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 있었음에
Part 3 인연 그리고 人生流泳
1. 내 친구들
지하철 신림역 7번 출구로 올라서니, 주위의 포장마차에서 뿜어내는 매캐한 연기가 눈을 괴롭힌다. 무슨 꼬치를 굽는지 싸구려 양념 냄새와 함께 비릿한 기름내까지 어우러져, 역한 느낌이 울컥 치민다.
이곳을 지날 때면 매번 맡게 되는 이 냄새는 마침 벌려놓은 주위의 공사장 소음과 좁아진 도로로 오가는 사람들의 부대낌까지 합쳐져, 참 짜증스럽다. 그 냄새의 진원지를 급히 벗어나, 사람의 인파를 뚫고 약 삼십 메터쯤 걸어가니 ‘미가 할머니 집’의 간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얼추 약속 시간에 맞게 도착한 것 같아, 느긋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복을 맵시 있게 입은 여자 종업원들이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우리는 이렇게 격월에 한 번씩 만남을 갖는다. 고향을 떠나 이곳 서울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끼리의 모임은 벌써 오십 년이 넘었나 보다. 십 대 중반의 까까머리로 만나 이제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칠십 줄이니. 참 모질고 무정한 세월이 많이도 흘러왔나 싶다.
그동안 유명을 달리한 친구도 있었고, 하향한 친구도 있다 보니, 이제 겨우 대 여섯 명이 조촐하게 이렇게 얼굴이라도 가끔 맞대곤 한다. 참 만만하고, 누가 봐도 있는 말 없는 말 하며 허물없는 막역한 사이일 것 같은 우리들 임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참 그렇지 못함이 면구스럽기조차 하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부류의 갈등이 때로는 하염없이 늙어가는 노인들의 사이조차 비집고 들어와, 가끔 격앙된 순간들이 연출되곤 한다.
진보와 보수, 있는 자와 없는 자, 청년들과 어르신들 간의 갈등은 서로의 불신풍조와 함께 사회의 큰 문제로 대두되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처럼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직면해있다. 각자의 위치와 환경, 여건에 따라 생각과 견해가 다를 수가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존재함은 곧 타인의 실제로 연결됨은 당연한 귀결일진대, 모든 것을 이분법 내지는 흑백의 논리로 자신들의 생각만을 주장하며, 상대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그곳엔 불안과 혼란만이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오늘도 손자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각자의 건강에 관한 얘기며, 남은 여생에 대한 잡다한 이야기까지를 안주 삼아, 재미있게 우리들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정치 또는 언쟁의 소지가 될 것들은 슬며시 비켜가고, 상대방을 자극하는 발언들을 자제하다 보니 때론 분위기가 서먹해지는 순간들도 없잖아 있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마음과,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으로 남아, 젊은이들의 표양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루빨리 이러한 불안요소들이 해소되고 서로를 보듬고 아우르면서, 보다 나은 따뜻한 사회가 되었음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 내 손자 중에 제일 큰 놈이 초등학교 6학년이다. 그놈의 엄마 아빠인 딸과 사위의 말을 빌리자면, 요즈음 전 같지 않게 말도 잘 안 듣고 불만도 많아져, 느닷없이 짜증도 부리며 그때그때의 기분 전환이 들쑥날쑥한단다.
아마 사춘기인 것 같다 한다. 하기야 고분고분하고만 있으면 그게 어디 제대로 된 아이겠냐고, 말은 해주고 있지만 이 시기를 잘 보내야 할 텐데 하면서도,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사춘기의 특징 중 하나가 그동안 가족들 간의 접촉이 가장 긴밀했다면, 이때부터는 친구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한다.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가족과는 다소 소원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역시 그러했지 않았나 싶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학교 때 유명을 달리한 ‘상복’이는 의식적으로 내가 접촉한 최초의 친구였었고, 그의 죽음만큼이나 나의 충격도 컸기에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아있질 않나 생각한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그 영향력을 비교해 볼 때 친구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느끼지 못하는 것까지 포함한다면, 실로 지대하지 않을 수 없다 할 것이다. 친구로 인해 자기의 인생행로가 바뀌어, 뜻하지 않게 평안함을 누리며 여생을 보내는 경우도 없잖아 있겠지만, 잘못 얽힌 인연의 친구들로 인해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없잖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누구를 만나서 어떤 인연으로 얽히느냐는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나는 고백건대 친구의 도움을 엄청나게 받으며 이때껏 살아왔음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친구들이야 그렇게 생각 않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친구들에게 받았던 그 모든 것을, 비록 내가 그것에 대하여 아직까지 제대로 갚지 못했다 손 치더라도 적어도 잊지는 않고 싶다. 이제 인생 말미에 다 갚지 못한 것들을 조금이나마 환원시키고 싶지만 그마저 마음대로 잘 되질 않는다. 그 가난하고 어렵던 학창 시절에 서로 보듬어 주며 같이 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든 많은 나의 친구들이 있어서 진짜 나는 외롭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학교 다닐 처지가 되지 않았던 나는, 학교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사에 적극적 이질 못했고, 경제적인 사정이 여의치 못했던 나는 매번 행동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친구들에 의해 보이지 않는 많은 도움을 받곤 했었는데, 그 빈도가 잦아짐에 따른 뻔뻔함이 쌓여갔고 이 또한 나를 우울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었다.
