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을 따라간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스물셋? 스물다섯? 아니, 곧 서른셋이다.
아이유는 스물다섯에 자신을 알 것 같다고 했는데. 나는 이제 한국 나이로 서른셋이 되는데 모든 것이 물음표다. 아주 새 도화지가 따로 없게 머릿속이 하얀 백지장보다 더 하얗다. 내 미래도. 남들은 사춘기 때나 이십 대 초반에나 할 고민들을 지금에서야 하고 있다. 그래도 늦게나마 스스로를 좀 더 알아가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봐야 하려나?
나를 알아보겠다며 스스로를 들여다보다가 발견한 것 중 하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는 취향이 소나무라는 것이다. 나는 금세 질려하고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한국에서 살 때는 물론이고 뉴저지에서 살 때까지만 해도 나는 늘 최신 휴대폰을 좇던 사람이다. 아이폰이 새로 출시될 때마다 애플 스토어에 가서 봐야 했고, 사야 했다. 감히 명품은 살 용기가 나지 않던 나는, 최신 휴대폰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치였다. 새로 출시된, 소위 ‘갓 신상’인 폰을 들고 다닐 때면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내 폰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딘지 의기양양해지고는 했다. 자라에 가서 이번 시즌에는 어떤 옷이 나왔나 늘 확인해야 했고, 여하간 최근에 유행한다는 것들은 할 수 있는 선에서 거의 따랐던 것 같다. 유행한다는 펌이나 염색도, 매번 그렇게 바꾸지는 않더라도 주기적으로 바꾸어 주곤 했다. 그런데 이곳 사막에 온 이후의 삶은 사실은 그게 내가 원하던 삶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휴대폰도 더 이상 사용하기 힘든 순간까지 3년이 넘도록, 배터리가 부풀어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휴대폰을 들고 다녔더랬다. 옷도 정말 내 스타일이다 싶은 옷이 아니면 사지 않게 되었다. 계절마다 신는 신발도 한 켤레, 많으면 두 켤레 정도. 그렇다고 나는 사람처럼 보이기를 포기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여전히 예쁜 옷이 나오면 사고 싶고 실제로 어떤 때는 사기도 한다. 그런데 그 기준이 ‘트렌드’가 아니라, 내 ‘취향’이 되었다는 것? 내 스스로가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옷의 대부분은 5년 이상을 훌쩍 넘겼고, 어차피 새로 옷을 사더라도 비슷한 생김새의 것들을 산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저 한 때 좋아하고 말 줄 알았던 빈티지하고 레트로 한 분위기의 것들을 여전히 좋아하고, 어딘가 살짝 촌스럽거나 낡아 보이는 것들을 좋아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 가장 작은 방을 내 스튜디오로 꾸미고 있는 중인데, 트렌디한 인테리어 소품들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득한 그 방에 들어설 때면, 아니, 그 방이 거실에서 고개를 돌리면 슬그머니 보일 때부터 나는 어딘가 안락해짐을 느낀다.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뉴욕만큼 대도시는 아니지만, 애리조나 역시 그래도 요즘 급부상하고 있는 큰 주이고 그만큼 사람들도 도시도 꽤나 트렌디하다면 트렌디한데도, 나는 어쩐지 여기에서의 삶에 더 편안함을 느끼고 남들의 시선보다는 나에 집중하게 되는, 분명 어떤 그런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아직도 많은 것들이 물음표이기는 해도 말이다. 최근에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비교적 심오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속에 물음표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알아 가는 중이니까. 아이유보다 한 십 년 정도 느린 속도로 가고 있는 것 같기는 해도. 그래도 괜찮을 거야, 아마도?
2021년에만 세 사람을 잃었다.
