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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셔블 밝은 달에 Jun 20. 2020

봄이다. 숲이다.

2000년 역사의 숲 '황성공원' by 박pd


 4월이다. 봄의 경주. 남산도 좋고, 삼릉도 좋고, 김유신 장군묘 곁 벚꽃길도 좋다. 누군 대릉원 담장 옆 벚꽃길, 보문호반의 흐드러진 벚꽃이 경주의 대표 볼거리라고 하지만, 봄을 맞은 경주에서 가장 먼저 찾고 싶은 곳은 황성공원이다. 변변한 유적지 하나 없고, 대능원이니 남산 같은 관광지에서 뚝 떨어진, 경주 시민이 가장 많이 사는 동네. 황성동에 위치한 공원이 바로 그 곳.

 관광객 보다는 주민들과 더 가까운 황성공원은 사실 이름을 바꾸는 것이 맞다 싶다. 꽃 조금 심고 벤치 몇 개 두고도 ‘oo공원'이라 불리는 걸 생각하면 이 곳의 규모로 볼 때 억울한 감이 있다. 대략 90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숲을 걷다보면 이 곳은 공원보다는 ‘황성숲', 아니면 옛 이름처럼 '고성숲'이 어울린다.


크기도 크기지만 역사를 알면 더 놀랍다. 고도 경주에서 '천년 되었다', '2천년 되었다' 같은 구분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냐만은 우리 동네에 집 바로 앞에, 2천년 묵은 숲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서울서 살다 경주로 내려온 지인이 그랬다. 경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 ‘황성공원'이라고프랑스 파리 어디에서 유학을 한 지인은 지방 소도시인 경주가 시골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집에서 5-10분이면 올 수 있는 이 숲에서 돗자리를 깔고 누워 피크닉을 즐길 때면 그렇게 경주가 좋을 수 없다고 얘기한다. 10년 전 파리 도심의 숲에서 즐겼던 피크닉 같다고. 공원 없는 도시는 없겠지만 한국에서 숲이라 하면 피크닉보다는 등산일 때가 많다. 자연휴양림이라는 불리는 곳들을 떠올려보면.더욱 그렇다. 도심의 인공으로 조성된 공원에서 그런 숲의느낌, 혹은 '숲'이란 단어가 주는 자연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내긴 어렵다. (글자 ''은 어쩜 모양마저도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느낌일까) 도시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이 황성공원을 보고 감탄하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도시의 한 중심에 헨젤과 그레텔 같이 과자 부스러기를 놓고 와야 돌아 나올 수 있는 정도는 아니겠지만 동네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디로 들어왔고, 어디로 나가야 할지 한눈에 알아채기 힘든 숲이 황성 공원이다.

 먹고 사는 일에 지쳐 호흡이 가쁠 때면 떠올려본다. 경주 시립도서관이 보이는 길을 따라걷다 보면 멀리 빽빽한 소나무 숲이 보인다. 숲으로 들어간다. 큰길에서 대략 3분쯤 걸어 들어왔을 뿐인데, 다른 세상에 온 듯 하다. 청량한 공기, 새들의 지저귐, 곧지도, 그렇다고 구불구불하지도 않은 소나무들... 간혹 문학 작품이나 애니메이션에서 숲을 비밀스러운 곳, 위험이 도사린 곳으로 표현할 때가 있는데 실상은 이곳에서 위로 받고, 휴식을 한 뒤 복잡 다단한 인간 세계로 돌아간다. 귀에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멀어질 즈음 숲이라는 다른 차원에 들어 선 나는 호흡도, 시각도 해방을 얻는다. 몇 시간씩 운전할 필요 없고, 입장료도 없으며 거기다 평지. 오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이 숲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시작은 정확하지 않다. 신라 26대 진평왕(선덕여왕의 아버지)이 즐겨 찾던 사냥터였다니 석굴암, 첨성대 못지않은 유적인 셈. 지금의 경주 박물관 인근에 위치한 신라의 왕궁, 월성과는 한참 떨어진 황성동은 이름만 황성(皇城)이지 실제로는 서라벌의 변두리였을 것이고, 왕이 사냥을 왔을 법도 하다.

 

또한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황성공원인 '고양수(고성숲)'와 지금은 볼 수 없는 ‘유림(柳林)'이 경주의 양대 숲으로 적혀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숨쉬는 숲이라 할만 하다.


고양수(高暘藪)라는 옛 이름에도 공원의 유래가 숨어 있다. ‘藪(수)'는 '숲'을 뜻하면서도 '늪'을 뜻하기도 한다. 유림(柳林)이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면 형산강변에 위치한 이곳은 강 옆이라 습한 저지대, 늪이었거나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만든 인공 숲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천년을 거슬러 오는 동안 수 많은 이들에게 추억의 장소로 사랑받은 공원이지만 그만큼 사연도 깊다.