졸업을 하고, 군대로 사회로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던 친구들은, 제대를 하고 직장을 잡고 또 결혼을 하면서 서로의 면면을 확인하게 되고, 우리들의 장으로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미리 심어놓은 GPS를 통해 서로의 위치 정도는 파악하며 지냈던 아주 가까운 친구 외에도, 졸업 후 처음 보는 친구들도 그 場에서 만나곤 했었는데, ‘박규태’도 그중의 한 친구였다.
사실 ‘규태’와 나는 재학 시에는 그냥 급우로서만 지냈을 뿐 그렇게 가까이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졸업과 직장과 결혼을 거치면서 나름의 각자 정체성을 지닌 성인으로 성장되어 있었기에, 그동안 각자로의 생활로 벌려져 있던 ‘term’에 대한 탐색의 시간이 필요했고, 서로의 공감대를 확인한 우리 둘은 급속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서로의 배우자와의 교감도 큰 작용을 하게 되는데, 그의 배우자 ‘데보라’는 천주교 신자로 ‘소피아’와의 의식구조도 비슷해서 그 둘도 역시 무난한 사이로 발전하게 되어 만남의 빈도도 점점 잦아지게 된다.
우리들에겐 이미 두 아이가 있었지만, 그들에겐 아직도 자식이 없어 그 부분이 좀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만남은 서로에게 기쁨과 만족감을 선사하면서, 차츰 서로의 내밀한 사정까지를 얘기할 수 있는 정도까지의 관계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두 번의 임신이 모두 실패로 끝났고, 이젠 인공수정 외에는 방법이 아예 없다는 판정을 이미 받았다 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언쟁도 있었고, 서로의 헤어짐도 생각해야 할 시점에 이르러, 우리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내가 남들에게 모범적이고 훌륭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진 못했지만, 적어도 우리가 지켜야 할 기본 도리를 설명함은 물론이요, 선택한 배우자를 버림은 또 하나의 죄가 됨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설파하기에 바빴고, 그는 이러한 나의 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후 인공수정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겠다며 그의 결심을 알려왔다.
2번의 실패 끝에 그 부부는 어여쁜 딸을 얻게 되고, 모처럼 얻은 기쁨의 세월을 그들 세 식구는 만끽하게 되며, 앞으로의 무지개 같은 꿈을 아름답게 키우고 있었다. 이후 나와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며, 이민을 앞두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쳐있던 나에게 영혼의 위로와 함께 봄비 같은 촉촉한 정을 항상 베풀어 주곤 했었다.
우리들은 가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픈 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불어 닥치는 불행한 상황에 우리는 Panic상태에 빠지며, ‘신의 질투’ 혹은 ‘신의 섭리’로 치부하며, 때로는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급기야 신을 부정하기도 한다.
약한 인간이기에 그 취약하고도 얄팍한 기복신앙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며, 그 또한 하느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인간 본성을 우리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
1993년 겨울. 우리 가족은, 이곳 Argentina에서 이민 3년 차 교민으로의 뿌리박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국과 이곳은 북반구와 남반구로 나뉘어 져 있었는데, 한국의 여름 어느 날, 친구 ‘태욱’이로부터 걸려온 1통의 국제전화는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규태’의 교통사고 소식이었고, 그것은 우리 친구 모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대구 동산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없는 ‘규태‘는 위중한 상태에서 생사를 가름하는 순간에 직면하고 있다 했다. 머나먼 타국에서의 소식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 소피아’를 급히 한국으로 보내고 난 후, 그의 회생 소식을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얼마 후 ‘소피아’로부터 온 그의 사망 소식은, 생의 허무함과 그 가족들의 깊은 슬픔을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 힘들게 보낸 애통한 날들이었다.
그때 딸을 얻고 기뻐하던 그의 모습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추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몇 년 전 곱게 큰 그의 딸 ‘효민’이는 이제 삼십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해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는데, 그 얼굴에 숨어있는 ‘규태’의 연민 어린 그림자가 반갑기도 한 것은 비단 나만의 느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997년, 이민 생활을 접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의 그 삭막함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임에 틀림이 없었다. 두 아이의 대학공부를 시키며, 생전 처음 해보는 잡된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그 시간은 우리 부부에겐 절박하기가 이를 데 없을 만큼 힘든 때였으나, 말없이 힘과 용기와, 봄날 같은 따스함을 안개처럼 피워주던 친구들이 있어서 우리는 회생할 수 있었다.
