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임의 8회 개인전, “왕송호수 수련연못에서” 경인미술관 아틀리에
-“수련연못”에서의 정담(情談)
윤종임 화가의 여덟 번째 개인전이 경인미술관 아틀리에 관에서 10월30일(수)부터 11월4일(월)까지 열렸다. “어반 스케치(Urban sketch)”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수련(水蓮)” 연작을 중심으로 한 윤종임의 이번 전시는 지난 번 개인전의 연장인 듯하였다.
그는 언젠가부터 “수련”에 빠져 들었다. 필자는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만난 윤 작가가 수련을 그리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스스로 내게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가 말하는 수련을 그리는 이유는 단순했지만, 놀라운 뜻이 담겨 있었다. 연잎은 물방울이든 이슬방울이든 자신의 잎으로 감싸 안고 있다가 적당한 양이 모이면 그것을 스스로 비운다는 것이다.
물이란 인간뿐 아니라 자연에게도 생명수와 같은 것이다. 연은 스스로 간직하다가 적당히 차게 되면 그것을 기울여 내어 놓는다. 모든 것은 “차면 기울게 되어있는(월만즉휴,月滿則虧)” 이치를 연은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다. 혹 인간도 그러한가? 넘쳐도 내어 놓는 것을 주저하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다. 넘치기 전에 미리 비우는 것이 필요한 덕목임을 알고는 있으나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연은 이렇게 스스로 말없이(?) 실행하면서 “과도하게 취하지 않고 겸허하게 대처하는” 지혜를 인간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알게 된 까닭일까? 작가가 꾸준히 호숫가에 화구를 펼치고 연을 그리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련과의 대화를 시도하며 몰입에 이르러 겪는 감흥을 화폭에 담아내는 것이다.
윤종임 작가의 수련 연작을 보면서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그가 그린 수많은 수련 연작들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찬사와 기쁨을 주고 있는데, 모네가 눈이 흐릿해지고 제대로 볼 수 없는 순간까지도 “수련”에 매달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윤작가가 선택한 주제의식처럼 그도 그런 까닭이 있을 터였다.
윤 작가는 프랑스를 가게 되었을 때, 모네의 ‘지베르니(Giverny) 정원’을 방문하고 모네의 수련을 그렸다. 물론 윤종임은 ‘모네의 수련’을 자신의 인상으로 전혀 다른 자신만의 “수련”을 완성하였는데, 윤 작가는 모네가 잃어가는 시력으로 수련과 연못을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색과 빛으로 해석하며 고군분투(?) 하여 그려낸 ‘수련’을 떠올리면서도, 자신만의 화풍을 지키며 맑고 깨끗한 마음을 정직하게 화폭에 담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윤종임 작가는 자신의 집 근처 ‘왕송 호수’의 수련을 보면서, 모네가 치열하게 자신의 뜻과 정신을 빛과 색으로 표현하고자 한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자신만의 담론으로 수련을 해석하며 그림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는 것을 필자는 느껴본다.
윤종임은 이번 전시에서 도시 모습을 스케치한 작품들을 통하여 자신의 예술적 열정과 노력을 보여주면서도, 대부분 연을 그린 작품들을 내걸었다. 수시로 수련 연못에 나아가 연이 보여주는 다양한 인상을 찾고자 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의 대상을 “연작”으로 그리는 이유는 그 대상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자하는 것이다. 실제로 계절이나 시간의 변화에 따라,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대상의 모습은 수도 없이 다르게 지각된다. 다양하게 드러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작가는 그 대상의 실체나 내면을 파악하거나 이해하는 과정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터이다.
윤종임은 지금까지 8번째 개인전을 여는 동안 꽤 오래 그림을 그렸을 것이며, 생애에서 그림이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껏 작품을 창작해 내기는 수월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작품을 그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거나 대상과의 관계, 또는 원만한 소통을 위한 조율도 필요했을 것이고,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인간의 감정들을 수습하고 내려놓으며 대상에 몰두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는 그저 화구를 펼쳐 놓고 그리기 시작하는 일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속에 작은 차이를 두고 드러나는 다양한 연의 자태와 이미지는 그가 모네처럼 강렬한 색과 빛을 강조하면서 그려내지는 않았어도, 은근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그가 오래 관찰해서 그려낸 수련의 다양한 모습들은 단정하고 단아하며, 또 청초하고 새침하며. 그리고 도도하고 정숙하며 쉽게 허락하지 않는 까다로움도 느껴진다.
나아가 차분하고 여유가 있으면서도 넉넉히 기다리는 인내의 모습까지도 보여주는 누이 같은 모습이기도 하며, 또한 주위와 어울리며 모나지 않고 티도 내지 않으며 스스로에 침잠하면서 자신의 깊이를 다져가고자 하는 모습, 그래서 은연(隱然)중에 고혹(蠱惑)하기도 하니 보는 이들을 깊이 자극하기도 한다. 이렇게 윤종임은 특정하지 않는 “연”을 바라보며, 관찰하고 탐닉하면서 스스로 연에 몰입한 후 연의 초상(肖像)들을 화폭에 담아 재현해 내고 있다.
윤종임은 이미 4계절을 연과 함께 순환하고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봄과 여름의 연은 생기 넘치고 싱싱하며, 이어 절정에 이른 후 가을 거쳐 쇠락의 과정에서 볼품없고 측은한 모습으로 변하는 때에도 여전히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본다. 연의 생사고락을 바라보는 작가는 그것을 그려내는 과정 내내 자신의 심정을 애써 변치 않으며 동화하고자 한다. 이런 일편단심을 작가는 어떤 이유를 들어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유지하고자 하였을까?
윤종임이 추구하는 바는 모네가 지향했던 것과는 분명 다를 테지만 동일한 대상에 대한 관심은 어떤 면에서 같은 결을 가진 동질의 관심일 터이다. 다만 시대와 장소가 다른, 그리고 각자의 개성과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이들이 바라보는 동일 대상에 대한 차이 있는 반응은, 같을 수 없는 다양한 표현으로 해서 그 감흥은 새로울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바라보는 ‘왕송호수’의 수련과 프랑스의 ‘지베르니’ 정원의 수련이 같지 않거나 분명 다를 수밖에 없을 지라도 예술가의 질박(質樸)하면서 치열한 정신만은 다르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말년의 모네가 백내장으로 잃어가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려내고자 한 수련과 서서히 나이를 의식하는 노년의 화가가 느끼는 생기에 찬 새로운 정신과 꿈을 향한 의지로 그려낸 수련이 다르나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것에 누구든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윤종임 작가가 그려낸 선명하고 정직한 수련에서 여전히 반듯하고 바른 인간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면, 설령 노년의 모네가 그린 수련이 윤작가가 그린 수련보다 낫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으리.
“쓰라리고 아렸던 고통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세월 속에서 물속에 비치는 나를 보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고 싶은 마음에 붓을 들고 색칠하기 시작하는” 작가는 “풍요로움을 맛보고 명상하면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중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또한 ‘왕송호수’에서의 수련 연작이 계절의 순환 속에서 꾸준히 반복되어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노래를 들려주며 싹을 틔울 수” 있기를, 그래서 “우리의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삶의 고귀함”을 보여주기 위해 독자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깊은 울림이 되어 주길 기대한다. (강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