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내가 연재하지 못했던 이유
2020년 6월부터 나는 직접 펜과 잉크로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소위 “일기”라는 것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랬듯 갑작스럽게 찾아온 바이러스와,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의 변화들에 내 멘탈은 너덜너덜해져가고 있었다. 원래도 쿠크다스멘탈이 아니었던가? 내 정신은 이보다 더 가루가 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아주 입자 고운 파우더가 되어 사방팔방을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중이었다. 아무리 거의 어느 누구도 보지 않는 내 브런치 연재 글일지라도, 페이스북과 싸이월드를 공개 일기장 삼아 자신의 속 이야기들을 써왔던 흑역사가 거의 누구에게나 있지 않은가? 그런 실수를 다시 되풀이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 하여 나는 브런치에서 손을 조심스레 떼게 되었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1.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우선 우리 회사는 2020년 3월 말 경, 직원 모두를 전원 재택근무로 돌렸다. 당시 보스와 팀원들은 2-3주 후에 보자며 각자 자리의 짐을 싸면서, 집에서 일하게 되어 신이 난다며 서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정말 한 달이면, 늦어도 한 달 후에는 다들 다시 사무실에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결국은 2021년 9월이 되어서야 하이브리드 형태로 일주일의 반은 출근하고 반은 재택근무를 하는 시스템이 되어 서로의 실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엔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하는 바람에 팀이 나뉘게 되었고, 팀의 리더들이 바뀌었으며, 회사의 방침에 따라 필리핀 마닐라에 50인 이상이 되는 팀을 따로 채용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야말로 혼돈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나는 사실 집에서 더 일이 잘 되는 사람이라 재택근무를 하는 것이 매우 체질에 맞았다. 하지만 사무실에 나가고 싶어 안달인 것처럼 보이는 팀원들도 있었다. 우리는 매달 말이면 각자 다른 이유로 언제 다시 사무실로 출근하라는 통보가 올 건지에 대해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 사이 어떤 직원들은 새로 채용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떠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실물을 볼 새도 없이 팀에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아, 남편하고 둘이 24시간 내내 붙어 있는 것은 사실 천국 같았다. 남들은 같이 늘 붙어 있느라 힘들어하기도 하던데 우리는 둘 다 서로가 곁에 있음에 신이 났다. 하지만 그놈의 마스크를 쓰네 안 쓰네 부터, 바이러스를 정치 문제로 여기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벌이는 폭력적인 데모들, 동양인을 향한 인종차별 범죄들, 장을 보러 갈 때면 곁을 스치는 타인을 미워하게 되는 마음들, 또 화장지는 얼마나 구하기 힘들던지! 2019년부터 매년 한국에 가겠노라 다짐했는데 부모님은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등등. 백신은 또 어땠는가! 백신을 믿을 수 있네 없네, 부작용이 있네 없네, 사람이 살았네 죽었네…. 멘탈이 어지간히 강철이 아니고서야 누군들 버티기 쉬울까!
2. 대인관계가 깨졌다.
고립된 생활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더 예민해 지기 마련이다. 거기에 서로 직접 얼굴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 아무리 화상채팅이 있다고 하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너무도 다르다 - 혹여 작은 오해라도 생기면, 그 오해가 심지어 당사자들과 관련이 없는 오해일지라도 - 그 인연은 그대로 끝이 나 버리는 경우도 있더라. 할머니까지 평생 친구, 아니 우리는 시스터들이라며 그렇게 견고했던 우리 팀원들, 친구들 사이에도 그런 균열은 피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나 보다. 지극히 사적인, 그들의 이야기라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틀어지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아직도 종종 든다. 이대로 끝나는 우정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상황이 아쉬워 중간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다가 나 역시 호되게 데었다. Oh, well!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긴 지금 뭘 더 어쩌겠는가! 이 상황을 겪으면서 어릴 적 사귀던 남자 친구와 군 생활 내내 (휴가를 제외하고)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에만 의존해 소통을 해야 했던 때가 기억이 났다. 그때만 해도 군인들은 절대로 부대 안에서 휴대폰을 소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대 안 공중전화로 연락을 해야 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늘 상대방의 전화를 기다렸고, 그 그리운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평소와 다르게 들리면 걱정하고, 걱정하는 단어들을 들으며 상대방도 나름대로 답답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만나서 얼굴 보며 대화할 수 있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일들이, 그때는 그렇게 확대되어 보였다. 지금 그 친구들의 상황과 옛날 고무신 시절의 상황이 묘하게 겹쳐 보이는 순간이었다.
3. 집을 샀다.
