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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칼립투스 Jan 06. 2022

새해 첫 부고

마흔 중반이 되니, 매년 두세 번씩은 '본인상' 부고를 접하게 된다. 아직까지는 대부분 잘은 모르는 분들이지만 그럼에도 눈이 '본인상'을 스치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새해 첫 아침 맞은 비슷한 일을 하는 또래 인물의 부고라니. 머리 위로 얼음물 한 바가지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식이 알려짐과 동시에 주변 지인들은 다들 입을 놀리기 바쁘다. 무엇 때문에 그리 된 건지에 대한 추측과 남은 가족들을 걱정하는 시선들, 별 상관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건강이 최고라며 있을 때 잘 지키자는 덕담까지. 묘하게 씁쓸하다. 부고의 주인공이 잘 나가거나 거만하지 않고, 그저 평범하고 겸손한, 소위 '착한' 직장인이었으면 시선이 달랐을까. 나에겐 오래도록 내 손으로 죽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기에, 타인의 죽음과 남겨진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진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똑똑하고 자신감 넘치던 그는, 어린 나이에 여러 번 발탁되어 승승장구하다 최근 몇 년 동안 개인사로 구설이 있었다. 사안의 중대함에 비해서는 별 타격 없이 건재했지만, 조금은 숨어 있는 시간을 보낸 후 한 달 전, 화려하게 전면으로 복귀한 직후 '본인상'을 당하게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부끄럽지만, 딱히 원만하거나 두루 존경받는 성격이 아님에도, 그를 무척이나 아끼는 힘 있는 윗사람과 그에게 충성스러운 유능한 아랫사람이 있음을 난 한 때 부러워했다. 그런 나에게도, 이렇듯 비극은 순수함을 가져다준다. 의미 있는 인생을 찾겠다며 자아도취에 빠질 겨를이 없을 때, 남는 건 하나, 생명이다.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하고, 감사한 일이니까. 


십 년 전쯤, 아직 돌아가신 엄마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토막잠을 자며 네 살이 되도록 말을 못 하는 아들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발을 동동거리며 다니던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절, 이렇게 게 고통스러운데 살아서 뭐할까 싶은 시간이 있었다. 짧은 고통 끝에 죽을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던 시절, 미처 몰랐다. 사는 건, 살아 있는 건,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몇 명만 있어도 충분히 훌륭한 거라고.


올해 유독 혼란스럽기만 하던 새해 결심이 안개가 걷히듯 선명해진다. 오랜 직장생활 끝에 자동반사적으로 과도하게 생각해온 'so what'을 잠시 내려놓고, 사소한 것, 취미나 놀이부터 몰입할 대상을 찾고 하루 중 밀도 있게 보내는 시간을 늘려 나가는 것.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 있을 대상을 찾는 것. 그와 더불어, 나의 약점들을 하나둘씩 찾아 고쳐보는 것. 그것만이 지금껏 나에게 일어난 모든 나쁜 일에는, 나의 행동이나 반응이 기여했음을 인정하고 온전히 책임을 지는 태도일 테니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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