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블렌딩

봄이야기2

by 홍유

냉장고에 홍잭살이 남아 있다. 잭살은 작설(雀舌)의 방언이다. 작설은 찻잎을 말하는데, 생긴 모습이 <참새의 혀>와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홍잭살은 붉은색 잭살, 하동지방에서 생산하는 발효 홍차를 말한다. 2019년 5월, 제다학(製茶學)을 배울 때 제다 실습을 하기 위해 하동에 다녀오면서 구입했다.


사실, 평소에는 잭살보다 얼그레이를 더 즐겨 마셨다. 여름에는 얼그레이 시럽을 만들어서 아이스티로 마시거나, 우유에 타서 밀크티로 마셨다. 겨울에 들어서는 아침에 하루 한 잔, 따뜻하게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요즘은 건강상의 이유로 차도 커피도 끊었지만, 매일 차를 마시던 날도 있었다.

하동 홍잭살은 얼그레이만큼 판매처가 많지 않다. 인지도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격 면에서도 그렇게 착하지는 않다. 대중화되기 쉽지 않은 조건이다. 그래서 홍잭살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홍잭살이 냉장고에 남아 있다.


오랜만에 꺼내 본 홍잭살은 잎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 시간이 지나서 그렇겠지만 잎 자체가 너무 말라서 생기가 없다. 차를 냉장고에 보관하면 안 되는데, 마땅한 곳이 없다보니 넣어두고 잊어서 그런가보다. 밀봉을 했어도 건조한 냉장고 안에서 말라버렸다. 차축제에서 처음 마셔보았을 때는, 차향이 강하지 않으면서도 신선하고 포근했다. 뒷맛도 얼그레이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이 덜해서 매우 좋았다.


블렌딩을 하기 전에 찻잎의 상태를 보려고 일단 끓였다. 다행히 잡내는 없지만, 뜨거운 상태에서 아무 향도 나지 않았다. 식을수록 차향은 나지만, 아이스티로 마실 것이 아니라면 뭔가 향이 강한 재료를 섞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향을 더하고자 라벤더를 골랐다.


첫맛은 떫은 맛이 매우 강하게 느껴졌다. 마시고 기다리면 잠시 후 뒷맛은 상쾌해진다. 떫은 맛을 눌러줄만한 재료가 필요하다. 아니면 스테비아를 넣어 단맛을 가해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너무 강한 맛보다는 적당한 단맛이 필요해서 루이보스를 골랐다.


홍잭살, 루이보스, 라벤더를 적절히 섞었다. 며칠 밀봉해서 보관한 후에 열어보니, 라벤더와 루이보스의 향이 잘 어우러져서 상쾌한 느낌을 전한다. 블렌딩한 차를 우려내보니, 상쾌한 차향이 올라온다. 홍잭살만을 마실 때는 매우 떫었는데, 블렌딩한 후에는 루이보스의 단맛이 먼저 느껴진다. 마시고 난 후, 라벤더의 향이 오래 남아 포근하기까지 하다.

내게 있어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홍잭살은 무엇일까? 미니멀 라이프를 실행해보려고 버릴 것을 찾아보니, 아쉽게 기한을 놓친 홍잭살들이 곳곳에 있다. 꼭 읽으려고 샀지만 반도 못 보고 꽂아 놓은 책, 예뻐 보여 샀지만 잘 안 입는 원피스. 필요해서 사 놓고 제자리에 두지 않아 잊고 있다가 발견한 볼펜. 한 곳에 쌓아두고 고민했다. 버릴까. 중고로 팔까. 다시 쓸까.


우선, 사놓고 안 읽은 책은 목록을 만들었다. 남은 한 해동안 열심히 읽어보려고 마음먹었다. 다 못 읽으면 다음해로 이월해도 좋다. 책은 유통 기한이 긴 편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예쁜 볼펜으로는 필사를 해야겠다. 책 쓰는 작은 근육은 필사를 통해 단단해진다니, 볼펜을 근육으로 바꿔보려 한다. 원피스를 어떻게 할지는 아직 고민 중이다. 요즘 식이요법을 하느라 살이 제법 빠졌으니, 집필 시간에 오피스룩으로 입어보는 것도 좋겠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디에선가 라벤더나 루이보스가 나타나서 맛과 향을 입혀 주지 않을까?

결국,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다. 차곡차곡 다시 정리해놓으면서 살짝 웃었다.

나는, 아무래도,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는데는 소질이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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