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불편하고 귀찮은 바이닐로 음악을 들을까
1. 예전에는 '판' 혹은 엘피(LP)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바이닐(Vinyl)로 부르는 분위기입니다. 바이닐레코드에는 LP, SP, EP 모두 포함될 수 있으니 바이닐이 정확한 표현이긴 합니다. 하지만 SP나 EP는 흔하게 사용하는 게 아니니 바이닐 하면 대부분 엘피를 말한다고 봐야죠.
2. 일하면서 책상 오디오로 배경음악처럼 듣는 경우 말고 음악을 제대로 들으려고 할 때는 시디나 스트리밍보다는 엘피를 선택할 때가 잦습니다. 사실 엘피가 보통 귀찮은 게 아닌데 말이죠. 엘피는 새로 구입하더라도 정성스레 닦아야 하고, 플레이할 때마다 먼지 털고, 스타일러스(바늘) 관리도 꾸준히 해야 합니다.
3. 괜찮은 바이닐 시스템을 갖추는데 비용도 꽤 듭니다. 물론 요즘은 오디오기기들이 상향평준화되어 예전에 비해 적은 비용으로 음악의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히 좋은 시스템을 갖출 수 있지만, 시디나 스트리밍과 비교하면 비용이 더 듭니다. 기본적으로 턴테이블, 카트리지, 포노앰프가 필요하거든요. 다 포함된 입문기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만, 카트리지 교체 가능한 제품을 구입하려면 미국의 경우 300불 정도는 지불해야 합니다. 게다가 음반 가격은 시디에 비해 세 배는 됩니다. 스트리밍은 월정액만 내면 추가 비용은 없고요. 바이닐은 돈 많이 드는 취미입니다.
4. 그렇다고 바이닐이 음질이 더 좋은 것도 아닙니다. 디지털과 달리 바이닐은 아날로그라 더 좋다는 분도 있지만, 실제로 음반을 만드는 기술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구현할 수 있는 신호대 잡음비로 정보량을 계산하는 공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엘피에는 400MB 정도를 담을 수 있습니다. 시디는 650MB 이상이죠. 고음질음원으로 따지면 훨씬 더 크지요. 엘피를 만들 때 중역과 고역은 스테레오로, 음반골을 넓게 차지하는 저역은 모노로 만든 음반도 꽤 됩니다.
5. 음반을 선택하고, 재킷에서 조심스레 꺼내 플래터 위에 올려놓고, 브러시로 먼지를 털어내고, 회전을 시작하고, 바늘을 음반 위로 옮기고, 마지막으로 바늘을 내려놓습니다. 이런 과정을 일종의 의식처럼 합니다. 이렇게 수고를 했는데, 20분 조금 넘게 들으면 또 일어나야 합니다. 시디만 해도 한 시간 넘게 들을 수 있고, 리모컨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스트리밍은 의자에서 일어날 필요가 전혀 없고요.
6. 그럼에도 엘피를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머리로는 아닌데 가슴으로는 엘피 음질이 더 좋다고 느껴집니다. 더 풍성하다 혹은 더 부드럽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갬성이지요. 아무래도 음악에 더 집중하게 되어 더 그런 감정을 느끼나 봅니다. 마스터링의 차이를 듣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킹크림슨 앨범은 엘피의 마스터링이 가장 잘 되어 있어 더 자주 찾게 됩니다.
7. 89년인가에 오디오를 처음 가졌으니 시간은 꽤 지났지만, 제대로 알고 듣는 건 얼마 안 됩니다. 전에는 침압이 뭔지도 몰랐고 소리만 나면 바늘이 부러질 때까지 들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예전에 구입한 음반들이 제대로 소리가 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8. 쓰다 보니 길어지네요. 이후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 사진의 턴테이블은 두 번째 사용한 파이오니어 PL-512입니다. 중고로 구입해 한참 잘 썼습니다. 처음 구입한 인켈은 아쉽게도 제품명도 기억이 안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