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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칼립투스 Dec 15. 2021

1년 동안 세 번 사표를 냈습니다

넘을 수 없는 장벽 = 새로운 시작  

브런치에서 친절하게 2021년 한 해를 결산하는 리포트를 내준다는 메시지를 보고는, 최근 그토록 쓰기 어렵던 글 한 편을 일필휘지로 써서 발행했다. 목적을 앞에 둔 인간의 간사함이란. 리포트를 보니, 한 해 동안 내 글들의 키워드는 '퇴사'라고 한다. 풉 하고 웃음이 나왔다. 한 해 동안 사표를 세 번 썼으니, 평소 자기표현에 능하지 않은 내가 브런치에 올린 글들이 모두 '퇴사'에 관련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이상했을 듯싶다. 이렇듯 때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 내 눈에만 안 보인다.




2021년 한 해 동안 세 번이나 퇴사한 사연은 축약하면 이렇다. 첫 번째는 지난해 말, 다니던 회사의 상사가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의지가 워낙 강하여 (난 그 회사에 뿌리도 없고, 나이도 많은 데다 개인 오너를 상대할 자신도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동반 퇴사할 생각으로 사표를 냈다가 상사는 회사에서 잡고 나만 수리된 케이스. 두 번째는 평생 처음 '정통 대기업'에 취직하는 모험을 했는데, 이직 후 두 달 만에 남편의 코로나 확진으로 아들과 격리하며 온갖 모함과 상사의 극 분노를 버티지 못해 퇴사. 세 번째는 두 번째 사표를 던질 무렵, 직전 회사의 상사와 오너 패밀리인 대학원 후배가 재입사는 천천히 생각해도 좋으니, 지금 급한 해외 프로젝트 하나만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여 이를 들어주다, 9년 후배인 오너 느님의 일방적인 '까라면 까'를 못한 죄로 중도 하차한 경우다. 


올해가 되기 전까지 난, 최소한 직업적으로는 끈기나 책임감이 부족한 편은 아니었다. 모두 같은 업종에서 외국계 회사 4년, 다니던 외국계 회사에서 사장님이 독립하여 나온 회사 10년, 1년가량 쉰 끝에 같은 업종의 대학 동기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 3년. 잘하진 못해도 소처럼 열과 성을 다하는 것만은 자신이 있었고, 오랜 업력으로 나름의 통찰력을 갖추기도 했기에, 오랜 커리어의 마지막이 싸가지없는 오너 패밀리의 변덕으로 팀에서 '쫓겨나는' 모양새가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비극의 시작은 모두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고 자리를 뜨기 전에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고 관망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프로젝트는 나에게 더욱 오래도록 아프게 기억될 것 같다. 


이제 와서 낯 뜨겁기 짝이 없지만, 불과 한 달 전에 난, 콧노래를 부르며 일할만큼 신나 있었다. 20년 만에 처음 가본 캐나다의 겨울이 춥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에 말이 잘 통하는, 일하며 서로 똑똑하다고 인정하는 관계들이 너무도 반가웠고, 코로나로 1년 반 만에 남의 돈으로 첫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기회였다. 어려서부터 해외에 나가거나 비행기를 타는 일이라면 마다해 본 적이 없는 나였다. 


Too good to be true라고 했던가. 시차를 극복할 새도 없이 출장 간 일주일 동안 낮밤 가리지 않고 일한 결과물을 미처 공유하기도 전에, 팀에서 나왔다. 자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어서 대외적으로 나서는걸 일정 기간 유예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발단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48시간 후에 본인이 잡은 미팅에 나타날지 말지를 24시간 안에 결정하던지, 아니면 팀에서 나가라는. 아마도 그 친구는 본인의 행동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몰랐을 것 같다. 최후통첩의 끝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무릎을 꿇거나, 관계가 깨지는 것뿐이라는 것도. 자신이 오너이고 난 '을'이니, 나의 평판 따위로 급하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에 두고 본인에게 복종하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제 모두 중요치 않다. 내가 어렵게 피하고자 했던 소문은 사실과 관계없이 이미 퍼졌고, 이미 헤어진 연예인 사이 열애 기사가 난 것처럼, 잠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 금세 잊힐 테니.  




평생 어디에선가 '직장인'으로 사는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나인데, 상처뿐인 세 번의 퇴사가 던져준 화두는 명확하다. 더 이상 '직장인'으로 살 수 없게 되면 무얼 할 것인가. 내가 가는 길을 성공과 실패의 잣대로, 또는 워킹맘과 전업맘의 잣대로 난도질당하기 싫을 때, 나에게 어떤 선택지가 남을까. 유난히 사람들한테 상처 받을 일이 많았던 올 한 해를 자꾸 뒤돌아보며 쓰린 곳을 헤짚는 대신, 앞을 보고 다시금 세상을 향해 나가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한편으로 고통에 둔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이 무서운 나로서는 아마도 지금까지 쌓은 모든 인연과 경력을 끊고 새로운 분야에서 스타트업을 도모하기보다는, 간간히 연락 오는 누군가의 제안을 못 이기는 척 또 받아 들고는 사이드로 사부작사부작 '사업계획'을 써내려 가겠지. 평생의 업으로 생각한 '직장'이 거대한 벽이 되어 도저히 넘을 재간이 없을 때, 먼지보다도 작은 미약한 존재로 새로운 시작이 어디에선가 기다리다 나를 반갑게 맞아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사진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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