가까운 친구들은 이제 모두 70줄의 노인이 되었다. 황혼은 우리들에겐 더 진하고, 더 어둡게 다가선다. 그 연륜만큼이나 많은 인생의 주름살은 마음에, 또 육신에 겹겹이 쌓여 세월의 무심함을 말해주고 있고, 동안에 겪었던 수많은 사연들을 가슴에 그리 그리 묻고 살고들 있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던지 일찌감치 본향을 찾아 떠난 ‘규태’를 포함한 ‘원규’ ‘삼찬’ ‘일환이 엄마’ ‘동엽이 엄마’ 들은 멀지 않은 미래, 그곳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하고는 있지만, 남은 우리 모두는 여전히 그들이 그립 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2019년 가을은 점점 깊어져 가고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나무들은 내년을 기약하며 모든 것을 미련 없이 훌훌 털어내고 있다.
2. 조상과 우리 형제들
외할머니를 생각한다. 밀양 박 씨. ‘데레사’. 부기가 덜 가신 할머니의 얼굴.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 모습의 전부이다. 긍정과 부정이 엇갈리는 우리 외할머니. 다니시던 성당 맞은편의 수십 개의 계단을 올라야, 할머니의 집으로 갈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성당의 종탑이 눈앞에 빤히 보였었다. 삼종 때마다 울려 퍼지던 종소리는 지금도 귀에 쟁쟁히 들릴 정도로 가까웠었다.
나는 둘째였다. 둘째의 설움을 절절히 받으며 나는 성장했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둘째로 태어났고 모든 대우와 순서는 항상 첫째 다음이었다. 이년 터울의 형이 있었고 아래로 동생이 다섯. 그 시대 의례히 그래 왔듯이 첫째는 부모님은 물론이고, 특히 할머니에겐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였었다. 할머니의 그 억척스러운 첫 손자에 대한 사랑은 당신의 신앙만큼이나 중요했던 모양이었다. 가끔 농담처럼 ‘이놈을 잘 키워야 내 딸이 편해’ 하시던 넋두리는 결국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든 내 어머니를 위한 사랑의 행위였지 않나 싶다.
새벽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도 성당을 향해 기도를 드리던 그 모습에서, 끈질긴 신앙의 뿌리는 결국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님을, 내가 이해하기까지는 참 많은 세월이 흐른 뒤였다.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으시던 할머니의 모습에서, 채 부기가 빠지지 않았던 당신의 얼굴에서 그때는 몰랐었지만, 죽음에 임하는 신앙인의 참모습을 언 듯 본 것 같았다.
숱한 시간이 지나간 지금, 나를 당신의 손자 영역에서 밀어내기만 하셨고, 아예 범접조차 허용하지 않으셨던 할머니의 매정함에도, 내가 지금껏 가지고 있는 신앙의 뿌리는 당신으로부터 왔음이 틀림없고 이제는 우리 집안의 근간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옛날 ‘다윗왕’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 죽게 하는 비극 속에서도 ‘솔로몬’을 등장시켜, 하느님의 계보를 이어가듯이, 할머니의 그 신앙의 유산은 나를 거쳐 지금 나의 손자 ‘다미아노’에게로 이어져 오고 있다.
새벽 미사를 위해 새벽 선잠에서 깨어나 성당으로 향하는 ‘아노’의 모습에서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본다. 그 시절 할머니의 모든 퍼즐 조각들을 다시 조합하여 지금의 나를 재조명해본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감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계획은 인간이, 실행은 하느님께서 하심을 잘 알면서도 어리석고 우둔한 우리들은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다.
Sophia! 오늘은 이미 당신이 다 알고 있는 우리 집안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나하고 보낸 당신의 세월이 전부가 꽃길이 아녔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내가, 과거를 헤집으며 이러한 얘기를 하는 것이 꼭 어떤 것이 필요해서도 아니요, 또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당신에게, 당신이 알지 못했던 그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함도 아님을 우선 말하고 싶소. 다만, 지나온 세월을 반추해 봄으로써 우리 집안의 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견디어 온 많은 시간들이 결코 당신에게나, 나에게 헛된 시간만이 아니었고, 나름대로의 보람은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네요. 그것은 ‘성 요셉’ 병원에서 당신을 처음 본 그날부터 오늘 이날까지 하느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복음 전파 사명의 일부분이었는지도 모르겠소.
