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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각사각 Oct 05. 2020

하늘이 무너졌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말할 수 없었던 나의 속마음. 

스물넷. 아직 세상을 많이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말할 것이다. 2019년 4월 27일. 내 생일 하루 전. 아빠가 돌아가신 그 날. 오스트리아 빈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던 나는 생일을 하루 앞두고 빈에서 급히 말레이시아에 왔다 (아빠가 은퇴한 후 부모님은 말레이시아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으로 2019년 초에 이사하였다).. 4월 28일, 오후 3시경. 나는 약 3년 만에 처음으로 생일을 가족과 함께 맞았다. 그러나 아무도 웃고 있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니, 그늘이 드리워진 엄마 얼굴을 보니, 겨우겨우 그쳤던 눈물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울려고 하니 할아버지가 단호한 목소리로 한소리 하셨다. 절대 엄마 앞에서 울지 말라고. 네가 울면 엄마 마음이 어떻겠냐고. 억울했다. 나는 슬퍼하지도 못하는 건가. 그렇지만 엄마 얼굴을 보니 그런 마음이 싹 가셨다. 할아버지 말씀이 맞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슬플 사람은 엄마일 것이라는 걸. 약 32년간 엄마 곁에는 항상 아빠가 있었다. 그날 아침, 가벼운 발걸음으로 운동을 하겠다고 집을 나선 아빠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냉장고에는 아빠가 좋아하던 반찬, 야채 등이 가득했고 집 곳곳에는 아빠의 옷과 물건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아빠의 흔적이 가득했던 그 공간. 그 공간에 혼자 있으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감히 내가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다음으로 슬픈 건 할머니 할아버지 시겠지. 자식이, 그것도 가장 의지하고 항상 곁에 있었던 큰 아들이 세상을 떠난 그 마음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아니, 평생 몰랐으면 좋겠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를 본 나는 울 수가 없었다. 약해질 수 없었다. 여기서 내가 저분들보다 슬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이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내 감정을 죽였다. 묻어 두었다.  


새벽까지 우는 엄마를 위로하다 겨우 눈을 붙이면 또 초조한 할아버지는 이른 아침부터 우리를 깨웠다. 하루에 3시간 자면 많이 잔 거였다. 그렇게 삼 일간 말레이시아에서 최대한 많은 서류 작업을 마치고 시신을 한국으로 이송하려 했다.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기에 나는 통역가로서, 보호자로서, 카운슬러로서 분수에 맞지 않는 무거운 총대를 맬 수밖에 없었다. 내 감정 따위 들여다볼 여유도 없었고 삐져나올라고 하면 열심히 외면하고 밟았다. 그렇게 복잡하디 복잡한 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도착하고 장례식장에 갔더니 동생이 보였다. 동생 얼굴을 보니 내 마음속에 응어리져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동생을 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오열했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까. 한 시간 정도를 끊임없이 울었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울고 나니 어느 정도 풀린 느낌이었다.  


그렇게 정신이 몽롱한 채로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빈으로 돌아왔다. 일주일의 기말고사를 끝내고 빈에게 작별인사도 하고 말레이시아로 돌아와 일주일간 엄마 일처리를 도운 후, 뉴욕으로 가서 바로 인턴십을 시작했다. 셰어하우스 살고 일을 시작하다 보니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매우 바빴다. 슬퍼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다행이었을까. 나는 내 생각보다 빨리 일상에 적응했고 괜찮은 척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는 괜찮은 척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첫째여서 그런 걸까. 항상 괜찮아 보였던 아빠 밑에서 커서 그런 걸까. 주변에서 “괜찮아?”라고 물어볼 때마다 난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응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이제 좀 괜찮아졌다고, 많이 나아졌다고. 내 마음속에는 아직 털어내야 할 슬픔이 많다는 것을 외면한 채.  


가끔 위로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순간에 찾아온다. 그다지 친하지 않던 대학교 선배와 졸업 후 우연히 술 한잔을 하게 되었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던 도중 아빠 이야기를 꺼냈다. 하기 싫었는데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문맥상 말이 되지 않아 슬쩍 이야기를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얘기를 하는 것처럼. 상대방이 걱정하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내가 먼저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힘들었겠다…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계속 말하다 보면 많이 나아질 텐데.” 


내가 그렇게 괜찮다는 말을 하고 다녔을 때, 나는 정말 괜찮았나. 그 말을 들은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난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으니까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회피했던 것이고. 사람에겐 누구나 마음속에 단단한 껍질이 있어,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상처 주지 못하게, 내 속마음을 아무도 닿지 못하는 곳에 숨기려는 본능이 있다. 그걸 끄집어낼 때 진정으로 “괜찮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지금은 정말 많이 나아진 것 같다. 이제는 울지 않고 친구들에게 그때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고 웃으면서 가족과 아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래도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기에.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쓰는 건 온전히 내 욕심이다. 내가 힘들었다고 내 마음이 이랬다고 알아달라는 욕심. 그렇게 꼭꼭 숨겼으면서 사실 누군가는 찾아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 안아 달라는 어린아이 같은 투정. 또 한편으로는 내게 건네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자그마한 위로일지도. 이기적이어도 된다고. 슬퍼하고 힘들어해도 된다고. 숨지 않아도 된다고. 그건 부끄럽거나 약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해지는 거라고. Vulnerability is power. 이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려서 힘들었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의지할 사람이 없으면 이 글에라도 의지해 달라고. 충분히 힘들어하고 슬퍼한 다음, 말뿐인 ‘괜찮아’가 아니라 진심으로 괜찮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그걸 바라는 것 또한 내 작은 욕심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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