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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Dec 17. 2022

이태리, 12월, 수육 축제를 가다

이태리 수육 축제 No Stop Bollito!

"뭐야! 아직 자는 거야? 난 벌써 도착했다구!”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주변의 소음 때문에 친구의 야단 소리도 덩달아 더 요란합니다.

이런! 새벽 네 시에 맞춰둔 알람 소리를 못 듣고 늦잠을 자 버렸네요.


부에 그라쏘(피에몬테 거세 육우) 박람회! 새벽부터 진행되는 박람회보다 이젠 No Stop Bollito! 볼리또 축제가 더 유명합니다.

집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카루(Carrù)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아홉 시쯤입니다. 하늘이 온통 흐려 도무지 아침 같지 않은 날입니다. 추운 날씨지만 축제 때문에 차는 카루 중심가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외곽에 세우게 됐습니다. 설렁설렁 일하는 듯한 이탈리아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작은 축제에도 경찰들이 주차 통제, 축제 통제를 철저히 하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문득 통제 없이 진행되어 커다란 인명 피해가 있었던 한국의 할로윈 이태원 참사가 떠올라 순간 기분이 착 가라앉았습니다.

추운 날씨, 작은 마을인데도 2중, 3중으로 인원과 차량 통제를 하던 이탈리아 경찰들과 바리케이트

털모자에 온 몸을 두꺼운 옷으로 감싸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앞서 걸어갑니다. 저도 얼른 남동생에게 얻어 입은 (어느 산에 가도 덕분에 얼어 죽지 않을) 무릎 아래까지 덮이는 커다랗고 새파란 오리털 파카 지퍼를 끝까지 올립니다. 파카에 달린 모자까지 쑥 올려 머리를 단단히 덮은 채 중무장을 하고 길을 나섰지요.


진입 골목이 여러 개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마을에 모일 줄 몰랐습니다. 길을 걷다 보니 여기저기 아는 얼굴들이 보입니다. 손에는 벌써 증류주 그라빠를 들고 말이죠. "너희는 대체 몇 시에 도착했던 거야?" 정석대로 아침 다섯 시에 도착해 다 같이 기나긴 볼리또 미스또 코스 요리를 먹고, 몸을 데운다는 명목으로 다시 바에 들러 그라빠를 한 잔 하며 웃는 사람들. 언제 코로나 시국이 있었나 싶습니다.


조금만 걸으니 어느 축제에서나 그렇듯 길게 장이 섰습니다. 갖가지 치즈며 살라미부터 새빨간 크리스마스 스웨터를 파는 매대까지 다양합니다.

저절로 눈이 가던 멧돼지 살라미 매대. 헉! 뒤에 보이는 건 당나귀(asino) 살라미 광고!

걷다 보니 누가 저와 제 친구를 부릅니다. "아가씨들! 아가씨들! 거기 좀 서 봐요!" 누가 우릴 부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구두약 아저씨 눈에 제 친구의 검은 가죽 구두와 제 부츠가 눈에 들어왔나 봅니다. 발이 얼지 말라고 길고 두꺼운 등산 양말을 속에 신고 무릎 아래까지 오는 만만한 갈색 부츠가 문제였군요.

저는 "괜찮습니다."하고 가려는데, 인정 많은 친구는 청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척하고 발 하나를 신발 광내는 판 위에 올려놓습니다. 아저씨는 신이 나 "자! 이 구두 좀 보세요. 금방 새 구두가 됩니다!" 묽은 재질의 구두약을 살짝 발라 구두를 슥슥 닦으니 정말 반짝반짝 새 신발 같습니다. 갑자기 지나가던 할머니가 "나 하나 주슈!" 합니다. 친구도 저도 덩달아 하나씩 샀지요. 추운 날씨에 손님이 없어 울상이던 구두약 아저씨 얼굴이 환해집니다. 저도 미소가 지어지네요.


자, 이젠 부츠도 광이 나게 닦았고! 발걸음이 더 가볍습니다. 이번엔 멀리서 한 떼의 악사들이 길을 막고 다가옵니다. 그중 몇은 검은 중절모에 어깨엔 척 하니 검은 망또까지 걸치고 말이지요. 중간에 제일 흥이 많아 보이는 아코디언을 켜는 남자가 가수 겸 리더 같습니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눈짓으로 지휘를 하듯 주거니 받거니 행진하며 흥겹게 노래를 부릅니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도 안 되는 우중충한 어두운 날씨였는데, 갑자기 거리에 악사들의 행진이 이어지니 저도 모르게 어깨춤이 얼쑤 납니다.   