그만큼 우리 집안엔 척결되어야 할 많은 것들이 산재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소. 축복받아야 할 그날,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던 결혼식의 씁쓸함도, 그 이후 숱하게 겪었던 가족 간 여러 가지 갈등조차 묵묵히 감수했든, 우리가 아니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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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3남 4녀의 대가족이었다. 그중 나는 둘째였고, 내 밑으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넷이었다. 위로는 2살 터울의 형이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형은 나와 같이 치고받고, 싸우며 또 서로 협조하며, 양보하며 우리 집을 지키고, 성인이 되어 형이 군입대로 집을 떠날 때까지 운명을 같이하며 지냈다.
형이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내가 전문대학 졸업반이었을 때이고, 나의 입대로 나는 형과 다시 조우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내가 결혼하기 전날 찾아와 ‘소피아와의 결혼을 하지 말 것’을 종용하던 날 잠시 본 이후에는 볼 일이 별로 없었다. 경찰관을 시작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형은 지방 근무를 주로 하였었고 나는 전방 근무를 하다 보니 더더욱 보기가 쉽지 않았다.
형이 부모님에 대해 ‘순종형’이라면, 나는 ‘반항형’으로 우리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성장과정에서도 그것은 여실히 드러나 나는 유독 아버지로부터 닦달을 많이 받았으며, 매도 형보다 더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모님께서는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던 것은 틀림이 없었다.
심약하고 병약했던 형은 부모님의 보살핌이 나보다 더 많이 필요했다는 것을, 내가 인식했을 때는 머리가 한참이나 굵어진 후의 일이었다. 형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양보하기도 하였으며, 형으로서 할 일을 게을리하지도 않으려고, 나름으로 애쓰고 있었음을 나는 알고 있었고 때로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뭔지를 생각하기도 했으나, 이때까지 해준 것이 별로 없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아버지는 폭력적이었고 젊어 한때는 가정을 팽개치기도 하셨고, 어머니에게는 더 없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한 인물로 할아버지를 유전적으로 너무나 닮아 오직 당신 자신만을 사랑하시는, 헌신과는 거리가 먼 가장이셨다. 형제 중 내가 아버지를 제일 많이 닮아 같은 콘셉트인 나와의 충돌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나쁜 점을 많이 보고자란 나는, 절대 그것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비록 DNA는 있더라도 사용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내 바로 밑의 여동생은 맏딸로서 누리는 것은 별로 없었으면서도 참 많이 베풀고 사는 착한 동생이었다. 나와는 4살 차이가 나는데 큰오빠는 나름 순했는데, 작은 오빠인 나는 만만하질 않아 크면서, 공부 같은 것은 도움이 되었으나 많이 무서웠으리라 생각한다.
그 동생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날만큼 고생을 많이 했으며, 동생이지만 도움이 되지 못한 내가 많이 미웠지 않았나 싶다. 역시 경찰관 생활로 정년을 마치고, 부산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남동생 ‘철’이는 채 피지도 못하고 세상과 결별하고, 현재 동작동에서 잠들어 있다. 불과 24살의 젊은 나이에 무엇이 그리 급한지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고 그렇게 먼저 가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부모님과 상면하여 잘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다른 여동생 셋은 형이나 나와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또 그들이 아주 어렸을 때 이미 우리는 집을 떠나 같이 보낸 시간들이 그리 많질 않았다. 지금은 각각의 짝을 찾아 나름 열심히들 잘 살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형제들은 모두 억새풀처럼, 또 벼랑에 붙어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용하게들 잘 견뎌오지 않았나 싶다. 시대적인 불운이야 누구나 다 겪는 것이겠지만, 환경이 주는 조건은 심히 열악한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환경을 극복한 우리는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받는 자녀로 거듭 태어나, 모두들 열심히들 살아왔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님을 부모님이나, 우리 모두는 살아온 날들의 체험을 통해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부모님들도 떠나가시고, 어느덧 우리와 재회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내려놓고 버리고, 이해하고 또 맘 편안히 만나 후세의 삶은, 보다 나은 우리들의 삶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고단하고 피곤했던 짐들은 다 벗어던지고, 이 가을, 부는 바람과 함께 훌훌 털어버리는 나무처럼 ‘부듬지’와 ‘나무 초리’ 만을 남기고도 설야에 굳건히 서 있을 그들을, 진정 닮고 싶다.
3. 결혼 가정 부모
아직도 어둑어둑한 수원천변 양 편의 우거진 녹음방초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이른 시간임에도 산책하는 사람들이 이따금씩 보이면서, 서서히 미명이 밝아온다. 어제 비가 온 탓인지 흐르는 물이 조금 탁하긴 한데, 그래도 많이 정화된 듯하여 깨끗한 느낌도 든다. 평소 수량이 그렇게 많지 않은 이곳은 딸네 집에 올 때마다 들르는 나의 휴식처이자 유일한 산책로이다. 내가 평소 즐겨 다니는 서울의 홍제천만큼 넓지도 크지도 않지만, 자연을 느끼기엔 그래도 이곳이 좋다.
