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식의첫 개인전, “Since 1998 NOW”
경인미술관 제3전시실, 2024 10/16~10/21
이호식 화가의 첫 개인전이 경인미술관 제3전시실에서 10월16일(수)부터 21일(월)까지 열렸다. 이호식 화가는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10여년 쯤 되었고, 이번이 첫 번째 개인전이므로, 누구나 ‘처음’이라는 절차 개념이 주는 상징성과 뜻이 어떠할 지 짐작할 만하기에, 그의 심경 또한 매우 긴장되면서 기대감은 높을 것이다.
대략 40여점 정도의 전시작품들은 수채화로 그린 풍경화가 주를 이루지만 아크릴(Acrylic)로 작업한 추상화 작품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수채화의 맑고 아름다운 풍경화를 통해 ‘자연’을 모티브로 한 자연의 본질이나 계절의 순환을 통해 삶의 의미와 생명의 존귀함 마저 성찰하려한 의도가 읽히지만, 나름으론 자신만의 특별한 내면의 목소리를 고백하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분명 그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어 했을 것이며, 꽤나 우회적이지만 성숙하게 시각적 상징과 의미를 담아 내면적 표상화를 시도하려는 중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는 자신의 작가노트에서 “깊은 상처와 그로 인한 내적 고통은 작품 표현의 핵심적 밑거름이 되었고, ‘길’이라는 주제는 제 삶의 여정을 상징하며 그 속에서의 고민과 성찰을 표현하는 주요 모티브”라 하였다.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자신 만의 사연과 상처가 있을 수 있다. 누구라도 예외가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제 각각이다. 그리고 그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태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아마 이호식 작가의 경우에도 자신의 “오래 전 사고로 인한 지속적인 아픔”이 있었다고 하니, 그는 자기 식의 극복 방법을 통하여 오늘의 전시회와 같은 결과로 나타났고, 이를 대중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라는 추측도 해 볼 수 있다.
이호식 작가의 전시회 주제를 대신하는 ‘Since 1998 NOW’가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NOW”는 지금 이 순간을 상징하는 언어적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며, 다소 거슬러 과거로 회귀한다면 1998년은 무언가의 기점이거나 전환의 시기일 것이다.
이호식 작가의 작품 중 『가던 길과 오는 시간』에서 ‘지금까지 가던 길(또는 걸어온 길)은 꽃길이거나 꿈길 같은 길이었을까?’에는 의문점을 담아둘 만하고, 여전히 가야할 길과 더불어 ‘다가오는’ 시간은 눈앞에 뿌려진 온갖 것을 모두 쓸어 담아도 치울 수 없는 다양한 빛과 색채로 설명될 만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것은 혼란스러울 만하게 휘황찬란한 길이면서도 쉽게 정리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듯도 하고, 한편 앞으로 펼쳐질 수도 있는 미래의 길이면서 선택하거나, 선택하려는 길을 의미할 것으로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는 이 길을 따라 걸어왔고 걸어가리라는 염원과 의지를 담아둔 상태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두 개의 연작(連作)은 필자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자극하고 희망을 느끼게 하니, 작가의 심정도 그러 하리라 기대한다.
