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안에서 자전거 타기 by 박pd
지역 방송사 피디라는 직업 특성상 개인적으로 원하지 않는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때가 있다. 속칭 협찬형 다큐멘터리인데, 지자체가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정책 홍보를 위해 다큐멘터리 제작을 의뢰하는 것이다. 그해 의뢰받은 기획은 어쩌면 경주에 생기게 될지도 모르는 트램의 필요성과 효용을 널리 알려달라는 기획이었는데, 막상 있지도 않는 '트램'이란 교통수단이 '경주의 미래를 살릴 것이다'며 뻥을 치기엔 설득력도, 논리도 부족할 것 같았다. 새로운 교통수단의 제안은 현 교통시스템의 문제 파악이 우선. 그래서 들여다본 경주는 유적의 도시이자 주차장의 도시가 되어있네...ㅠㅠ...
과거 경주는 수학여행의 메카답게 단체관광버스 -> 주차장 -> 유적관람이란 고도로 효율적인(?) 동선을 만들었고, 자가용 대중화 시대를 거치며 관광객의 단 한 걸음도 헛되이 쓰게 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로 '유적지 옆 주차장', 혹은 '주차장 옆 유적지'로 도심이 설계되면서 유적의 도시인지, 주차장의 도시인지 경주 사람도 구분이 모호할 만큼 주차장이 많은 도시가 되어버렸다. 자동차로 관광 포인트와 유적 포인트로만 옮겨 다니다 보니 경주의 발전은 선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면으로 넓어지지도 못하는 상황. 옳다구나~ 이제 문제가 뭔지 명확해졌으니, 대안만 잘 제시하자며 찾은 것이 '걸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경주의 아름다움 보여주기', '친환경적인 교통수단, 특히 자전거로 즐기는 경주'란 구성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그해, 경주 자전거 여행에 대해 아이디어를 주실 분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에 경주 deeep 게스트 하우스 권오민 대표가 있었다.
게스트 하우스 대표이자 자전거로 경주 곳곳을 흩으며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권대표는 자전거 여행지로서의 경주의 가능성을 이렇게 답했다. '경주에 살다 보면 좀 특이한 장면을 보는데요. 비 오는 날, 우산을 한 손에 들고 자전거를 타는 어르신이 많아요' 이 대답을 풀이하자면, 1번. 자전거를 타는 어르신이 많다. 2번. 그만큼 시민들의 자전거 이동이 보편화되어있다. 3번. 어르신들이 한 손으로 우산을 받쳐 들고도 자전거를 운전할 수 있을 만큼 평지 위의 도시이다. 그렇네~ 경주는 몇몇의 산들이 평평한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분지형 도시이고, 도심과 유적지들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아 약간의 체력과 공유 자전거 '따릉이(서울의 공유 자전거)' 같은 시스템만 있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자전거 여행 도시가 될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또한 수십 년 전부터 시외버스터미널 앞에 존재했던 수많은 자전거 대여소들로부터 알 수 있듯이 경주는 전통과 역사의 자전거 여행도시이다. 그 시절 웬만한 경상도의 연인들은 한 번쯤은 자전거 타고 보문단지 한 바퀴는 돌지 않았을까~
(찌찌뽕! 그냥 조용히 넘어갑시다ㅋㅋㅋ) 지금이야 자전거뿐만 아니라 스쿠터, 전동 킥보드 등으로 이동수단이 다양화되었을 뿐이지만, 걷기엔 부담스러운 거리를 적당한 속도를 가진 자전거의 페달을 굴리며, 상쾌한 바람을 맞으면서 달린다면 그야말로 지구도 살리면서, 본인 건강도 챙기고, 경주 면면을 살뜰히 돌아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이제 페달 한 바퀴를 더 굴려서 들어가 보자. 먼저 가장 기본 코스인 초보자 코스이다. 이름하여 '비기너를 위한 종합 선물세트 코스'. 국사책에 등장하는 알만한 경주의 유적들 중에 불국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경주 도심 옆 동부사적지(대략 국립경주박물관을 중심으로 3km 원을 그리면 그 속에 들어가는 주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에 위치하는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자전거는 대릉원을 지나 첨성대, 계림, 월성을 보고 돌아 나와 동궁, 국립경주박물관, 월정교, 교촌마을, 황리단길까지 그리 어렵지 않게 하루란 시간 안에 돌아볼 수 한다. 국보급 유적지 사이로 보이는 너른 들판과 그 안에 자리 잡은 능들은 적당한 속도를 가진 자전거를 타면서 바라보면 더 멋지다. 봄엔 흩날리는 벚꽃, 가을엔 떨어지는 단풍은 보너스. 때론 운치 있는 돌담길도 지나고,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월정교까지 이어진 남천 옆을 달리는 기분도 상쾌하다. 황리단길 뒷골목에 위치한 카페에서 땀을 식히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돌아와 자전거를 반납하거나 숙소로 돌아가면 노천박물관에서의 자전거 타기 놀이는 끝난다. 소개한 이 코스는 초보를 위한 코스이기도 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종합 선물세트 같은 코스이기도 하다. 작은 도시이지만 도심에서 시작한 자전거 타기는 국보급 유적지, 국가대표급 박물관, 들판과 강, 한옥마을과 카페거리까지 만날 수 있다. 하루 만에 이렇게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를 경험하게 해주는 자전거 여행코스는 단언컨대 한국엔 경주뿐이다.