이곳 수원은 나와의 인연과 추억이 전혀 없는 곳이 아니기에 더욱 그런가 보다. 큰애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옮기든 무렵, 당시 서울에 직장을 가진 나는 부모님이 계시든 이곳에서 출·퇴근을 하며, 다소 피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나지만, 시부모님과 함께 지내면서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기가 나를 더 힘들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부모님께서도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계실 때라, 옆에 있으면서 자식 된 도리를 하고 싶은 마음에 별생각 없이 선뜻 결정을 했었는데, 이것이 아내에게 큰 부담이 될 줄은 미쳐 생각 못 했든 게 사실이었다.
그 인고의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후, 나는 서울로의 이주를 실행함으로써, 아내의 불만은 해소시켜 주었으나, 그 과정에서 빚어진 부모님의 마음을 살펴보지 못했음이, 나를 아프게 하였고, 그 또한 내가 지고 갈 내 십자가였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그때의 그 결정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부모님과 아내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을 찾지 못한, 나의 우둔한 생각이 후회스러울 뿐이었다.
이제는 모두가 지나가버린 먼 엣 날의 추억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때의 그 일은, 심연 깊이 흐르는 내 수맥 밑바닥에서 아려오는 작은 고통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 수원에서 나는 오늘 이렇게 새벽을 마주하고 있다. 부모님의 상흔과 신혼과 또 그때의 ‘소피아’를 회상하면서.......
전역 후 서울에서 옮겨 간 곳은 부모님이 계시든 수원이었다. 우리의 결혼은 예상된 것이 아니었기에 양가 부모님들은 상당히 당혹스러울 것임은 당연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부모님께서는 우리 결혼을 반대하셨다. ‘소피아’와의 첫 대면 때만 하더라도, 엄마가 말한 그녀에 대한 것이 나쁘진 않았었는데, 나하고 사귄다는 소문을 들은 후부터는 그녀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으셨다. 가끔 나를 찾아 부대로 간다는 것을, 동생을 통해 알고부터는 그 정도가 좀 더 심해지더니, 이제는 아예 결혼을 반대하고 나서셨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수원을 수차례 왔다 갔다를 반복하며 설득에 나섰으나, 별 소득 없이 시간만 낭비했었고 결혼 날짜를 정해놓은 우리로서는 당혹스러움에 발을 동동 굴렸으나, 달리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한 것이, 작은아버지와 작은엄마를 동원해 부모님을 설득하는 방법이었는데, 확률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고집은 절대 자식들에게만큼은 지지 않는 엣 날의 그 고고한 습성을 버리지 않으신 분이라, 동생의 충고나, 조언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삼촌은 현직 육군 대령으로 원주에서 모 사단 참모장으로 근무하고 계셨다. 그러나 이마저도 시도도 못 해본 채 포기하고 만다. 삼촌이 이를 거절하셨기 때문이다. 말하기가 싫으셨는지, 얘기해 봐야 형님이 들어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마지막의 희망도 사라지며 나는 중대 결심을 하게 된다.
이미 청첩장은 발송되었고, 우리들의 결혼은 기정사실이 되어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런다. 이러든 차, 결혼식 전날 나를 찾아온 형은, 재차 결혼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부모님의 뜻이라 하며 최후통첩을 하러 왔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으며, 막연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모님의 자세가 내 마음을 헤집고 있었고, 앞으로의 우리 결혼 생활이 험난할 것임을 예고하는 듯했다.
1976년 5월 15일. 식장은 조촐했고 하객도 많지 않은 우리의 결혼식은 볼 폼이 없었으며, 신랑 측 혼주로 우리 작은어머니가 참석하시고, 가족이라곤 남동생인 ‘철’이가 유일했다. 부모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나의 결혼식은 그렇게 설렁한 가운데 치러지고, 성대하고 축복받아야 할 ‘소피아’와 나의 축제는 눈물 나리만큼, 서러운 분위기와 함께 냉랭하고 씁쓸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축복받지 못하고 외면당한 우리들이었지만 위에서 내려 보고 계시던 하느님에게만은 떳떳한 ‘가시버시’로 열심히 살아갈 것을 마음속으로, 우리는 다짐하곤 했었다. 신혼여행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었고, 비록 결혼식에 참석 치는 못 하셨지만 우리는 부모님에게 결혼 추인을 받기 위해, 식이 끝난 직후 바로 수원으로 향했다.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허용치 않았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읍소와 주위의 권유를 할 수없이 수용하긴 했으나, 꼬장꼬장한 그 자세는 누그러짐이 전혀 없었다. 몇 시간 동안이었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부모님에게 용서를 구하며, 결혼의 불가피함을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무릎을 꿇었다. 이미 ‘소피아’의 뱃속에는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고 있음도 함께 말씀드렸다. 어렵게, 진짜 어렵게, 그것도 시원하게는 아니지만, 우리는 부모님의 승낙을 간신이 받아내고 조금은 가벼운 마음이 되어 우리들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해 8월. 우리 사랑의 결실인 아들, ‘걸(안토니오)’이를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고, 우리는 비로소 ‘가정’이라는 boundary 속에 무사히 안착하게 된다. 가족을 위한 나의 노력은 이때부터 거리낌이 없이 표출되기 시작했으며, 전역 후의 밑그림을 열심히 설계하는 가운데, 그해 11월 말쯤 우리는 서울로 입성했다.