한편 『순환』은 생명의 원천적 구조를 상징하고 있는 에너지의 실체이며, 생명이나 이를 담는 자연, 나아가 우주는 결국 서로 연결된 채 하나의 순환구조 속에서 작동되는 본연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역동적이며 에너지원 자체인 ‘순환’을 이해함으로써 지금의 것에 구속되거나 구애될 일도 아닌 것이며, 큰 틀에서의 통찰을 작가는 ‘지금’ 확인하고 있다는 암시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제목은 상징과 스토리를 담고 있으며, 쉽게 해석될 수 없는 무수한 이야기가 내재된 기억과 암시는 제목을 통해 재해석되거나 유추되면서 새로운 스토리로 가공될 수도 있다. 필자는 이호식 작가의 작품과 작품명에서 간단치 않은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려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가던 길과 오는 시간』, 『절반』, 『순간』, 『순간과 시작』, 『저 넘어』 등등, 분명 자신에게 밀접하거나 자신을 연관하는 Key word이면서 자신에게 분리될 수 없는 깊은 스토리의 얼개가 섞여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순간』을 그린 연작들은 수채화 작품이므로 시각적 표현의 tone과 분위기가 밝고 청아(淸雅)하지만 그 안에 그려진 사물들의 위태하고 불안한 구조는 이 작품들이 상징하거나 제시하는 메시지를 짐작하게 한다. 누구에게라도 “순간”은 운명을 가르거나 상황을 뒤 바꾸어 놓을 수 있다. 그것은 행. 불행(幸. 不幸)을 넘어 큰 반전이나 역전으로서, 지나칠 정도로 짧은 물리적 시간과 조건으로 해서 기가 막힌 충격을 주는 자극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순간’들을 만나며 살아간다. 다행과 그렇지 않음의 기준과 판단의 근거는 있을 테지만, 아무튼 ‘순간’의 힘은 강력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렇게 천연덕스럽고 솔직 담백하게 자연 그대로의 삽화(揷畵)처럼 그렸다.
그리고 이어 그린 것인지 시간의 순서는 알 수 없지만, 『순간과 시작』은 어느 “순간”의 다음에 그가 선택하고 결심한 변화를 그려낸 상징적 표상의 작품이다. 어느 정도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동백꽃을 그린 그림의 화지(畵紙)를 과감히 찢어내니 드러나는 속살과도 같은 내면이 드러난다. 순간 이전과 이후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듯하다. 그 속에 드러낸 색채는 다소 무겁기도, 또는 밝고 희망적이기도 한 느낌이지만, 이면(裏面)에서 보여 지는 짙은 남색과 진보라색의 상징성과 시각적 차이가 있는 밝은 청색과 황금색의 바탕은 그에게 “다시”라는 시작인지, “무(無)”에서 새로 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인지를 추측하게 하지만, 지금까지의 고혹적이며 아름다운 현실은 크게 파괴되고 상처를 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 『저 넘어』라는 작품을 보며, 필자는 『비노바 바베』의 주인공 「비노바 바베」의 말이 떠올랐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악(惡)과 선(善)을 공유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선은 창문이며 악은 벽이다.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도 그의 집에는 우리가 들어 갈 수 있는 문이 있다. 선한 것은 문이다. 그 문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비노바 바베』에서 인용)
「비노바 바베」는 영국 식민지 시절 비폭력으로 사회활동을 두루 펼친, 인도의 “브라만”계급의 귀족으로서, 폭력이 아닌 사랑과 감동으로 지주들의 토지를 빈민들과 나누는 토지헌납운동을 실시하였고. 직접 행동을 통해 좋고 나쁨을 판단한 후 그것을 사회활동의 실천 방안에 적용하려 하였던 “맨발의 평화 운동가”였다.
필자는 우연히 『비노바 바베』에서 이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이호식의 작품 『저 넘어』를 보면서 이 글의 내용과 접목해 보았다. ‘선(善)’은 창(窓)이라 했고, ‘악(惡)’은 벽(壁)이라 했는데, 그의 작품 속에서 온갖 돌들을 촘촘히 쌓아 만든 벽은 나름으로는 아름답고 균형적이고 조화로웠으나, ‘악’의 이미지가 연상되었는데, 비록 창살 있는 창이지만, 창(窓)으로는 파란 하늘이 보이고 있고 나아가 벽에는 황금색의 문이 있으니, 어쩌면 작가는 이 문을 통해 벽의 “저 너머”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적 기대를 했을 것이다. 물론 손잡이는 없으니 쉽게 열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견고한 벽에 “문”이라도 있으니 암담하지 않다. 그의 의지와 지혜의 덕으로 얼마든지 벽의 다른 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있는 것이다.