추운 날씨에도 흥겹게 연주를 이어가던 거리의 악사들


크리스마스 장도 구경하고, ‘아니, 너희도 여기에?’ 아는 얼굴도 인사도 하고, 악사 노래도 듣다 보니 발걸음은 어느새 새하얗고 커다란 피에몬테 토종 육우, 부에 그라쏘(Bue Grasso) 박람회 근처에 다 왔습니다.

멀리 한 줄은 하얀 엉덩이를 보이며 섰고, 다른 쪽은 머리를 우리 쪽으로 두고 바라봅니다. 하얀 소가 어찌나 큰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어릴 적 사찰에 가면 사찰 벽화에 그려진 잃어버린 하얀 소는 '잃어버린 자아'라 했거늘...... 이곳은 아주 커다란 흰 소가 많고도 많습니다.

집채만 한 하얀 소들, Bue Grasso


"자! 다 봤지? 진짜 구경은 이제부터! 배 고프다, 얼른 볼리또 먹으러 가자!" 친구가 재촉합니다. 카루에서 볼리또로 가장 유명하다는 식당 '뜨라또리아 바쉘로 도로(Trattoria Vascello d’Oro)'앞에 얼른 줄을 섰습니다. "날도 추운데 예약을 안 하면 어떻게 해?"하고 걱정하던 제게, 친구는 걱정 말라며 큰 소리르 쳤죠. 얼마 기다리지 않아 "두 명이예요? 오케이! 들어와요!" 활짝 천국의 문이 열렸습니다.


아침 10시가 아니라 저녁 10시의 풍경이 아닐까 싶은 홀을 가득 매운 사람들.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일어나 건배를 외칩니다.


진정 이것이 이탈리아 아침 10시 풍경이 맞습니까? 아니 기껏해야 에스프레소나 홀짝이는 사람들 아니었나요? 정말 새벽 다섯 시부터 뜨거운 수육, 볼리또를 먹겠다고 모인 겁니까?

식당의 작은 홀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습니다. 비어있는 테이블에 아주머니가 다가오시더니 금방 치우고 새 식탁보를 깔아 주십니다. "지금이 몇 회전이에요?" "이 테이블만 벌써 세 번째로 치워요." 그러니 우리가 이 테이블의 네 번째 손님입니다. 아침 10시에 4회전 테이블, 한국 대박 해장국 집이 부럽지 않겠습니다.


4인용 테이블 자리에 앉자마자 주인아주머니가 부탁합니다. "미안한테 조금 당겨 앉아 주세요. 오늘은 이렇게 테이블도 나눠 쓰는 날입니다." 조금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졸지에 모르는 사람들과 합석을 합니다.


메뉴 따위는 없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하우스 와인이 척 하니 올라오고, 그 뒤를 이어 얇게 자른 갖은 살라미, 육회(battuta di fassona), 인살라따 루싸(insalata russa 러시아와 상관없지만 이름만 러시아 샐러드), 고기 속을 채운 납작한 이탈리아식 만두 라비올리를 차례대로 권하십니다. "저희는 볼리또 축제니까 볼리또 먹을래요." 옆 테이블 손님들이 차례대로 대식가의 면모를 드러내는 걸 보면서 볼리또를 기다립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함성을 지릅니다. 볼리또 수레가 들어왔군요. 커다란 쟁반 위에 김이 펄펄 나는 고기 부위들이 가득합니다. 사이드 디쉬로는 매쉬드 포테이토와 익힌 양배추가 있군요.

친구는 머릿살을 좋아합니다. "머릿살(Testina) 많이 주세요. 감자랑 양배추는 필요 없어요."

아주머니 두 분이 합을 맞춰 한 분은 주문이 오는 대로 고기를 슥슥 잘라 척척 접시 위에 놓으시고, 다른 한 분은 신속히 접시를 배달합니다.

"저는 혀를 많이 주세요." 무슨 호러 영화 대사 같습니다만, 이탈리아에 오고 나서 소 혀 요리에 완전히 반해 버린 탓입니다.

