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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칼립투스 Nov 26. 2021

다시 시작, 원점으로

완연한 백수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최면을 거는 수밖에

다니던 직장을 나와 새로운 곳을 가기로 결정한 지, 정확히 1년. 당시에도 자신이 없는 결정이었던지, 여러 사람에게 자문을 구했었는데,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답변은 애매했다. 그때 낌새를 챘어야 했는데.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는지라, 1년 후 오늘 난, 새로 옮긴 직장에서 다시 나오고, 옮기기 전 다니던 회사 일을 돕다가 한달만에 팽을 당했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다 생긴 일이다. 이미 지난 일이니,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였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수밖에. 시작할때 삐걱거리는 시그널들을, 결정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팀에서 자연스럽게 빠질 수 있을 때 그냥 나왔어야만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최후통첩을 준 그는, 알고 있었을까. 본인이 한 일을. 9년이 선배인 나에게, 내일 모레 회의에 나타나던지, 아니면 팀에서 나가라고 하면, 나에게 남은 선택지가 어떤 거였을지. 그가 한 오해를 스스로 풀려고 했을 땐, 다른 친구가 가로막아 설 거라는 것을. 


하던 일을 놓고 나 대신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시작을 향해 부지런히 뛰는 동안 홀로 집에서 글을 쓰고 있자니, 살짝 비참한 기분이 든다. 일을 완주했더라면 받았을 돈이 중요한건 분명 아니다. 1년동안 그리워했던 소속감과, 불과 1주일 전 인천공항 출국장에 서 있던 설레임, 먼 타국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일하던 기억이 저만치 멀어진 상실감에 가슴이 쓰린다.  


회사는 내 출장비를 낭비했고, 1주일동안 열심히 미팅하면서 들은 정보는 쓸모가 없어졌다. 평소답지 않게 무책임한 사람이 되었고, 어제 중간에 낀 친구가 제시한 타협안이 마땅치 않았다는 이유로, 소위 '우호적인' 헤어짐을 택할 기회도 걷어차 버렸다. 사적으로 아는 사람들과 공적인 일을 도모하는건 이래서 더 어려운가보다. 


지난 일은 뒤돌아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24시간이 더 지나고 보니, 내 선택은 참으로 어리석었다. 팀은 나 없이 잘 돌아갈 것이고, 내가 하던 일은 쉽게 대체가 가능하고, 나름대로 분투하며 지키고자 했던 존엄은 비록 일시적으로 꾸려진 프로젝트 팀이었지만 홀로 떨어져 나오니 별 쓸모가 없다.   


초년에 소위 잘 나가다가 급전직하하여 하던 일을 그만두고, 시행착오를 겪고, 남들이 모두 가는 길을 벗어나 나만의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인생. 어줍잖은 사주 공부 끝에 알게 된 내 인생의 큰 그림이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그리 나쁘지 않다. 40대에 오래도록 가던 길에서 내려오는 과정이, 10년째 하고 있는 방황이 이렇게 고통스러운것만 빼고는. 그럼에도 십년 전 내가 얼마나 자주, 그리고 깊은 자살충동을 느꼈는지 돌이켜보면, 지금이 무척 양호하다. 


남들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지 상관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감정을 잘 알아채는 능력. 나에겐 영원한 숙제로 남을듯 하다. 다행인건, 어제의 gut feeling이 틀리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다음번에 같은 느낌이 오면, 다르게 행동하리라는 것.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 중 대다수는 절대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 그러니 나와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들과도 잘 지낼 수 있어야 노년이 외롭지 않다는 것. 평소에 남들 선호를 잘 맞추고 사근사근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분노를 이기지 못해 엎어버리는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 앞으로도 누군가와 공적으로 무얼 도모하는건 어렵다는 것. 문제가 있다고 인정을 하는 순간부터 해결이 시작된다는 것. 5년 전부터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내 인생이 끝도 없이 지하로 떨어지는 이유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 있던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 무언가 반성문이 된 듯 하지만, 이렇게 오늘, 한결 가벼워진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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