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지만 말고 스며들었다 가는 이탈리아 여행>
드디어 봄입니다! 한국에서도 여기저기 꽃망울이 터진 사진들이 연신 '까똑, 까똑'하며 도착하는 걸 보니 한국에도 드디어 완연한 봄이 온 모양이군요.
따스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기 시작하면, 답답한 실내보다는 따스한 햇살 아래를 찾게 되지요. 밝은 햇살 아래나 막 어스름이 내리는 해 질 녘 시원한 바람도 시원하게 느껴질 때가 오면 실내를 벗어난 야외 공간이 참 반갑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뭐? 눈만 감고 가만히 미소 짓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시간. 혼자라면 좋은 책과 함께, 혼자가 아니라면 같이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좋은 사람과 함께. 거기다 분위기를 돋궈줄 아페리티보 Aperitivo를 한다면요?
며칠 전 한국에서 여행 온 사촌 동생을 만나러 피렌체를 다녀왔습니다. 영국과 파리에서 우중충한 날씨를 만났던 사촌 동생은 여행 중 처음으로 초여름처럼 내리쬐는 밝은 햇살을 받으며 거리를 걷느라 여간 행복해하는 게 아니었어요. 햇살 아래 산책도 좋지만 약간의 목마름이 느껴지는 순간, 참을 수 있나요?
"아! 날씨 좋다! 어디 탁 트인 데 가서 아페리티보 할까?"
"응? 그런데 언니, 아페리티보가 뭐야?"
(아페리티보 Aperitivo 가 궁금하시면 저의 글 <이태리 오셨으면 아페리티보, 하셔야죠?> 읽어 보시죠.)
https://brunch.co.kr/@natalia0714som/57
"잠깐 앉아 가볍게 한 잔 하러 가자구!"
젊은이는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백발이 성성할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이탈리아 사람들의 아페리티보 사랑은 대단합니다.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하기엔 조금 어중간한 시간이 되면 여기저기 햇살 좋고 바람 시원한 노천 광장에 빼곡한 작은 테이블들이 붐비기 시작합니다. 편하게 앉아 각자 원하는 음료 한 잔 씩을 앞에 두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거지요.
'원하는 음료 한 잔'의 개념이 모호하다구요?
보통은 그야말로 '원하는 음료 한 잔'이면 됩니다. 네, 정말입니다. 당신이 극강의 자연주의자라면 물 한 잔이어도 됩니다. 시원한 생수 한 잔이나 이탈리아 산 스파클링 워터 한 잔도 나쁠 건 없지요.
시원하게 맥주 한 잔도 좋겠지요. 이탈리아에 오셨으니 이왕이면 이탈리아 맥주는 어떨까요? 이탈리아 맥주가 이탈리아 와인처럼 유명하진 않지만 저는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서 생산되는 맥주를 맛보는 걸 좋아합니다.
베니스에서도 더 북동쪽으로 가야 만날 수 있는 이탈리아 북동부 끝에 위치한 도시 우디네(Udine)에서 생산되지만 이탈리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모레띠(Moretti), 피에몬테 주에서는 역시 메나브레아(Menabrea), 로마에 가면 페로니(Peroni) 혹은 나스트로 아주로(Nastro Azzuro), 롬바르디아 주에 가면 홉(루뽈로 luppolo)의 함유량에 따라 여러 버전을 내놓아 선택이 다양한 뽀레띠(Poretti), 시칠리아 섬에 가면 메씨나(Messina), 사르데냐 섬에 가면 한 뼘도 안 되는 꼬꼬마 병에서부터 논필터 버전까지 매력이 있는 이크누사(Ichusa)가 있습니다. 아! 잊을 뻔했군요. 후발 주자로 출발했고, 가격이 좀 사악하긴 합니다만, 피에몬테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이탈리아 전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수제 맥주 브랜드 발라딘(Baladin)을 만나신다면 꼭 맛보시길 권합니다.
알콜이 들어간 음료를 마실 수 없는 상황이거나 개인적 선택으로 마시지 않지만 분위기는 내고 싶으시다면 논-알콜 칵테일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 와인은요?"