초보자 코스를 섭렵하셨다면 다음은 중급자 코스. 종합 선물세트의 확장판이다. 중급이라 해도 평소 자전거를 좀 타신다는 분들에게는 '이까짓 꺼~'란 반응이 나올 거리이지만, 초보자 코스보다야 페달 굴릴 거리가 멀어서 중급자 코스로 정하였다. 대릉원에서 시작하여 서출지를 돌아 나오는 이 코스의 전체 길이는 대략 왕복 16km, 오로지 자전거로 왕복만 한다면 1시간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코스지만, 오다가다 볼거리도 많고, 중간에 자전거를 세우고 여유를 만끽하려만 적어도 5시간은 필요한 코스이다. 대릉원에서 시작하여 교촌마을과 월정교를 거쳐 국립경주박물관을 지나면 양지마을로 향하는 작은 터널을 통과하고 나면 북적되던 관광객들은 싹~ 사라지고, 한적한 시골 풍경이 나타난다. 이 길은 남산의 동쪽, 동남산으로 뻗어있는 길인데, 자동차 통행량도 적고, 주변에 숨은 보석 같은 유적과 잘 정비된 자전거도로가 있어 자전거 여행자들에게 소개하고픈 코스이다. 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다가 잠시만 걸어 올라가면 부처골 석조여래좌상, 남산 탑골 마애조상군 같은 국보급 유적을 만나 볼 수 있다.
특히나 탑골 마애불이 있는 옥룡암 뒤편까지 자전거로 올라갈 수 있고, 거기서 2-3분 걸어올라 가면 거대한 바위에 황룡사의 모습과 다양한 부처님의 모습을 새긴 부처바위를 볼 수 있다. 이곳을 '탑곡 마애조상군'이란 복잡한 한자 이름을 붙인 것은 조각과 상이 군락(조상군)을 이루어 있기 때문인데, 한 번의 방문으로 무리 지어 있는 다양한 신라 불교미술을 만날 수 있다. 미술과 역사에 대한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이곳이 지닌 신비로움과 편안한 기운 때문에라도 꼭 한번 가보고라고 권유하고 싶다. 다시 남천을 따라 논이 펼쳐진 도로를 지나면 경주가 자랑하는 포토 핫스팟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이다. 자전거에서 내려 1분이면 신록으로 꽉 채워진 공간으로 이동 가능하다. 산림환경연구원을 지나 통일전까지는 오로지 자전거를 위해 만들어진 자전거 도로에서 라이딩이 가능한다. 기존 도로 가장자리에 자전거를 도로를 만든 것이 아니라 숲이 있던 공간을 살짝 틈을 내서 자전거를 도로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 차를 피해 조마조마하게 달릴 필요 없이 소나무 숲 사이로 자전거를 달릴 수 있으니 안전하면서 상쾌하다. 이 길만큼은 경주시의 행정을 칭찬하고 싶다. '경주시!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주시길~'
통일전 앞을 지나 서출지로 가도 되고, 통일전 앞으로 난 큰길을 따라 잠시 자전거를 타고 내려갔다 와도 좋다. 이 길엔 오래된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자라고 있는데, 가을이 절정일 때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을 바라보면 자전거를 달리는 기분은 금상첨화다. 서출지(書出池)는 '편지가 나온 연못'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라시대 연못인데, 배롱나무와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 연못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특히 6-7월이면 한가득 피어난 연꽃이 장관을 이루는데, 연못 옆 벤치에 앉아서 여유롭게 서출지와 남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 내가 이 호사를 누리려고 열심히 자전거를 달렸구나'하는 뿌듯한 마음이 들것임을 확신한다.