이호식 작가의 수채화로 그린 풍경화 작품들은 착하고 아름답다. 그가 설정한 구도는 바르고 반듯하다. 또한 수수하고 담담하며 겸허하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깨끗한 것을 깨끗하게 구김이 없이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예술가의 감성을 담으려 한다는 것이 어쩌면 ‘자연’그대로를 재현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그는 자연을 대하며 경건하게 응시하고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모범적인 인간의 자세이며 순수하게 자신을 인정하고 대상에 대해서는 경외감을 가지려 한다. 따라서 계곡의 어느 언저리에 가서도(여름날의 ‘용추계곡’, 가을의 ‘선운사 계곡’), 한탄강의 여러 경치를 바라보면서도 그는 대상과의 시간을, 자신과의 관계에서 잠시 멈추어 둔 채 서로의 마음을 교환한 뒤, 그리고 그 대상과 서로 교감하듯 그림을 그린다. 그러하니 미세하게 보이는 절벽의 결과 틈조차, 숲의 어렴풋한 시각적 거리감조차, 또한 물결에 비추는 사물과 흘러가는 물결에 섞이는 빛의 이미지까지 그는 놓치지 않고 담담히 그려내며 대상 속에 빠져든다(고석정, 직탕, 한탄강).
때론 격렬한 자연의 움직임과 묵중한 버팀과의 조화를 동시에 바라보기도 하는데, 제주의 기행에서 얻은 경치를 담은 작품들인 『성산』과 『산방산』은 단순하지만 신비로운 무게감으로 버티고 있고, 들이치는 파도의 요동에 애써 다스리는 마음의 흥분을 적절히 담아내며 자신의 평정심을 지켜내고 있다.
이 작가가 그리는 계절감은 솔직하고 숨김이 없다. 아름다운 감정, 신이 나는 자연의 변화를 화폭에 담고 있는데, 자신이 느끼는 계절의 호사를 피하지 않고 표현하고 있다. 나아가 『좋은 계절』이라 하니, 올 곧고 잘 생긴 자작나무가 이렇게 화려하고 세련되어도 되는 것인가? 싶게, 자신의 마음 속 미학을 맘껏 토로하는 듯하다.
이호식 작가는 《세계구족화가협회》 소속의 구필(口筆)화가이다. 혹시라도 자연을 스케치하기 위해 어느 곳이든 접근하는 것이 수월하지 않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절을 막론하고 어느 곳 어느 대상이라도 넉넉히 여유롭게 깊은 관조를 담아 그려내었다. 대상을 선택함에 있어 소홀함이 없고 과장도 없으며 그것의 미학적 핵심을 정직하고 정교하게 담아내니 작가의 반듯하고 무욕(無慾)한 감성이 잘 정제되어 살려진다.
『동네시골』, 『겨울들판』, 『세상 일』 등의 작품에서는 작가의 진지하고 선한 감성이 충일(充溢)하게 살아, 보는 이들의 시선을 잡아 끈다. 한 편, 작품 『둘이 서서』에서는 다른 작품에서와 달리 조금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와 강한 열망을 담아내고 있는 듯하였다. 깎아지른 계곡의 양쪽 바위 틈새에서 살아 성장하기 위해 오랜 세월 애쓰며, 결국 살아남은 두 소나무가 서로 마주하며 시선을 장악하고 있다. 육중한 바위조차 압도하여 바탕으로 삼고 당당히 일어나 자신의 장엄한 존재를 멋스럽게 과시하는 두 소나무는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표상으로 삼고자 한 작가의 마음 속 심상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였다.
잠깐 동안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 작가의 온화하고 선한 눈매와 말투에서 그는 이미 자신의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지를 잘 알고 있는 구도자와 같은 역할을 스스로 자임하고 있음을 필자는 일방적일망정 느낄 수 있었다. (강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