금천구 독산동의 1칸짜리 방에 둥지를 틀고, 만 5년 3개월간 군 생활의 마지막 겨울을 그렇게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듬해 1977년 5월 나는 ‘밀리터리 죤’에게 영원한 안녕을 말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수원에 계시던 부모님 곁에 같이 있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지금은 고액 탈세자 명단 상위에 랭크된, 전 ‘대우’ 회장 ‘김우중’씨의 자서전 표지 제목이 말해주듯이, 전역 후 나를 부르고 기다리고 있는 곳은 수없이 많았다. 이미 전역한 선배장교들로부터 ‘예비군 중대장’의 직의 제의를 받기도 했으나, 군이란 ‘ㄱ’ 자만 들어도 신물이 날만큼 싫었던 그곳은 내가 있을 곳은 아니었다.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제출한 끝에 지금도 그 이름이 쟁쟁한 Energy 분야의 ‘대성그룹’ 산하 ㈜ 대성산업에 입사하게 된다.
그룹의 연고지는 대구였다. 첫 발령지는 영등포공장으로 구멍탄 생산이 주 품목이었다. 지금의 ‘신도림’ 역 근처에 위치해 있었고, 그 맞은편엔 ‘한국타이어’ 공장이 있었을 만큼 당시 영등포 일대는 이곳저곳에 산재된 공장의 일변도였다. 비록 관리직으로 채용되긴 했으나, 공장 전체가 저탄장이었고 연탄을 찍어내는 윤전기의 소음과 무연탄의 분진은 하루 종일 이어져, 근무조건은 많이 열악한 편이었다. 그러나 첫 직장이 주는 의무감으로 버티기를 수 계월, ‘소피아’도 시커먼 근무복을 세탁하기 지겨워질 무렵, 나는 본사(종로구 관철동) ‘연구개발부’로 발령을 받는다.
본사의 근무는 그동안 자유로운 환경에서 생활과 근무를 이어오던 나에겐 많은 제약과 불편함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우선 정장에 넥타이를 착용하는 것도 그랬고,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전화와 paper work으로 이루어지는 업무 자체가 나하고의 궁합은 잘 맞지 않았다. 거기다 본사 근무자들은 공장이나 지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하대하기도 하면서, 자신들이 그들보다 우월함을 나타내기도 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공장 근무에서 막 전입한 내가 그곳 근무에 익숙해지기란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당시 상사는 ‘김영대’ 상무님 이였다. 창업주 ‘김수근’ 회장의 장남으로, 우리들에겐 꽤 인기가 높은 상사로서, Royal Family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멋진 신사로 기억한다. 지금은 그룹의 총수(회장)로 선친의 가업을 잘 이끌어 나가고 있으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여튼 본사의 근무에 그럭저럭 잘 적응해 가고 있던 중, 때마침 불어 닥친 중동 건설 붐의 바람이 내 주위에까지 슬슬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는 부모님 곁을 떠나 서울 문래동에서, 부엌이 딸린 방 1칸에서 3 식구가 생활하고 있었는데 ‘소피아’의 뱃속에는 우리들의 딸네미가 엄마 아빠 보기를 학수고대하며, 세상으로 나갈 날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얼마 후인 4월 27일 둘째 ‘민지(세실리아)’가 태어나고, 우리는 명실공히 1남 1녀의 부모가 되었다. 그 회사에서 근무한 지 거의 1년이 되어가던 1978년 5월, 집도 절도 없이 이 상태로 서울생활이 힘들겠다는 판단 아래, 나는 해외 근무로의 탈출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 당시 건설회사는 중동의 ‘Oil dollar’에 힘입어 상당한 호황을 누리고 있었으며, 각 건설회사는 수주에 따른 인력 부족으로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었고, 인원 수급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던 때였다. 나는 몇 군데의 건설회사에 문을 두드린 결과 꽤 여러 곳으로부터 입사 제의를 받게 되고, 그중에 두어 군데를 Check 한 결과 ㈜한양으로의 이직을 결심한다. 사직을 결심하고 ‘대성‘에서의 며칠 남지 않은 근무를 하고 있던 나에게 ‘김상무‘님의 부름으로, 나는 그 분과 독대를 하게 되는데, 나의 사직 소식에 섭섭함을 표하시면서, 공장 사택을 무료로 제공할 것을 제의하며, 회사 잔류를 종용하셨으나, 이미 결정한 나의 의사를 번복하기는 이미 때가 늦었었다.
