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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 Apr 22. 2024

죄책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죽음에 대하여

빨리 괜찮아지지 않아도 괜찮다.


죄책감을 덜어주려는 모든 위로의 말이 듣기 싫은 순간들이 있다. 네 탓이 아니야, 그런 말. 그런 말을 들으려고 나의 죄책감을 공유한 게 아니라, 오히려 내 탓임을 알리려고 말을 시작한 것인데 덜어내려는 당신의 노력은 필요 없다 이거지.


이 죄책감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떠나보내고 남은 마지막 감정. 아이에게 내가 느끼는 마지막 감정. 마지막 연결고리. 이 소중한 걸 없애려고 하는 노력이 모두 듣기 싫은 것이다.


내가 이 죄책감 덕분에 겨우 살아있다는 걸 그들은 모르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안 먹고도 살 수 있나? 이렇게 심장이 아프고 매일 힘없이 울고 누워만 있는데 죽지 않네? 싶은 몇 개월이 지나고 있는데. 생각해 보면 내 숨이 붙어있는 이유는 이 죄책감을 간절하게 느끼고자 함이라는 걸 모르는 것이다.


이 순간에 상대가 해줄 수 있는 적절한 말이란 없다.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가장 의외의 말이 위로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 듣기 싫어 그 입에 능멸의 눈빛을 쏘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는 말들도 있다.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말이라고 같은 처지의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될 거라고 함부로 기대해서도 안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발밑의 모래알들이 나를 집어삼키려는 지금 이 순간, 내가 흘리는 눈물은 그 모래알을 단단한 벽돌로 만들 수도, 진흙늪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진흙늪이 되어서 나를 삼켜버리길 기다리고 바라고 있겠지만. 우리의 목표는 내 발밑을 단단한 땅으로 만들어 다시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날아오르기 위해 하는 점프가 있고, 땅을 더 단단히 디디기 위한 점프가 있다. 지금 우리는 땅을 다시 딛기 위한 점프를 준비해야 한다. 뛰어오르자마자 내려오기 위함이다. 발을 내리눌러 드디어 땅이 단단해졌음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어차피 아이가 떠난 순간은 영원이 되어 나를 바꾼다. 평생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게 아이가 내 안에 남는 방법이다. 죄책감이 아니라, 떠난 아이는 그렇게 남는다. 아이가 떠난 뒤 바뀐 나의 모습대로. 그 모습을 긍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아야 버리기 쉽지 않은 것으로 내 안에 오래 남을 수 있고, 내 주변 사람들도 내 안에 남은 아이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다. 떠난 아이가 내 안에 남기는 것은 타인에 대한 더 큰 관용과 이해, 공감과 따뜻한 마음이어야 한다.


죄책감은 죽음의 가장 고통스러운 동반자라고 하지만 겪어보니 아니다. 그 죄책감이 아니었으면 나는 죽었을 수도 있다. 고통스러울수록 더 고맙고 좋았다. 강렬한 죄책감을 느낀 덕분에 심장같이 사랑하는 존재의 허망한 죽음 이후 내가 충분히 아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걸 단단한 땅으로 만들어낸 내가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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