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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리릭 Sep 18. 2023

33화 - 5월 14일이 됐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그렇게 한걸음을 내디뎠을 때 내 어깨를 툭 치고 앞서가는 놈이 있었다.      


 분명 정혁이가 내 뒤를 커버해 주고 있었을 텐데 대체 누가...? 정혁의 두터운 벽을 무너뜨린 그놈은 백 미터 달리기마냥 전력 질주 끝에 첫 번째 책상에 도착했다. 누군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 그놈의 뒤통수는 너무 익숙했으니까. 우리 반에서 유일한 스포츠머리. 누가 모범생 아니랄까 봐 머리 한 번 길러본 적 없었을 것 같은 저 머리. 우리 반에서 정혁이를 무시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      


 정효석이 미래 옆자리를 차지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두 개의 보기 중에서 한 개가 사라졌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마음은 편해졌다. 이제 고민할 필요 없이 남은 하나를 고르면 된다.          

         

 그때 또다시 내 어깨를 치고 나를 앞질러 가는 놈이 있었다. 응? 영만이다. 영만이도 뚫을 수 있는 벽을 정혁이가 세웠다니...라는 생각과 함께 본능적으로 나도 달렸다. 내가 이래 봬도 축구 좀 하는 남자니까. 운동 소질이 전혀 없는 영만이 정도는 아무리 짧은 거리라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 영만이가 누구에게 가는지 모르겠지만 두 번째 줄에 앉은 미란이 아니면 세 번째 줄에 앉은 라영이다.    

  

 어찌 되었건 일단 영만이보다 먼저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영만이 뒷목을 잡아 뒤로 내팽개쳤다. 그리고 사뿐하게 자리에 앉았다. 내가 5분 전에 앉아있었던 그 자리. 지금도 설레는 그 자리.      


 앞에서부터 세 번째 책상. 라영이 옆자리다.  

        

 “야이 씨! 왜 뒷목을 잡고 난리야?”

 내 앞자리에 앉은 영만이는 볼멘소리로 날 쳐다봤다.     

 

 “네가 내 자리 앉으려고 하는 것 같길래. 아팠냐?”

 “나 원래 여기 앉으려고 했거든? 미란이 옆에 앉으려고 했다고! 치료비로 이따 아이스크림 사라!”          


 영만이의 밑도 끝도 없는 화법은 5년째 적응이 안 된다. 하지만 영만이가 미란이 옆에 앉으려고 했다면 내 행위는 고의적인 파울에 가까우니 그 값으로 아이스크림 하나 정도는 사줄 수 있다.  

             

 “한 달 더 부탁해. 라영아!”

 “응. 나도!”     

 라영이는 특유의 눈웃음과 함께 날 환영해 줬다.        


 ***


 라영이의 폰번호 뒷자리는 44다. 일부 어른들 중에는 여전히 숫자 4가 四(넉 사)가 아니라 死(죽을 사)라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폰 번호로 44라는 숫자는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숫자 4가 좋다. 한국인들은 3을 많이 좋아한다고 하는데 나는 3보다는 4가 훨씬 좋다.

         

 3은 언제든지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숫자다. 삼국지가 왜 재밌는지 아는가? 나라가 3개이기 때문이다. 3은 안정적이지 않다. 3명이 동등하게 있다가도 2명이 한 팀을 만드는 순간 나머지 1명은 혼자가 된다. 삼국지에서도 위, 촉, 오가 끊임없이 서로 동맹을 맺고 또 동맹을 파기하며 통일이 될 때까지 긴장 상태를 유지했던 것처럼 3은 늘 위태롭다. 내가 방심하는 순간 나머지 둘이 동맹을 맺으면 난 바로 혼자가 될 수 있다.    

      

 3명은 놀이기구를 타는 데 있어서도 매우 좋지 않은 숫자다. 2명이 짝을 이루면 나머지 1명은 혼자서 타야만 한다.      


 반면 4는 안정적이다. 2명씩 짝을 이룰 수 있다. 놀이동산에서도 갈등의 소지가 없다. 게임을 하기도 좋다. 모든 대결과 협력이 쉽게 가능한 숫자가 바로 4다. 2명이 동맹을 맺으면 나는 나머지 한 명과 동맹을 맺으면 된다. 한 명과 동맹을 맺어서 쉽게 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누구도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만큼 4는 안정적이다.      


 나는 그런 4가 2개나 모여 있는 라영이 폰번호가 좋다. 문제는 눈맞춤에는 좋지 않다는 것이다. 44초라니... 미래의 25초와 비교하면 거의 2배에 가까운 숫자다. 미래도 겨우 눈맞춤에 성공했는데 라영이는 거기서 19초를 더 버텨야 한다. 설령 내가 성공한다 해도 라영이와 그런 눈맞춤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조차 지금으로서는 요원하다.      


