대화를 이렇게 썼다.
“학교가 불타고 있다!”
학생들이 소리쳤다. 미술 시간, 수채화를 그리던 아이들이 깜짝 놀랐다. A의 그림 속 우리 학교가 온통 빨갛게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불태울 생각을 해? 그만큼 학교가 싫고, 담임인 내가 싫다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학생이 선생님 앞에서 불타는 학교를 그린다는 게 말이 돼?’
순간적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친구들 앞에서 A를 혼내려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물었다.
“학교가 불타고 있네? 학교가 싫니?”
내 물음에 A가 대답했다.
“네, 학교가 싫어요.”
넷째, 사건 속에서 핵심 주제를 끌어내야 한다. 즉 하나의 사건에서 저자가 전달하고 싶은 말을 도출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어떠한 사건 속에서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기 위함이다. 단순히 사건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서서 나만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불타는 학교〉에서는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도출했다.
나는 A의 태도에 주목했지만, 아내는 A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주목했다. 아내의 말에 내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A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공감받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A가 낸 수수께끼에 엉뚱한 대답을 한 것 같아 머쓱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초등학생 시절, 내가 A처럼 행동했다면 주변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림을 통해 학교생활이 어렵다고 말하면, 귀담아들어 주고 공감해 줄 선생님이 단 한 분이라도 있었을까?’
애석하게도 없었을 것 같다. 오히려 버릇없다고 꾸지람을 듣지 않았을까?
'누군가 마음속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다면, 감정을 꾹꾹 눌러 담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표현할 수 있었을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공감해 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참 슬펐겠다고, 마음이 정말 어려웠겠다고' 이 말이면 충분한데, 듣기가 참 어렵다. 주변에 공감해 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마음을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귀한 사람을 기다리며, 우리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주면 좋겠다.
"요즘 학교에서 힘든 일 있니?"
내일은 학교에 가서 A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눠 보려 한다.
학교에서 보내는 일상을 돌아보는 것은 나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다. 단조로운 일상에 지쳤을 때 학교 이야기를 써보자. 우리 반 아이들 모습을 글로 쓰다 보면 그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새로워질 수 있다. 학생, 학부모, 동료, 관리자 사이에 발생했던 어려움을 돌아보고 쓰다 보면 스스로 해답을 발견할 수도 있다. 또한 내가 쓴 글이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매너리즘에 빠진 동료 교사에게 내 글을 통해 동기부여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할 수 있는 예시 작품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제가 썼던 〈불타는 학교〉 글의 초고를 함께 올립니다.
이 글은 이후에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서, 제 첫 책인 《선생님, 오늘도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의 한 꼭지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선생님, 오늘도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책은 밀리의 서재에서도 편하게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불타는 학교〉
“학교가 불타고 있다!”
학생들이 소리쳤다. 미술 시간, 수채화를 그리던 아이들이 깜짝 놀랐다. A의 그림 속 우리 학교가 온통 빨갛게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불태울 생각을 해? 그만큼 학교가 싫고, 담임인 내가 싫다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학생이 선생님 앞에서 불타는 학교를 그린다는 게 말이 돼?’
순간적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친구들 앞에서 A를 혼 내려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물었다.
“학교가 불타고 있네? 학교가 싫니?”
내 물음에 A가 대답했다.
“네, 학교가 싫어요.”
“그래 학교가 싫을 수 있지. 학교가 싫다고 하니 선생님 마음이 아픈걸?”
A의 단호한 대답에 더 이상 얘기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화를 참고 친구들 앞에서 면박을 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름 훌륭한 대처였다고 생각했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이런 생각을 하던 중, 얼마 전 읽었던 그림책이 번쩍 떠올랐다.
어느 날 찬이가 그네를 타러 공원으로 갔다.
“넌 못 타, 난 여기서 절대 안 내릴 거야.” 심통이가 말했다.
“괜찮아.” 찬이가 말했다.
가는 길에 찬이가 웅덩이에 빠졌다.
“괜찮아.” 찬이가 말했다.
<감정을 숨기는 찬이, 마곳 선더랜드>
어릴 적 나는 찬이와 비슷했다. 짜증 나고 속상해도 언제나 ‘괜찮아’ 하고 말했다. 딱 하나, 찬이와 다른 점이 있었다. 찬이는 참고 참다가 결국 “나 안 괜찮아!"하며 자신의 감정을 분출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어릴 적부터 다니던 교회에서 목사님께서 항상 하시던 말씀이다.
'기분이 좋지 않아도 웃고, 기분이 나빠도 웃어야 하는 거구나!'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씀을 항상 웃고 다니라는 말로 이해했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긴 했지만, 마음속엔 화가 불쑥불쑥 치밀었다. 슬프고, 속상하고, 화가 '나는데도' 항상 '웃으려니' 속이 쓰리고 아팠다.
그래서일까? '불타는 학교'를 그린 A의 솔직한 감정 표현이 나는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그림이 쉽게 잊히지 않아서, 퇴근 후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A가 그림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나는 A의 태도에 주목했지만, 아내는 A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주목했다. 아내의 말에 내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A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공감받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A가 낸 수수께끼에 엉뚱한 대답을 한 것 같아 머쓱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초등학생 시절, 내가 A처럼 행동했다면 주변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림을 통해 학교생활이 어렵다고 말하면, 귀담아들어 주고 공감해 줄 선생님이 단 한 분이라도 있었을까?
애석하게도 없었을 것 같다. 오히려 버릇없다고 꾸지람을 듣지 않았을까?
'누군가 마음속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다면, 감정을 꾹꾹 눌러 담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표현할 수 있었을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공감해 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참 슬펐겠다고, 마음이 정말 어려웠겠다고' 이 말이면 충분한데, 듣기가 참 어렵다. 주변에 공감해 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마음을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귀한 사람을 기다리며, 우리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