그럼요, 와인 한 잔도 좋습니다. 와인 전문점인 비네리아(Vineria)나 에노테카(Enoteca)에서 하시는 아페리티보라면 적극 추천드립니다. 잔 와인 용으로 몇 종을 정해놓은 경우도 있지만, 운이 좋을 경우 이미 오픈된 멋진 와인을 만나실 수도 있으니까요.
와인 전문점이 아니라면.... 아페리티보에서 와인이라면 최상의 질은 보장드릴 수 없습니다. 스파클링 와인을 원하신다면 가볍게 스푸만테 한 잔, 보통은 그 지역 근처에서 생산되는 대중적인 품종과 가격의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 정도로 선택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밝은 햇살 아래 화이트 와인 한 잔이라면 어찌 거절할 수가 있을까요?
사촌 동생이 성인이 되고 나서는 처음 만나 알콜성 음료를 마시는 거라 고민을 살짝 했습니다. 알콜 도수가 낮고 맛이 부드러워 호불호 없는 칵테일 미모사, 그리고 약간의 쓴맛이 나서 더 매력적인 이탈리아 국민 칵테일 스프리츠를 주문했지요.
봄에 딱 어울리는 칵테일 미모사 Mimosa는 신선하게 갓 짠 오렌지 주스 스프레무따 Spremuta d'arancia에 달지 않은 기포성 화이트 와인 스푸만테 Spumante를 블렌드 한 가벼운 칵테일입니다. 작은 병아리가 생각나는 봄꽃 미모사에서 딴 이름처럼 노란 미모사는 밝은 햇살 아래 마시기에 부담이 없는 칵테일이지요. 무알콜 칵테일만 즐겨 마시던 분들에게도 추천하기 부담 없는 음료라 사촌 동생에게 권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진실의 미간으로 노란색의 미모사보다 요염한 붉은색이 영롱한 스프리츠에 환호했지요.
이탈리아에서 광장 작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보면, 와인잔에 얼음을 채운 붉은 오렌지색 음료를 홀짝이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지 않던가요?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장 즐겨 시키는 칵테일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그 오렌지 색이 도는 빨간 스프리츠(Spritz)일 겁니다.
그 인기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스프리츠가 태어난 이탈리아 베네토 주 안에서만 하루에 30만 잔, 일 분에 200잔 이상이 소비된다고 하는군요. 이탈리아의 공신력 있는 신문 '라 레뿌블리카 La Repubblica'에 실렸던 기사 <Lo Spritz: il drink più leggero è anche il più bevuto(non solo nel Veneto) >에서 읽었으니 완전히 허풍은 아닐 겁니다.
정말로 이탈리아 인들과 아페리티보를 하러 가면 십중팔구는 스프리츠를 외쳐대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치명적일 만큼 매력적인 붉은색에 비해 알콜 도수는 8~9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식사 전 출출할 때 올리브 몇 알이나 앞에 두고 빈 속에 홀짝여도 부담스럽지 않은 게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단 맛이 도는 음료에 질색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스프리츠는 은은한 단맛도 있지만 또 적당한 쓴맛이 밸런스를 맞춰주니 잔 와인을 시키기 애매한 집에서 아페리티보를 할 때 자주 시킨답니다.
매력적인 붉은색의 비밀은 이탈리아 산 리큐르 아페롤 Aperol 혹은 캄파리 Campari Bitter에서 나옵니다. 스프리츠가 오렌지 색일 때도 있고, 새빨간 진한 붉은색일 때도 있는데, 오렌지 색인 아페롤을 넣느냐, 빨간 색인 깜빠리를 넣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렌지 색의 아페롤은 단 맛이 강하고 쓴 맛이 약합니다. 붉은색의 깜빠리는 그 반대의 경우이고 도수도 더 높지요. 달달함 뒤에 오는 은은한 쓴 맛을 좋아하시면 아페롤 스프리츠를, 존재감 있는 쓴맛에 은은한 단맛을 좋아하시면 캄파리 스프리츠를 주문하시면 됩니다.