이제 반환점을 돌아가기 전에 허기를 채워야 한다. 서출지 주변엔 꽤 괜찮은 식당이 있지만, 그중에 남산식당을 추천하다. 연배가 있는 분이라면 시원한 경상도식 추어탕을~ 추어탕이 별로인 분께는 칼국수와 파전을 권한다. 식당 입구에 야외 테이블이 있으니 계절 좋은 날, 앞에 펼쳐진 탁 트인 논 뷰를 보며 식사를 하며 시작점으로 돌아갈 에너지를 채우면 된다.
사람들은 왜 경주를 찾을까? 경주의 역사유적을 보기 위해서? 맞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수학여행 시절 반강제적인 유적 투어를 했던 탓에 웬만한 유적을 모두 다녀왔을 수도 있다 보니(물론 다 기억나는 것을 아닐 것이다^^;;) 자녀 교육 같은 목적이 아니면 경주 유적지 투어는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적답사기’ 흥행시절에 비해 많이 준 느낌이다. 어쨌든 유적의 도시 경주는 역사유적과 문화재의 보존을 위해 개발을 억제되었고, 경주 사람들이 정말 싫어하는 고도보존법 때문에 유적 옆의 한옥도 남아있게 되었고, 건축물의 고도를 제한하다 보니 시원하게 펼치지는 스카이라인이 지켜졌다. 그렇게 도심에 유적이, 도심에 숲이, 도심에 능이 있게 되었다. 자연과 유적, 쾌적한 환경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경주의 분위기 속에서 휴식과 힐링을 찾기 위해 여행객들은 경주를 찾는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경주의 환경과 자연, 미래를 지키는 교통수단으로 여행을 해보시라고 추천한다, 수학여행의 단체관광버스에서 자가용 여행시대까지 거쳐왔으니 탄소배출을 줄이는 친환경적인 교통수단 자전거로 당신의 여행까지 업그레이드시켜보면 어떨까? 알다시피 박물관은 실내에서 걸어서 봐야 한다. 그런데 자전거로 구경할 수 있는 경주란 박물관 있다면, 선택을 주저하지 마시라~ 자동차 말고 자전거. 그리고 꼭 기억하시라! 경주는 평지라는 것을~~~ You can do it!
<초급 코스>
시외버스터미널 - 대능원(혹은 우회하여 쪽샘발굴 지구) - 첨성대 - 동궁과 월지 - 국립경주박물관 - 월정교 - 교촌마을 - 황리단길 - 시외버스터미널
<중급코스>
대릉원 - 쪽샘 - 국립경주박물관 - 양지마을 - 부처골 석조여래좌상 - 남산 탑골 마애조상군(옥룡암) -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 - 서출지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오면 됨)
그 외의 추천코스
* 보문단지 코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강변 고수부지 자전거 도로를 타고 가면 보문단지까지 이어진 북천 자전거 도로가 나온다. 자전거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 보문단지와 경주월드, 보문호를 관망하면서 시내로 돌아올 수 있다. 보문단지 초입에 약간(?)의 오르막이 있다.
*서남산 코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해서 오릉을 거쳐 서남산에 위치한 포석정, 삼릉을 거쳐 내남면 소재지까지 갈 수 있다. 자동차 도로와 분리된 자전거 도로가 정비되어있다. 자전거에서 내려 삼릉 앞에 펼쳐진 소나무 숲을 산책해도 좋다. 코스 중간중간 경주 우리밀 칼국수 식당촌, 회덮밥의 명소 용산회식당, 삼겹살의 성지 내남식육식당을 들릴 수 있다. 자전거 여행이 본질인지, 먹방이 본질인지 애매하지만, 따지지 말고 둘 다 즐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