정말 몇 년 동안 고민만 하다가 작년 12월 30일에 큰 마음먹고 타투를 하나 새겼다. 타투에 대해 남들의 시선을 걱정했다기보다, 혹시 내가 취향이 변해서 나중에 내 몸에 영원히 새겨진 그 무언가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선뜻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다가 내 취향은 내 생각보다 더 소나무라는 사실을 깨닫는 대로 타투 잘하는 곳을 찾아 예약을 했더랬다. 당시 타투에 대해 어떤 배경 지식도 없던 터라 (나중에 잉크 마스터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면서 타투이스트들이 타투를 난생처음 새기는 클라이언트들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겁도 질문도 많은 상태였음에도, 내 타투이스트는 모든 질문에 친절하고 성실하게 답을 해 주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나는 오만 가지 생각과 걱정을 달고 사는 사람인 데다 결정장애까지 있어서, 뭔가 하나에 꽂히면 나 스스로는 물론이요 주변 사람들까지 달달 볶는 면이 있다. 그런데도 나의 상냥한 타투이스트는 천사처럼 그가 가진 모든 아량으로 나를 이해하고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나는 내 팔에 그렇게 작지만은 않지만 꽤 귀여운 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듬해 3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누구도 사인을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스스로 삶의 마침표를 찍은 듯했다. 왜,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타투이스트였다. 한참 Black Lives Matter 시위가 있을 때, 누군가 시위하다 다치는 사람이 있으면 응급처치를 해 주려고 구급 박스를 늘 자신 근처에 두었던 사람이다. 어떤 것이 그를 이 세상과 작별하고 싶게 만들었을까?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은 인생을 통틀어 두 시간 남짓이었을 뿐인데도 나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떤 사람들은 그와 아직 작업 중인 타투와 함께 남았다. 그 타투들은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완성될까, 아니면 미완인 채로 그들과 함께 살아갈까?
남편이 뉴저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유독 선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나스타샤였는데, 그 이름이 내가 인생 애니메이션으로 꼽는 작품과 똑같아서 더 반가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녀 역시 아주 따뜻한 영혼을 품은 사람이었다. 동물 보호에 진심이었고 남편과 나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과 노스캐롤라이나 주로 이사를 가게 되고 우리는 애리조나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얼굴은 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연락하고 대화하던 친구였다. 사실 내가 그 친구와 함께 직접 만나서 시간을 보낸 건, 우리가 서로 다른 주로 이사 가기 전에 치킨 윙 집에서 만난 게 전부다. 그때 그 친구는 우리에게 노스캐롤라이나에 꼭 놀러 오라고 했었는데. 우리 모두 뉴저지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가족들을 보겠다고 불가리아로 잠시 휴가를 갔었다. 그 ‘잠시’가 조금 더 긴 시간이 되었고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불가리아에 가 있는 동안 몸이 아파 병원을 갔는데 자궁암 진단을 받은 것이었다. 발견 당시 이미 3기였다. 그래도 바로 수술을 받고 상태가 호전되는 듯했다. 그녀의 인스타에 친구들과 놀러 다닌 사진들도 올라오곤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녀는 건강은 좀 어떠냐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주제를 다른 이야기로 돌렸다. 그녀의 안녕에 대한 답을 듣기까지 우리는 몇 번이나 더 물어봐야 했다. 그녀는 암이 재발해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좀 나아지면 알려주겠다고 했었다. 항암치료가 10월 말까지 예정되어 있는데, 이게 성공할 경우 완전히 해방되는 거라고. 우리는 그 뒤로도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적인 대화로 소통을 했고, 이르게 준비한 우리의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면서 너무 예쁘다며 좋아해 줬었는데.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어떤 작별인사도 없이. 불가리아에 있어 장례식을 갈 수도 없었다. 우리는 슬픔으로 덮인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다. 우리만의 방식으로 그녀의 명복을 빌고 기렸다. 