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레퀴엠 이야기를 하려면 영화 아마데우스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네요. 이 영화 보셨나요? 1984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카데이에서 11개 부문에서 후보로 올라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비롯 8개를 수상할 정도의 대단한 영화입니다. 제목은 '아마데우스'이지만 이 영화의 진주인공은 살리에르였죠. 뛰어난 작품으로 신을 찬미하고 싶은 욕망이 가득하지만, 아마데우스의 천재성은 가지지 못했기에 질투의 감정으로 아마데우스와 자신을 파멸시키는 인물로 나옵니다. 재밌는 건 모차르트를 연기한 톰 헐스와 살리에리를 연기한 F. 머레이 아브라함 둘 다 남우주연상 후보로 오르고, 아브라함이 수상합니다. 지금 봐도 머레이 아브라함의 연기는 정말 대단합니다.
영화 속에서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를 파괴하고 그 영광을 가로채기 위해 비밀리에 곡을 의뢰합니다. 레퀴엠 - 진혼곡 혹은 진혼미사로 번역되는 장례에 쓰이는 음악이죠. 모차르트는 돈을 받았지만, 이 음악이 자신의 죽음에 쓰이리라는 불안감에 머뭇거립니다. 그리고 결국 이 음악은 모차르트의 죽음을 앞당깁니다.
이때부터 레퀴엠이 배경에 계속 사용됩니다. 파국을 예고하는 모습의 Dies Irae(진노의 날), 모차르트, 콘스탄틴, 살리에리의 마지막에 다가서는 모습의 Rex tremendae(두려운 왕), 그리고 장례 장면에 흐르는 Lacrimosa(눈물의 날)는 클래식 음악을 전혀 모르던 제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아마데우스 OST를 구입해서 들었고, 마지막 부분에 쓰인 음악이 모차르트의 레퀴엠임을 알게 되면서 이 음악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 덕질 ^^)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음악이 LP에서 CD로 넘어갈 때였는데, 처음 구입한 CD가 카라얀의 1960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빈필과 연주한 실황공연이었습니다. 이제 막 음반 사업을 시작했던 SKC의 라이센스판이었죠. 그때는 지휘자에 따라 음악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개념이 없었기에 그냥 레퀴엠이면 같은 줄 알았습니다. 카라얀이라는 이름 정도는 들어봤던 것 같습니다.
곁다리지만 SKC는 왜 이 녹음을 선택했을까요. 카라얀은 도이치그라모폰(DG)에서 세 번 레퀴엠 음반을 냈습니다. 1962년, 75년, 그리고 86년입니다. 그런데 잘츠부르크 실황은 DG가 아닌 Archipel이라는 작은 음반회사에서 냈기에 아마도 라이선스 비용이 쌌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어쨌든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녹음으로 레퀴엠을 시작했으니 운이 좋았습니다.
참고로 이 녹음은 어떤 이유엔지 저작권이 풀려서 Internet Archive에서 들을 수도 있고, 다운도 가능합니다. (아카이브 링크) 다만 트랙 순서가 엉망으로 되어 있어, 아래 나오는 내용을 참고해 순서를 조정해야 합니다.
영화에서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하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극적 장치일 뿐 사실과는 다릅니다. 천재를 보고 좌절하는 범인의 시기와 욕망이라는 주제에서 아마데우스는 훌륭한 영화지만, 살리에리는 억울할 겁니다. 모차르트와 사이가 나빴던 것 같지만, 이는 살리에리의 문제가 아니라 모차르트의 문제였죠. 음악 빼고는 멍청했다는 평을 받은 모차르트는 괴팍한 성격 때문에 당시 많은 사람들과 사이가 안 좋았거든요. 반면 당시 최고로 인정받던 살리에리는 많은 후배 음악인을 도와주고 무료로 음악을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가 그의 제자였고, 미완성이었던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완성한 쥐스마이어도 살리에리가 무료로 음악을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레퀴엠을 의뢰했고, 모차르트가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떠난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이 레퀴엠이 자신의 장례에 쓰일 거라고 말했다고 하네요. 여러 설이 있지만, 돈이 많은 백작 프란츠 폰 발제크가 자신의 부인 장례에 쓰려고 곡을 의뢰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발제크는 이렇게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 자신의 글씨로 필사하고 마치 자신이 작곡한 것처럼 발표했다고 합니다. 실제 레퀴엠도 발제크 백작의 작품으로 초연되었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모차르트의 작품임을 알고 있었기에 모차르트의 레퀴엠으로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부인 콘스탄체는 이미 작곡료를 받았기에 여러 명에게 나머지 작업을 의뢰했고, 최종에는 쥐스마이어가 완성했습니다. 쥐스마이어는 흔히 모차르트의 제자로 알려졌지만, 이는 당시 25세의 무명 작곡가인 그를 띄우기 위한 콘스탄체의 과장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반면 모차르트가 살아 있는 동안 레퀴엠의 남은 부분에 대해 상세한 지시를 했다는 설도 있죠. 어쨌든 이 레퀴엠은 모차르트와 쥐스마이어의 공동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쥐스마이어가 추가한 후반부가 앞부분과 분위기가 다르고, 실수도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나서 새로운 판본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는 대부분 쥐스마이어 판본이 연주되고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2011)에 나와 많은 이의 주목을 받는 연주인 쿠렌치스 음반도 쥐스마이어 판을 선택했죠. 영화 아마데우스의 연주를 맡았던 네빌 마리너는 쥐스마이어 판이 200년을 견뎌 살아남았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만큼 쥐스마이어가 작곡한 부분도 그 자체로 충분히 훌륭합니다. 쥐스마이어가 결핵으로 37세에 요절하지 않았다면 그도 훌륭한 작품을 남긴 음악가로 기억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레퀴엠은 미사곡의 한 종류입니다. 그렇기에 형식이 있습니다. 보통 미사곡의 경우 다음의 형식을 따릅니다.
