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유진과 도훈은 전라남도 보성의 한적한 농촌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은 외삼촌 홍선우가 산다는 조용하고 오래된 마을이었다. 봄이 오고 있는 듯 들판은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유진의 마음은 무거운 구름이 드리워진 것처럼 답답했다.
“정말 여기 살고 계실까요?” 유진이 물었다.
“주소는 맞아요. 일단 가 봅시다."
그들은 좁은 길을 따라 걷다 마침내 낡고 작은 집 앞에 도착했다. 대문 앞에는 녹이 슬어가는 자전거와 말라버린 화분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유진과 도훈이 도착한 외삼촌 홍선우의 집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변두리에 있었다. 길목부터 퀴퀴하고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것은 오래된 음식물 쓰레기와 동물의 배설물이 뒤섞인 냄새 같았다. 가까이 갈수록 집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들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저게… 강아지 소리인가?” 도훈이 속삭였다.
“뭐가 좀 이상해. 그냥 강아지 짖는 소리 같진 않아…” 유진은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철로 된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오래된 문이 휘어진 틈새로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마당에는 몇 마리의 강아지들이 있었다. 털은 여기저기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고, 온몸은 흙과 엉켜 오랫동안 관리를 받지 못한것 같았다. 마당 여기저기에는 말라붙은 개똥과 쓰레기들이 흩어져 있었고 날파리들이 그 위를 윙윙거리며 날아다녔다.
유진은 잠시 멈춰 섰다가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안에 누구 계세요? 저, 유진이라고 합니다. 외삼촌을 뵈러 왔어요.”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유진은 문을 한 번 더 두드렸다.
“외삼촌,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요. 제발 한 번만 저희와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그러나 문은 여전히 굳게 닫힌 채였다. 도훈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집에 계신 것 같아.”
몇 분이 지나고, 낡은 나무 문이 삐걱거리며 조금 열렸다. 안에서 나온 사람은 지친 얼굴의 한 남자였다. 짧게 깎은 백발과 거칠어진 손이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홍선우는 초췌한 모습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꺼칠한 수염, 얼룩진 옷자락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돌보지 않은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그가 유진을 바라보는 눈빛은 차갑고 경계심에 가득 차 있었다.
“뭐 하러 왔냐?” 그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날카로웠다.
“외삼촌… 저 유진이에요.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어서 왔어요.”
홍선우는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돌아가라. 네 어머니 얘기는 나도 하고 싶지 않아.”
“외삼촌, 제발요. 아빠도 할머니도 다 돌아가셨어요. 엄마를 꼭 찾고 싶어요.” 유진은 애타게 설득했다.
홍선우는 잠시 생각하다 유진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들으러 온 건 잘못이야. 난 네 어머니와의 인연을 끊었어.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
유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제발 부탁드려요. 저는 어머니의 딸로서 진실을 알아야 해요. 그게 어떤 내용이라도요.”
홍선우는 유진과 눈을 마주쳤지만 이내 시선을 피하며 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 도훈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저희도 여기까지 오기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진 씨는 어머니를 이해하고 싶어 하고, 그게 외삼촌이 가진 정보로부터 시작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내주세요.”
홍선우는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꼭 알고 싶다면 말 해주지.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뒤엔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마라.”
그들은 홍선우의 집 마루에 걸터 앉았다. 문이 열린 방 안은 술병과 먼지투성이의 가구들로 어수선했고, 공기는 무거웠다. 홍선우는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외삼촌… 어머니는 왜 저를 떠났던 걸까요?” 유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홍선우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었어. 자신이 원하는 건 어떤 일이든 했지. 네 아버지를 만난 것도, 결혼한 것도 다 계획이었어.”
“계획이라뇨?” 유진이 놀라며 물었다.
“네 아버지가 가진 건 없었지만, 그걸 이용하기로 했어. 가장 쉬운 방법은 뭐였겠냐? 바로 보험이었지. 너희 아버지에게 거액의 보험을 들게 하고, 사고사로 위장하려 했던 거야. 나도 그 계획에 가담했었다. 하지만…”
홍선우는 작고 오래되어 색이 누렇게 바랜 흰색 냉장고에서 술을 한병 꺼내더니 한찬을 채웠다. 그리고는 이내 잔을 비우고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는 운이 좋았어. 사고를 모두 피했지. 그 일로 네 어머니는 점점 더 급박해졌고, 결국 나한테 직접적으로 부탁했어. ‘준혁을 처리해 달라’고 말이다.”
유진은 그 이야기를 듣고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가슴은 충격과 혼란으로 가득 찼다.
“저희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에 빠진 것도 어머니 때문인가요?”
홍선우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모든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알콜 중독자가 된 것은 네 아버지 의지였겠지. 그 여자를 잊지 못해 술로 버틴게 아니겠냐? 그 여자는 그걸 알고도 네 아버지를 방치했어. 사랑 같은 건 없었으니까. 결국 준혁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난그 여자에게 홀린것 처럼 시키는 일은 다 하며 다녔지만 차마 사람을 헤칠수가 없었어.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가 망설이는 사이 네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살해됐다는 말을 들었어. 너희 집으로 가보니 이미 경찰이 와서 조사중이더구나. 난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서 그곳을 빠져 나왔어. 그 뒤로 난 그 여자와와 만나지 못했어. 그 여자가 너희 아버지 보험금을 챙긴 뒤 행적을 감춰 버렸거든. 내가 알고 있는건 이게 다야."
유진은 손으로 입을 막고 울음을 삼켰다. 도훈은 그런 그녀를 한팔로 감싸 안으며 유진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외람되지만 두분이 어떻게 남매가 된 건지... 여쭈어도 될까요?"
"위장결혼을 할려면 우리가 남매여야만 했어. 그래야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우린 사랑하는 사이였고 그 여자는 사람을 홀리는데 도가 튼 사람이었어. 나 역시도 노예처럼, 무언가에 홀린것 처럼 그 여자가 원하는 일은 험한일도 마다 하지 않고 다 했으니까. 암튼 그 관계를 들키지 않으려고 호적상 남매로 위장했어. 그런 상태로 살다가, 네 아버지… 그러니까 김준혁이라는 남자를 만난거야.
준혁에게 접근해 결혼한 뒤, 큰 금액의 생명보험을 들게 하고 사곡사로 처리할 계획이었어.
처음엔 나도 그녀의 계획에 협조했어. 우리 둘이 그 돈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네 아버지가 그 보험금 때문에 사고를 당했어. 그게 의도된 거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
유진은 충격을 받았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도훈과 눈을 마주쳤다.
"예 알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이대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유진을 더 이상 보고 있을수가 없었던 도훈은 이야기를 중단한 뒤 유진을 데리고 그 집을 빠져 나왔다.
이 상태로 서울까지 가는건 무리였다. "유진씨 진정제 하나만 맞고 조금만 쉬었다 가요." 유진과 도훈은 근처 병원을 찾았다. 수액을 맞으며 잠든 그녀를 보며 도훈은 마음이 너무 아팠다. 사실 이런 아픔을 안겨줄 줄 알았다면 유진과 동행하지 않았을텐데 무모한 자신을 탓하며 한숨을 내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