두 여자가 머릿살이니 혀니 주문을 해 대니 주변의 아저씨들이 "이 싸람들이 좀 먹을 줄 아네그려!" 하고 웃으며 쳐다봅니다. 친구는 콜라겐 많은 머릿살을, 저는 부들부들한 혀를 이탈리아 파슬리와 앤쵸비, 올리브 오일, 약간의 마늘을 다져 넣고 만든 초록색 소스에 폭 찍어 먹습니다. 하우스 와인 대신 주문한 도메니코 클레리코(Domenico Clerico)의 카피즈메(Capisme)를 한 모금 들이킵니다.

아! 이곳은 천국인가요?

Bollito Piemontese, 피에몬테식 소고기 수육 모듬

테이블마다 먹는 속도가 다르니 김이 펄펄 나는 볼리또 수레는 홀에 들어오기를 반복하고, 볼리또가 들어올 때마다 사람들은 환성을 질러 댑니다. 너무 즐거운 나머지 갑자기 한 젊은이가 테이블에서 와인 잔을 들고일어나 "자! 여러분, 다 같이 건배합시다!" 건배 제의에 누구랄 것도 없이 다 같이 잔을 높이 들고 "건배!"를 외칩니다. 이것이 볼리또 축제의 매력인가 봅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도 볼리또를 마주하고 활짝 웃으며 다 함께 건배를 외치는 것 말입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빨리 뜨거운 고기를 잘라내던 아주머니


볼리또 미스또를 먹고 나서 저는 뜨거운 육수를 주문했습니다. 친구는 "볼리또 머릿살 추가요!"를 외칩니다.

한 숟가락만 떠서 들이켜도 입술에 진득한 느낌이 나는 젤라틴 가득한 육수에 갓 갈아낸 후추와 소금을 조금 넣습니다. 작은 또르뗄리를 넣어도 좋지만, 피에몬테식 바삭한 빵 그리시니(Grissini)를 조금 잘라 육수에 퐁 담갔다 바로 건져 육수와 함께 먹으니 산해진미가 따로 없습니다.

얼어붙은 몸은 물론 차가운 마음까지 녹여줄 뜨거운 육수! 취향대로 소금 촥촥, 후추 빠작빠작 바로 신선하게 갈아내서 뿌립니다.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니 와인도 한 잔이 두 잔이 됩니다. 옆에 앉은 사람들이 우리가 마시는 와인 맛이 궁금한가 봅니다.

 "한 잔 하세요!" 친화력이 남다른 친구가 옆의 아저씨에게 우리 와인을 인심 좋게 권합니다. "응? 저기요! 우리도 이 와인 한 병 주세요!" 와인이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식당의 크고 작은 홀은 빈 구석 하나 없이 그야말로 만원입니다. 사람들은 흥겹게 이야기를 나누다 웃어재낍니다. 다른 홀에서는 다 같이 부르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보다 먼저 왔던 앞 테이블에는 식사가 거의 끝났는지 새빨간 앞치마와 요리 모자를 쓴 사장이 마치 산타클로스인 양 허허 웃으며 들어와 테이블을 돌며 증류주 그라빠를 권합니다.


신이 날 만도 하지요. 딱 하루, 볼리또를 파는 레스토랑은 테이블 회전이 끝도 없이 도는 날.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볼리또 축제가 열리는 날이 오늘이니까요.


레스토랑 문을 나서며 저희는 또 한 번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이제는 레스토랑 문 앞에 딱 붙은 대기 줄이 어마어마합니다. 놀라는 제 표정에 발을 동동 거리며 추위를 참던 사람들이 왁자지껄 다 같이 웃습니다. 사람들 웃음소리 때문일까요? 잔뜩 찌푸렸던 하늘에서 갑자기 눈이 내립니다.                  

꽁꽁 싸매고 추위에 떨며 기다려도 함박 웃음이 가득한 사람들, 미소는 전염이 되니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올 해는 12월 15일 목요일에 열렸던 카루의 볼리또 미스토 축제(No Stop Bollito!)에 다녀왔습니다. 피에몬테 거세 육우 박람회(Fiera di Bue Grasso)와 함께 열리는 축제에 대한 이야기는 저의 글 <이태리, 12월엔 커피 말고 수육?>   https://brunch.co.kr/@natalia0714som/186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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