2019년 말쯤부터 집을 사고 싶다는 목소리가 내 안 어딘가로부터 강하게 들려왔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나는 남편을 설득해 2020년 1월 1일부터 집을 보러 다녔다. 판데믹이 시작되기 전까지 근근이 오픈 하우스를 보며 시장 조사를 했고, 얼마 안 가 판데믹이 터졌다. 일단 모든 것을 멈춰야 했다. 그리고 아파트 리스를 갱신할 때, 우리 아파트 업체는 월세를 월 200불가량을 올려버렸다. 월 200불이라니! 보통은 50불 정도를 올리는데 말이다. 우리 유닛은 아이들 놀이터 바로 근처에 있었는데, 판데믹으로 학교에 갈 수 없게 된 아이들이 어느 시간대다 할 것 없이 밤낮으로 소리를 질러대며 뛰어다녔다. 근무시간에 미팅을 할 때면 모니터 너머로 애들이 소리 지르는 것을 미팅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어떤 때는 3층인 우리 집까지 우르르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어떤 날은 놀이터 한가운데서 야밤에 폭죽을 터뜨렸다. 건물들과의 거리가 가깝고 나무도 많아 자칫하면 화재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애들이고 어른들이고 할 것 없이 서로 미쳐가고 서로 예민해지고 있었다. 이웃들이 싸우는 소리를 듣는 빈도도 늘어났다. 이렇게는 살 수 없겠더라. 2020년 초에 집을 사려고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살 때가 아니라고 말려서 사지 못하고 있다가 판데믹이 터졌고, 재택근무로 돌린 회사들이 많아짐에 따라 살기 비싼 주에 사는 사람들이 -이를테면 캘리포니아, 뉴욕 등- 애리조나에 집을 사겠다고 몰려왔다. 그래서 집값이고 월세고 무서운 속도로 가격이 오르고 있었다. 나는 집을 사야 했다. 지금 사지 않으면 나중에는 가격이 정말 너무 올라서 아예 하우스 시장에 진입조차 못하고 평생 월세로만 살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집을 장만한 얘기는 할 말이 아주 많기 때문에 따로 나중에 자세히 다루려고 한다. 여하튼 집을 샀다.
4. 나와의 대화가 늘었다.
일기를 다시 꾸준히 쓰게 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안 그래도 생각으로 가득 찬 내 머릿속에 더 많은 생각들이 들어앉았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뭘까? 내가 좋아하는 건 뭘까? 내가 할 수 있을까? 마지막 연재 글에서 나는 가면 증후군을 거의 벗었다고 했는데, 자격지심이라는 친구는 늘 마음 저 구석에 꽁하게 앉아있다가 이따금씩 고개를 내밀곤 했다. 어떤 날은 그런 자격지심 투성이인 나를 꾸짖고 용기를 주기도 했다가도 어떤 날이면 그 자격지심에 잠식당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삶이 아무 의미가 없고 무기력하다가도 또 어떤 날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그리고 일기를 쓰면서는 거의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어떤 생각이든 뱉어내느라 바빴고, 일기를 쓰고 난 후에는 다시 그 감정들이나 생각들을 뒤돌아 보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문장들을 나름대로 ‘정리’ 해서 써야 하는 브런치에 글을 연재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냈던 것 같다. 그래도 늘 마음 한 켠에는 ‘연재를 다시 해야 하는데, 글을 다시 써야 하는데. 다시 쓰고 싶은데.’ 하는 생각들이 굴러다녔더랬다. 그러다가도 “글? 어릴 때나 잘 썼지…….” 하며 그 굴러다니던 생각들을 발로 뻥뻥 차 버리곤 했다. 사실 아직도 나와의 대화는 진행 중이고, 아직도 많은 것들이 혼돈스럽다. 언제까지고 그저 때를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나 싶어서 키보드 앞에 앉아 손가락을 이리저리 놀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래도 다사다난했던 2020-2021년을 지나, 이렇게 다시 뭔가를 쓰고 있는 나를 보니까 조금은 뿌듯한 마음이 있다.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읽어 주실지, 공감을 할 수 있을 만한 부분이 있는 글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먼 훗날 다시 꺼내어 봤을 때, 그 시절 싸이월드 다이어리보다 더 창피하고 오글거릴지도 모르겠다. 몰라! 그래도 이렇게 썼다. 이렇게 어쨌든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다음이 언제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얼마나 규칙적으로 쓸지는 몰라도 말이다. 어쨌든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아무튼 지난 두 해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너무 한꺼번에 내 앞에 풀어두고 도망가 버렸다. 못다 한 얘기들은 또 다음에 천천히 풀어놓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여기서 마무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