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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안이네 Dec 21. 2020

우리에겐 2020년 계획이 다 있었다

영화 기생충(2019)의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아들아,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영화 기생충 속 송강호의 대사처럼 작년 이맘때쯤 나에겐 멋진 계획이 있었다.


2019년 12월, 1년 간 아빠 휴직을 결정한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휴직하면 뭐 할 거야?”라는 동료들의 물음에 “그냥 뭐, 애 봐야지.”라고 다소 쿨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누구보다도 핫한 2020년을 보내기 위해 따끈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들뜬 마음을 숨기기 위해 사람들에게 흘리듯 얘기한 '육아'가 2020년 내 일상의 99%가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 아내가 복직한 후부터 우리 네 가족은 아침 7시 반에 집을 나서야 했다. 세 살짜리 꼬맹이를 어린이집에 던지듯 데려다 놓고 뒤돌아서는 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휴직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가 아내와 아이들 때문이긴 했지만 기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마흔 줄에 들어서며 눈에 띄게 찌그러지고 있는 것 같은 몸과 마음을 새 것처럼은 아니더라도 깨끗한 중고처럼 이라도 수선해주고 싶었다. 평소 배우고 싶던 수영도 배우고 PT도 받고 싶었다. 여유가 생긴다면 혼자 코인 노래방뿐 아니라 나 홀로 카페, 나 홀로 삼겹살도 가능할 것 같았다.

 '자기 계발도 해야겠지? 피아노도 배우고, 목공예도 배워야겠다.'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릿속은 가족들을 집 밖으로 내보낸 후 혼자 보낼 시간들을 꿈꾸며 남몰래 미소 짓고 있었다. 나에게 약간의 보상을 주는 게 과한 욕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나의 속마음을 시기한 걸까?

 대망의 2020년이 시작하자마자 나의 계획들은 하나둘씩 유예될 수밖에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유예되고 있었다. 아내는 나의 휴직이 '신의 한 수'라며 나의 선견지명을 치켜세웠다. 나도 이런 시기에 아이들을 집에서 돌볼 수 있게 된 걸 감사하게 생각했다. 조금만 견디면 상황이 끝날 것이며, 유예된 계획들을 하나씩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름이면 수영도 배우고, 아이들과 워터파크에서 물놀이도 할 수 있을 거야.'

 아내와 상의 끝에 1월에서 6월까지 아이들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거의 보내지 않았다. 온종일 마스크만 쓰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내가 힘들더라도 차라리 집에서 데리고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가족 여행 한 번 가지 않았을 정도로 철저하게 집에서 보냈다. 작은 집이지만 마당이 딸린 주택에 살고 있는 덕분에 가능했다. 주택이 아닌 아파트였다면 더욱 힘들었을 것이 분명했기에 스스로 위로하며 마음을 다독였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집에서 잘 지내 주었다. 봄과 여름까지 나는 좋은 아빠였고, 좋은 남편이었다.

 하지만 여름이 지날 무렵까지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이기적인 사람들로 인해 상황이 더 악화되고 있었다. 나의 계획이 실현될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었다. 찌그러진 몸과 마음은 수선되기는커녕, 군데군데 녹이 슬고 곰팡이가 생겨나는 것 같았다. 집에서 아이들을 보는 것도 한계에 도달했다.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들처럼 무언가 낯선 것들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두더지들은 나를 놀리듯 불쑥 솟아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두더지처럼 불쑥 솟아오른 감정들을 가족들에게 내비치는 게 잦아졌다.

 휴직까지 했건만, 더 이상 좋은 아빠도 좋은 남편도 아니었다.

 더 이상 나 자신에게 희망이라는 먹이를 주며 고문하기보다는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계획들을 유예가 아니라 폐기해야 옳았다. 하지만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는 건 낯설고 힘겨운 일이었다. 2019년 이전의 삶은 마치 전생처럼 느껴졌다.

 '마음껏 해외를 나갈 수 있었다고?'

 아니 이제는 전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았다. 이제는 2019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해버렸고, 변해버린 현실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옳았다. 기존의 삶으로 돌아갈 것을 꿈꾸며 현재의 삶을 옥죄기보다는 요령껏 그때그때의 상황을 보며 대응해야 했다. 아이들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적당히 보냈으며, 아이들도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는 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게 변화된 세상의 규칙이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식당에서 먹기보다는 포장해서 먹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숙박은 하지 않더라도 도시락을 싸서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상황을 받아들이고 대응하면서 마음속 두더지들은 모습을 감추었다.

 '두더지들이 사라진 걸까? 아니면 깊숙한 동굴 속에 숨어 있는 걸까?'


 영화 기생충 후반부에서 송강호는 아들에게 말한다.

  “아들아,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 지 아니?”

  “무계획이야. 무계획. 노 플랜.”

  “왜냐하면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되거든. 인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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