 그래도 언젠가는 성공하고 싶다. 라영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벌써 3번째 짝꿍 바꾸기지만 생각보다 별로 바뀌지 않았다. 같은 짝꿍을 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3번 모두 다른 짝꿍이 된 건 아마 영만이가 유일하지 않나 싶다. 영만이가 이번에는 미란이에게 사랑에 빠진 것 같은데... 미란이 표정은 이미 아닌 것 같다. 영만이 인생에는 언제 봄이 오려나...      

    

 ***     


 짝꿍 정하는 건 끝났지만 또 하나의 큰 산이 있었다. 바로 5월 14일. 14일 데이 중에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밖에 남지 않았다.      


 5월 14일은 로즈데이다. 연인들끼리 사랑의 표현으로 장미꽃을 주고받는 날이다.   

  

 난 라영이를 떠올렸다. 나와 라영이는 무슨 관계일까... 우리는 두 번 연속으로 짝꿍을 했고, 나는 본의 아니게 수련회 때 내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 라영이의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가 라영이의 옆에 다시 앉았을 때 라영이의 표정은 밝았다. 날 반겨주고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나는 장미꽃을 사야 하는 걸까 말아야 하는 걸까...    

      

 “장유준! 너 어디 나가려고?”

 “나 잠깐 나갔다 오려고.”

 “그니까 잠깐 어디 가냐고?”

 “그냥 뭐 살 게 있어서.”

 “뭘 사야 하는데?”

 “그런 게 있어. 그런 것까지 궁금해하지 마.”

 “너 아직 정신 못 차린 것 같다. 엄마가 사다 줄 테니까 넌 공부를 하거나 책을 봐라.”

 “뭘 또 사다 줘. 그냥 바람 좀 쐬고 올게.”

 “너 여자친구 생겼니?”

 “왜 또 갑자기 여자친구 이야기가 나와?”

 “네가 여자애랑 같이 있다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어.”    


 내가 하교 후에 여자애랑 있는 거라면 미래밖에 없을 텐데. 대체 누가 어디서 본거야. 그리고 그런 걸 굳이 우리 엄마한테 일러바치는 건지...       

   

 “우리 반 절반이 여자애인데 여자애랑 있을 수도 있지.”

 “아들! 연애는 네가 지금 해야 할 것이 아니야. 지금은 공부에 집중할 때야. 연애는 나중에 대학교 가서 마음껏 해. 서울대만 가면 엄마가 차도 뽑아줄게. 대학 가서 이쁜 여자 많이 사귀면 돼. 알겠지?”     

 또 서울대 타령이다. 대체 난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아 짜증 나. 안 나가. 안 나간다고. 됐지?”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차피 장미꽃을 샀더라도 그걸 내 방에 보관했다가 등교할 때 엄마 눈을 피해 몰래 가지고 나오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빈 손으로 등교했다.          


 텅 빈 내 손과 다르게 학교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우리 반은 먼저 영만이가 사고를 쳤다. 장미꽃을 무려 3송이나 들고 와서 현선이, 미란이, 라영이에게 줬다. 지금까지 영만이와 짝꿍을 했던 모든 여자애들에게 준 것이다. 빼빼로 같은 거라면 그냥 고마워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건 장미꽃이다. 이렇게 부담스러운 걸 무려 3명에게, 그것도 같은 반에 있는 3명에게 나눠 줄 생각을 하는 영만이는 여러모로 참 대단하다.       

   

 ‘응? 근데 한 송이가 아니네?’          


 영만이가 라영이에게 장미꽃을 줬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라영이 책상 옆에 걸어진 가방에 꽂혀 있는 장미꽃은 3송이였다. 영만이 말고 다른 남자애도 라영이에게 장미꽃을 줬나 보다. 그것도 2명이나 더. 1교시 시작 전에 매점 간다고 자리를 비웠는데 그 시간에 줬나 보다.  


 라영이에게 누가 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난 주지도 못할 거면서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2교시 쉬는 시간. 이번에는 내 자리를 지키며 라영이와 이야기를 나눠 보려 했다. 하지만 라영이는 은아와 화장실을 가는 것 같았다. 멍하니 칠판을 바라보고 있는데 민재가 와서 우리 반 교실을 둘러봤다. 민재는 1반인데 1반 놈이 여긴 웬일로..? 엇, 그런데 손에 장미꽃을 들고 있다. 우리 반에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 건가? 민재는 교실을 한참을 둘러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장미꽃을 그대로 들고 사라졌다.   

       

 민재가 사라진 앞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내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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