요즈음 가끔 매스컴이나, tv에 비치는 그분의 모습을 보면 그때의 그 온화하던 모습이 아직 남아있어 훈훈한 마음과 함께, 마지막으로 만류하시던 그 옛날의 기억이 떠오르며 그분께 미안한 마음은,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똑같이 남아있다.
1978년 7월 8일. 날씨는 무더웠고, 바람 한 점 불지 않던 그 날, 사랑하는 가족과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나는 김포공항의 높은 상공을 날아올라 열사의 나라인 ‘Kuwait’를 향하여, 한국을 떠나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안녕을 말하던 ‘안토니오’와 쌕쌕 숨소리와 함께 잠자던 ‘세실리아’, 그리고 말없이 무사함을 빌던 ‘소피아’의 눈물을 뒤로하고, 나는 행복의 오아시스를 찾아 긴 여정의 길을 떠나고 있었다. 하느님의 가호를 빌면서.......
4. 젊음과 일탈
우리는 누구나 젊음을 향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 선물은 주신 분의 뜻대로 잘 쓰였을 땐 그분도 흡족할 것이지만 때론 그 뜻과 부합하지 않았을 경우 실망과 함께, 우리 자신조차도 그 회한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경험을 하게 된다. 숱한 유혹의 뭉치들이 “사랑”이란 미명으로 위장되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으며, 그 유혹들은 때로는 하느님까지도 동원시키며 우리를 헛갈리게 하기도 한다.
나 또한 그 유혹의 늪과 뭉치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체 헤매 이기를 수년. 그 와중에 저질러진 숱한 악의 잔가지들, 그로 인해 상처 받은 많은 영혼들의 울부짖음이 아직까지 가끔 나의 폐부를 짓누르기도 한다. 내 쾌락과 순간의 위로를 위해 상대방을 유혹하고 혼란을 부추기며 깊은 상처를 주었던 모든 이에게,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고 그 대가를 치르고 싶은 것이 요즈음의 내 솔직한 심정이다.
나의 이 자서전이 하느님께로, 또 앞서 밝힌 모든 이들에게도 전해져, 하느님에게는 나의 잘못을 고백하는 계기가 되고, 그분들에게도 나의 잘못을 용서받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남자들은 여자가 자신들의 첫사랑이 기를 바라지만, 여자들은 그 반대이기를 바란다 한다. 사실 나도 ‘소피아’가 첫사랑은 아니었다. 우리 윗집에 살던 ‘봉선’이는 나와 초등학교 동기생이었는데 그녀의 동생과 내 동생이 친구로 우연히 동기임을 알게 되었다. 그 첫 signal은 그녀 쪽에서 먼저 보내왔었고, 뒤늦게 눈치를 챈 내가 re-bound를 보냄으로써, 몇 번의 만남을 가지긴 했으나 그녀의 어머님의 반대에 부딪혀, 우리들은 일찌감치 펼치지도 못한 소꿉장난 같은 展을 거두어야만 했고,
그것이 첫사랑인지 뭔지도 모른 채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군입대 전까지 내 곁을 맴돌았든 여인들은 ‘소피아’를 비롯해 ‘김 헤레나’ ‘박마리 스텔라’ ‘신윤희’ 이름은 잊었지만 경주 ‘근화여고’를 졸업 후 ‘계명대’ 음대 성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기숙사까지 바래다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며 나름대로 꽤 좋은 추억을 쌓아가기도 했었는데, 그냥 스쳐가는 인연으로 끝나버려 아쉽기도 했었다.