너무 고통스럽게 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알고 보니 그녀가 아팠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뉴저지에 있을 때 그녀와 꽤 가깝게 지냈던 다른 학생들도 그녀가 아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모두에게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그래도 그녀가 나와 남편에게만큼은 암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에, 조금이라도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일 수 있었다는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아직도 사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디에선가 그녀의 농담과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큰 고모부가 흉선종 판정을 받으신 지 한 달여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사실 큰 고모부와는 아마 살면서 다섯 번도 채 보지 못했을 거다. 게다가 고모부는 직업군인이셨어서 그런지, 어렸던 나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늘 다가가기 어려운 아우라 같은 것이 있었다. 가족 모임에도 큰 고모부 가족은 거의 볼 수 없었다. 2019년, 결혼 후 첫 한국 방문을 이유로 가족 식사를 할 때 뵌 게 정말 한 10년 만이었을 것이다. 그때가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갑작스럽게 흉선종 판정을 받은 후, 이 별을 떠나시기까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와닿지 않는다. 게다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생일 저녁이라며 남편과 오래간만에 멋진 곳에서 식사를 만끽하고 있을 때였고, 생일 축하한다며 연락해 온 오랜 친구가 딸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며 행복한 소식을 전해왔을 때였다. 삶이란 이렇게 아이러니한 것인가? 죽음과 새 생명과 살아가고 있는 생명이 모두 한 자리에서. 이런 게 삶이라고, 누군가 나에게 혼이라도 내며 가르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삼십 대 초반인데. 이별보다는 이 세계에 찾아오는 새 생명들을 축복해 줄 나이대가 아닌가? 왜 나에겐 벌써 이별이 후두두 찾아오는 거야, 하는 생각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쯤, 생일이라는 걸 던져 주면서 그래도 살아가는 게 인생이지 했다가, 보란 듯이 새 생명이 찾아온다는 소식을 눈앞에 데려다주었다가, 별안간 다시 이별이라니. 삶의 소용돌이라는 것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가끔 이름만 겨우 아는 사이인, 아니, 상대방은 내 이름이나 존재조차 모를지도 모르는 사이인, 오래된 기억 속 저 머나먼 어느 편의 사람들의 안부가 미치듯이 궁금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온 마음을 다해 그들의 안녕을 기원한다. 아마도 최근 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면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모습이 내가 지나온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 - 그게 찰나의 순간들이었을지라도 - 이 꾹꾹 눌려 만들어진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당시에는 늘 붙어 다니고 서로 의지하다가 훅 멀어진 사람들이 몇 있다. 싸운 것도 아니고 어떤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상하다기 보단 살면서 다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고들 하지만,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온 마음을 다해 그 사람들을 좋아한 것을 생각하면 ‘살면서 멀어진다’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럽거나 달갑지는 않은 것이다. 아무리 SNS가 성행한다고는 하지만 생각보다 안 하는 사람들도 꽤 있기 때문에, 그리고 동명이인이 너무 많아서 조금이라도 흔한 이름이다 싶으면 한 번쯤 검색해 봐야지 싶어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럴 때면 어느 때보다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런 마음에서 나는 내 SNS 계정들을 비공개로 안 해두었다. 없겠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나를 궁금해한다면 그래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안녕, 하며 인사를 건네지 않더라도 아 얘는 이렇게 살고 있구나, 잘 지내고 있구나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닿을 수 있다면, 그때 서로 웃으며 서로를 반가워 할 수 있게 되기를.
그렇게 해서 지금 쓰는 이 글이, 아직도 ‘사막에서 클로이 찾기’ 프로젝트는 진행 중이라는, 일종의 ‘상태 메시지’ 같은 것을 남기는 중인 것 같다. 아무래도 스스로를 좀 더 들여다보고, 알아 가게 되고, 용서도 하고 관용을 베풀게 되고,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한참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어딘가에는 나 아직 -느리긴 해도- 진행 중이라는 것을 남겨야 할 것 같아서. 그 어느 다른 누군가보다도 나 스스로를 위해서 말이다. 다음에는 언제 또 어떤 방점을 찍게 될까? 시간이, 그리고 나 스스로만이 답변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들려오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은근하게 나를 응원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