너무 달지도 않고 너무 쓰지도 않게 마시고 싶을 땐 아페롤과 캄파리를 반반씩 넣고 만들어달라고 하지요. 아페롤의 오렌지 색과 캄파리의 붉은색이 그라데이션 층을 내니 색에서부터 더 매력적인 자태를 뽐내거든요.
아페롤은 11도, 캄파리는 25도의 알콜 도수를 자랑합니다. 그러니 8~9도라는 스프리츠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뭔가가 더 필요하겠지요?
네, 맞습니다. 보통은 기포가 있는 드라이한 프로세코 혹은 드라이 한 화이트 와인을 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간의 스파클링 워터 혹은 소다수가 더해집니다.
"예? 술에 물을 탄다굽쇼?"
"네, 그렇습니다."
한국에서는 소위 '물 탄다'라고 하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지요. 이탈리아에서는 '술에 물 타는'일이 흔합니다.
특히 연세가 지긋하게 드신 70대 이상의 어르신들이 와인을 드실 때, 생수나 탄산수를 타서 도수를 낮춰 드시는 일이 잦습니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셀프 칵테일이라고나 할까요? "젊을 땐 거뜬했는데 말이지, 얼마 전부턴 와인이 안 받아. 그런데 물을 타니 괜찮더라고.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렇게 술에 물을 타서 드시더니......" 이제 일흔이 넘으신 제 친구 아버지의 말씀이시지요.
탄산수를 첨가하지 않고 프로세코와 아페롤 혹은 캄파리만 넣은 스프리츠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스프리츠 잔을 가득 채운 얼음이 마주 앉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알아서 조금씩 녹게 되니 시간이 지날수록 알아서 농도가 조절이 되기 때문이지요.
이탈리아에 오시면 광장에 앉아 스프리츠 한 잔 해 보세요. 한국에서도 여행의 여운을 스프리츠를 마시며 기억하고 싶으시거나, 스프리츠 맛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레시피를 남깁니다.
Aperol.com에 공시된 아페롤 스프리츠 공식 레시피는 아래와 같습니다.
. 와인잔을 얼음으로 채우세요
. 프로세코 D.O.C. 9cl를 부으세요.
. 아페롤을 6cl를 더해 주세요.
. 소다수를 3cl 넣어 주세요.
. 얇은 오렌지 조각으로 잔을 장식해 주세요.
campari.com의 캄파리 공식 레시피도 살펴볼까요?
. 캄파리 6cl, 프로세코 9cl, 소다수 3cl
. 얼음으로 가득 채워진 와인잔에 먼저 프로세코, 캄파리, 소다수 순으로 넣어 주세요.
. 얇은 레몬 한 조각으로 마무리하세요. 시트러스향을 더하려면 오렌지 제스트를 추가해도 좋습니다.
레시피가 모두 와인잔 기준입니다. 칵테일 셰이커를 사용하지 않고, 잔 하나하나마다 얼음, 프로세코, 아페롤 혹은 캄파리, 소다수, 오렌지 조각의 순서로 첨가해 만들지요.
혹시 이탈리아에서 스프리츠를 맛보시기 전에 한국에서 만들어 보실 분을 위해 레시피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고급 칵테일 바가 아닌 이상, 누가 저 정확한 용량을 지켜 만들겠습니까? 이탈리아에서도 능숙한 바텐더들은 정량을 재기보다 감으로 재빠르게 만들어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심지어 얼마 전, 이웃 청년이 준비한 시골집 파티에서는 희한한 사발 스프리츠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보통 스프리츠라 함은 재료는 단순하고 착하더라도, 한 잔, 한 잔에 순서를 지켜가며 정성스레 준비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웃집 청년 알레는 레시피 제로, 잔은 무시, 커다란 사발에 콸콸 때려 넣은 만드는 사발 스프리츠 제조로 30명이나 되는 손님을 맞았지요. 그 현장이 궁금하신 분들은 저의 글 <이탈리아 시골집 스탠딩 파티 오실래요?>를 보시지요.
https://brunch.co.kr/@natalia0714som/213
그럼, 스프리츠와 함께 즐거운 아페리티보 타임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