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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정 Oct 23. 2023

가을 초입

무르익어야 한다.

여름 이불을 치우고 간절기 이불을 꺼냈다. 새벽공기가 제법 서늘하다. 바깥에선 코끝이, 실내에선 손끝이 시려온다. 이렇게 차가워진 주제에 일찍부터 밝아지는 하늘 때문에 하루의 시작도 나날이 일러진다. 이불 속에서 머뭇머뭇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다. 겨울보다야 낫다지만 이 계절은 아무래도 조금 서글픈 경향이 있다.


하늘 탓을 했지만, 실은 그런 것과 별개로 계속해서 밤잠을 설치고 있다. 몇 주간 이어지자 묵은 피로에 자주 짜증을 부린다. 또 날씨 탓을 한다. 요즘은 약통이라도 된 것처럼 약 기운으로 산다. 종합비타민. 오메가3, 유산균, 밀크씨슬, 매스틱검, 프로폴리스, 프로폴리스, 프로폴리스.


 꽤 오랫동안 빨리 나이가 들었으면 했다. 잘 생각해보면 바로 며칠 전까지도 그랬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아니, 확실히 지금도.


나는 언제나 빨리 나이가 들었으면 한다. 간혹 젊은 것은 젊은 대로 부럽다지만, 그건 나도 이미 해본 거다. 지금보다 나이가 드는 게 아직 못 해본 일이다. 아,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렇다. 나는 빨리 늙고 싶은 건 아니고, 빨리 무르익고 싶다.


무르익는다는 건 마냥 시간이 흐른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마음만 먹어서 되는 일도 아니다. 분명 시간을 두고 공을 들여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결과다. 그건 섬세한 눈으로, 부지런한 태도로, 곧은 마음으로, 바른 자세로 오랜 시간 꾸준히 나를 돌보고 나아가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어쩌면 덜컥 나이는 들었는데 제때 무르익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것에 지나치게 조바심을 낸다.


마음과 달리 몸은 점점 더 쉽게 지쳐간다. 오늘도 약을 털어 넣는다. 비타민B, 리버디톡스, 마그네슘, 오메가3, 프로폴리스, 프로폴리스, 프로폴리스. 또 밤잠을 설치고, 다시 피로를 쌓는다. 날씨 탓을 하려다 관둔다.


오늘치 해가 뜬다. 전날보다 조금 더 차가웠던 어둠이 떠난 자리에 온기가 닿는다. 그런데도 오늘은 어제보다 춥다. 날이 제법 춥다. 그래도 내일도 다시 해가 뜬다. 그렇게 생각하니 피로도, 추위도 견뎌볼 법하다. 하루하루 낡아가도, 매일매일 새것을 얻는다. 이런 거라면 겨울도 버틸 수 있다.


 아니, 낡아갈 수는 없다. 무르익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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