1. 키리에 (Kyrie, eleison…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2. 글로리아 (Gloria in excelsis Deo… 하늘 높은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3. 크레도 (Credo in unum Deum…한 분이신 하느님을...)
4. 상투스 (Sanctus…거룩하시도다...) 및 베네딕투스(Benedictus…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5. 야누스 데이 (Agnus Dei… 하느님의 어린 양)
가사에서 알 수 있듯 각 부분의 명칭은 가서 첫 단어에서 왔습니다. 모차르트의 C단조-미사, 베토벤의 장엄미사를 보면 이 형식을 볼 수 있습니다. 장례에 쓰이는 레퀴엠의 경우는 형식이 다릅니다. 글로리아와 크레도가 빠지고 대신 Sequentia (부속곡으로 해석됩니다)와 Offertorium(봉헌송), Communio(영성체송)이 추가되고 사제들이 입당하는 시간 동안 나오는 Introitus(입당송)이 처음에 더해집니다. Introitus가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주여, 저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로 시작하기에 이 음악이 레퀴엠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Sequentia의 경우 Dies Irae(진노의 날), Tuba Mirum(놀라운 나팔소리), Rex Tremendae(두려운 왕) 등이 포함됩니다. 또한 작곡가에 따라 Libera me(나를 구원하소서)나 In Paradisum(천국으로)가 추가되기도 합니다.
모차르트 레퀴엠은 이 형식에 따라 다음의 순서로 작곡되었습니다. (위에 소개한 카라얀 잘츠브루크 실황 다운로드하신 후 아래 순서로 조정하시면 됩니다.)
1. Introitus(입당송)
2. Kyrie(자비송)
3. Sequentia (부속곡)
3.1 Dies Irae(진노의 날)
3.2 Tuba Mirum(놀라운 나팔소리)
3.3 Rex Tremendae(두려운 왕)
3.4 Recordare(기억하소서)
3.5 Confutatis(저주받은 자의 비명)
3.6 Lacrimosa(눈물의 날)
4. Offertorium(봉헌송)
4.1 Domine Jesu Christe(주 예수 그리스도)
4.2 Hostias(주님께 드립니다)
5. Santus(거룩하시도다 전반부)
6. Benedictus(거룩하시도다 후반부)
7. Agnus Dei(하나님의 어린양)
8. Communio(영성체송)
이렇게 해서 대부분 모차르트 레퀴엠의 레코드는 14개의 트랙으로 구성됩니다. 음반에 따라 Offertorium이나 Introitus-Kyrie를 하나의 트랙으로 묶어 12개나 13개의 트랙으로 구성된 음반도 있습니다.
레퀴엠이 장례에 쓰일 경우 입당송이 울리는 가운데 사제들이 들어오고 기도를 한 후에 Kyrie가 연주되기에 한 번에 전체가 연주되지는 않고, 이 때문에 각 부분 사이의 단절이 명확합니다. 하지만 이후 연주용 레퀴엠이 만들어지면서 이 형식에도 변화가 옵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 많이 쓰여 유명한 베르디의 레퀴엠은 Introitus와 Kyrie 사이가 명확하지 않아 실제 장례에 쓰이기에는 부적절합니다.
원래 음반 추천까지 해서 하나의 포스팅을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졌네요. 좋은 연주가 많기에 앞으로 할 말도 상당합니다. 그래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 하겠지만, 급하게 찾아보실 분이라면 카를 뵘/빈필(1984), 피터 쉬라이어/드레스덴 스테이트 악단(1983), 미셀 코르보/굴벵키안 재단(1975), 아바도/베를린필(1999)를 "일단" 추천합니다. 모두 애플 뮤직에 있는 걸로 봐서 다른 스트리밍 서비스도 제공할 겁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고 많이 듣는 연주는 쉬라이어와 코르보입니다. 참고로 제 애플 뮤직에 있는 모차르트 레퀴엠들입니다. 음... 좀 많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