옛 숲의 크기에 비하면 지금은 30% 밖에 남지 않았다. 한때는 경주시가 이 곳에 시청을 짓겠다고 했다가 무산되었고, 결국 1997년에 시청 대신 시민운동장과 실내체육관을 지었다. 유물과 유적 때문에 건물 지을 곳이 부족했던 경주시는 이 숲을 알차게 활용했다. 실내체육관과 예술의 전당 건설, 각종 보조경기장들까지. 숲의 상당 부분이 사라졌다. 다행히 이제는 도심 숲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 많고, 유적 관광에 질려 숲을 찾는 관광객도 늘면서 더 이상의 개발 계획은 없는듯하다. 뭔가를 가만히 두는 행정도 필요하다. 더불어 숲의 진짜 주인이 인간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숲의 태반을 차지하는 것은 소나무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처럼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는 곳이 황성공원이다. 사진 못 찍는 사람도 웬만하면 유명 작가의 소나무 사진처럼 찍히는 것은 당연히 사진 속의 심도를 만들어주는 멋진 소나무 숲 덕택이다.


최근엔 여름철새인 후투티가 이 숲으로 이주했고, 추장새라 불리는 새의 이쁘장한 모습 때문에 사진동호회 선생님들이 대포라 불리는 망원렌즈를 가지고 나무 아래 진을 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후투티도 우거진 숲이 좋아서 찾아왔겠지. 사진동호회 선생님들은 힘들게 장비를 들고 산속을 걸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 자주 찾는다고 한다. 하지만 몰려든 카메라 때문에 후투티 입장에선 새끼 키우기가 여간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아니라니 모두 숲이 좋아서 생긴 해프닝인 것을 어쩌겠나...   


여름이 지나갈 때쯤엔 맥문동이란 보라색 꽃이 찾아온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잘 자란다는 여러해살이 식물은 황성숲을 보라색 물결로 채운다. 사진을 좋아하는 한 친구는 여름의 이른 아침 황성공원을 찾는다고 했다. 신록과 보라꽃이 만들어내는 장관은 홋카이도의 라벤더 언덕 못지않다고. 나는 그즈음 숲에서의 조깅이 가장 행복하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에서 뛰는 뉴요커를 떠올려 본다. 내 집 앞, 도시 한 가운데 위치한 황성 공원이 나의 센트럴 파크다. 한참을 뛰고는 동네 카페에서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는 정말이지. 주긴다!' 뉴요커 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건 99% 숲 덕분이다.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은 비슷해서 요즘 경주의 기념품숍에 가보면 황성공원의 사진엽서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유적이니 능이니, 석탑, 석굴암, 불국사 일색이던 엽서의 세계에 당당히 도전장을 낸 황성공원. 그래서 제안하고 싶다. 역사와 풍경에 걸맞는 새 이름을 지어주면 어떨까? 황성 센트럴 파크, 줄여서 '황센파크~' (풀 네임은 아파트 이름 같아서 안 되겠다ㅠㅠ)  차라리 숲의 정체성을 살려 '고성 숲'이라는 옛 이름으로 불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어찌 되었던 나 혼자서라도 sns에 해시태그를 달아볼까. 나만 알고 싶은 숲, 나만의 센트럴 파크 라고.


<참고>

*황성공원은 경주박물관이나 대릉원이 있는 곳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황성동에 위치한다. 차를 가지고 간다면 시립도서관 앞이나 시민운동장 앞에 주차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숲의 면적은 89만 제곱미터, 주로 수령 50-100년 소나무가 주류를 이루지만 느티나무를 비롯한 59종 1만 3700여 종의 수목이 함께 살고 있다.


*숲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이들을 위해 숲해설 프로그램이 준비되어있다. 경주시 홈페이지에서 매년 3월에서 -11월까지 신청 후 이용할 수 있다. 숲은 보고 싶으나 등산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강추한다.


*위에 언급한 경주의 오래된 숲 '유림(柳林)'은 지금은 사라졌다. 2001년 형산강변에 도로를 만들면서 숲의 대부분이 사라졌고, 현재는 도로와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꽃작가 덧붙임]

  30년전쯤 내가 아주 어릴 때, 황성공원은 우범지대였다. 산책로가 정비 되지 않은 어두운 숲길은 되도록 피해 돌아가야 할 곳이었다. 그만큼 깊고 울창한 숲이었다. 산책로가 정비되고 밝게 트인 공간이 되면서 황성공원은 시민들에게 더 없이 좋은 산책로이자 쉼터가 되었다. 내가 어릴 때 둘러 지나가야 했던 숲속에서 이제 나의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아이들 모두 그곳에서 걸음마를 뗐고, 그곳에서 다람쥐와 후투티를 만났다. 사계절 다채로운 색감과 향이 진동하는 그 숲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김유신 장군 동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갖가지 야생화가 피어나는 5월이면 그 계단은 꽃길이 된다. 계단에 올라서지 않고 그 맞은편 자리에 앉아 햇살이 한 발 한 발 올라서는 계단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빨리 올라오라고 저 높은 계단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에.

 경주에서 '힐링 여행'을 하고 싶다면 황성공원에서의 피크닉을 추천한다. 꽃피는 4월과 5월, 맥문동이 피는 8월과 단풍이 물드는 9,10월이 제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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