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품에 대하여
기품 : 인격이나 작품 따위에서 드러나는 고상한 품격
나는 내가 기품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기품이란 몸을 깨끗이 하고, 옷을 단정하게 입고, 고급스럽게 말하며, 많은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자신에게 여유가 있어 남을 도울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어린 시절, 기품 있는 자를 생각하면 '판검사, 의사, 대통령, 영국 여왕, 조선의 양반 같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생각한 적도 많았다. 거기서 한 가지 오류는 쉽게 그리 될 줄 알았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이야기부터 하자면, 나는 어떠했는가? 좋게 말해 모범생, 밉게 말해 범생이로 초등학교를 다녔고, 6학년 때쯤부터 내 안에 약간의 끼가 있다는 것을 느끼며 천둥벌거숭이, 개구쟁이 짓을 했다. 집안에 우환을 겪으면서 조금 우울해지고 갈 곳 몰라했지만, 중학생이 되고는 다시 '공부를 해서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책임감을 불태우며 범생이 모드로 돌입했다. 중학교가 익숙해질 때쯤 나보다 끼가 많은 녀석들과도 친구가 되기 위해 우등생의 가면을 쓴 까불이와 까불이의 탈을 쓴 우등생 중간 어디쯤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고등학생 때도 계속되고, 욕도 하고, 몰래 술도 마시고, 기타도 치고, 여학생도 만나는 그런 사람으로 살았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기품과는 동떨어진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대학을 가면서 초기에 원하는 학교와 학과에 가지 못한 자책으로 방황을 했으나, 자유라는 기체를 흡입하고, 술담배에 절어 문자 그대로 후회 없는 20대를 보낸다. 후회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전문 자격증을 하나 따서 자유를 이어가겠다는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취직을 택하면서 자유를 빼앗기고 만다. 시기적으로 취직도 쉽지는 않았지만 운이 좋았고, 또 성격에 맞는 일과 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일을 맡을 수 있어서, 자유는 없을지언정 그럭저럭 남들 가는 속도로 따라가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런 히스토리 속에서도 기품은 싹틀 수 있지만, 배경도 연줄도 없는 사람이 사회라는 정글에서 기품 있게 살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일단 굽실거리며 살았고, 위에서 은혜가 내려오길 기대하며 살았고, 불의를 참고, 싫어도 그냥 했고, 욕하고 싶을 때 웃고, 울고 싶을 때도 웃으며 살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기에 많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다만 가끔 조금 서럽고 슬펐을 뿐. 그래도, 사랑하는 여자와 가정을 일구고, 자식들 가르치며 가장이라는 구실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기품과 거리가 먼 바보 같은 짓들은 여전히 조금씩 하면서.
이제 오십이 넘어 진짜 나이만으로도 기품 있게 살아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세월이 약이라고, 들끓던 분노는 가라앉고, 타오르던 질투는 잠이 들고, 지금 이 순간에서 행복을 찾는 요령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서, 새로운 기품이 조금씩 싹트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남들은 동의 안 할 수 있지만. 크게 남다르거나 존경받은 일을 한 적은 없어서 누가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겠냐만은, 글이라는 것은 꼭 보고 배울 것이 있어야만 읽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내 마음에 든다. 공감도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 영화를 보았다. 영국이 저지른 수많은 세계사적 죄목들을 용서하는 건 아니지만, 문득 기품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새로이 들었다. 다만, 조금 진정한 기품을 가질 방법은 없는지 고민이 되었다. 존 레넌이 노래에서 그렇게 말했듯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거짓이 너무 많다. 기품에 대한 내 동심은 아주 쉽게 파괴된다. 전부가 그런 건 아니지만 판검사, 의사, 대통령, 영국 여왕, 조선의 양반이라는 말 앞뒤에 붙일 수 있는, 기품과는 거리가 먼 수식어들을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슬퍼도 울면 안 된다. 나는 나만의 기품을 찾아보겠다. 권력도, 돈도, 웅지도 없지만 기품 있는 나 스스로의 귀족이 돼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