이때까지의 맺었던 인연들은 풋풋하고, 순수했고, 어설픈 사랑이었기에 후회는 없었으며, 오히려 아름답고 내 젊음과 함께 같이 할 수 있어서 오히려 즐겁기도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들 모두도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느님의 울타리를 벗어난 군입대 후의 나는,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좌충우돌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장교란 직업은 꽤 인기가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더욱이 도시도 아닌 시골에서의 젊은 장교 위상은 도시의 그것 보담 훨씬 높았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면 소재지에서 웬만큼 알려진 딸 가진 집안에선 은근히 장교들과의 자유연애를 허용(?) 하기도 하면서 그들의 속마음을 내보이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그것과 이것이, 묘하게 얽히면서 성문화의 문란함이 드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소문으로, 때로는 경쟁하듯이 소문이 사실로 밝혀지기도 하며, 우리들을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나 또한 예외 없이 그 혼란의 와중에 휘말리며, 소피아와의 언약도 사랑도 점점 희미해지며,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이 무렵 발생한 동료 ‘서소위’의 사건은 나에게 큰 경고음으로 작용하며, 흐트러진 내 정신에 신선한 충격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는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고, 또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결국 일찌감치 ‘이등병’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불명예 전역으로 짧은 장교생활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그는 한 여인을 온전히 취했다. 그것이 사랑이었던, 하룻밤의 유희에 불과했던지 간에 그니 에게는 그것이 전부였었는지도 모른다. 잊을 수 없었던 그녀는 그와의 재회와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하며 꿈을 간직한 채 약속대로 그의 소식을 기다리며 시간의 흐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뱃속에는 그와의 사랑의 씨앗이 이미 잉태되고 있었으니, 그녀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본 ‘서소위’는 ‘휴머니스트’도 아니고, 그냥 개념 없이 젊음을 낭비하고 향유하는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다. 도덕군자는 아니더라도 하느님에 대한 기본적인 바탕을 깔고 있는 나와의 Concept은 애초에 맞질 않았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어렸고, 유복한 집안의 외동으로 위로 누나가 여러 명 있었으니 대강 짐작이 가는 그런 사람이다 보니, 전부가 부족한 환경조건에서 자라온 나와는, 콘셉트가 아니더라도 애초에 반죽 자체가 되기 어려운 사이인 셈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그녀는 그와의 연락을 시도했으나 일찍 그녀와의 관계를 끊기로 작정한 그와의 연락은 불가능했으며, 세월의 흐름은 그녀의 정신세계를 흩트려 놓기 시작하고 그녀는 점점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괴물이 된 그녀의 행동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산일이 임박한 어느 날 불룩해진 배를 부여잡고, 대구에 있는 그의 본가 대문 앞에서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연기 아닌 실기를 감행하게 된다.
그 이후의 상황은 굳이 설명을 않더라도 짐작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응급 결에 받았던 핏덩이가 자신들의 손녀와 조카라는 사실에 그의 엄마와 누나들은 허둥대기 시작했고, 출산은 마쳤으나, 아직도 푸석푸석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그녀는, 곧바로 ‘서소위’를 찾아 전방으로 향한다. 핏덩이를 그의 집에 팽개친 채. 부대는 괴물의 울부짖음으로 혼란에 빠졌고, 그러나 그녀의 울음소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차츰 잦아들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는 깊은 침묵의 심연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의 누나와 어머니는 오로지 자신의 아들과 동생만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 덕분에, 세상은 아무 일도 없는 듯 해는 뜨고 지고를 계속하고 있었고, 그렇게 시간은 그녀의 울부짖음을 싸안으며 흐름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결국 아이는 먼 태평양을 건너 입양의 절차를 밟게 되고, 그와 그녀는 맺어지지도 못한 채 슬프고도 아름답지 못한 추문으로 매듭지어지면서, 결국은 본인의 뜻과는 무관한 그 아기에게만 그 무거운 인생의 굴레가 들씌워진 셈이 되고 말았다. 그 아이가 지금은 한 마흔몇 살의 장년이 되었겠고 또한 누구의 어머니가 되었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하느님의 섭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우리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단, 이러한 사실이 그와 그녀만의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절제되지 못한 젊음의 낭비가 끼치는 해악과 파생되는 문제와 희생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으리라 미루어 생각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즈음 나도 한 여성과의 우연한 관계가 뜻하지 않게 ‘소피아’와의 관계까지 비화되어,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고백건대 나 또한 이성 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리 투명치 못했음을 시인하는 바이다.
여름휴가를 이용해 나를 찾아왔던 ‘소피아’의 눈치가 심상찮았음을 내가 눈치챘을 때는, 그녀는 이미 그것을 간파하고 난 후였다. 그해 여름은 이런저런 사유로 오기가 힘들다는 ‘소피아‘의 전갈이 있었기에 그르려나 보다 하고 태무 심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친 그녀의 방문에 또 마침 그 여성과의 합석 장면이 노출되면서, 나는 엉거주춤, 진퇴양난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런다. 충분한 오해 거리를 제공한 것은 틀림이 없었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 여성과는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었기에 시종일관 나는 당당함을 유지했으나, ’ 소피아’의 생각은 그렇지 않음은 두말하면 잔소리가 되고 있었다. 그 이후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하고, ‘소피아’는 대구로의 귀향을 포기하면서 내 옆에 머무를 것을 고집하며 막무가내로 버티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으로 웃지 못할 일이란, 그때까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오던 그 여성이 갑자기 적극적으로, 또 노골적으로 나에게 접근을 시도함에 있었다. 이제 나는 나의 우유부단함이 빚어낸 이 사태를 수습하기에도 지쳐있었고, 결국 두 여성의 머리끄덩이 싸움이 벌어지기까지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나는 전역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에 이 문제가 나의 군 생활에는 아무런 영향이 될 수는 없었으나, 단지 나의 무능함과 이성문제에 있어서 명확치 못했던 나 자신이 너무 미울 뿐이었다. 드디어 나는 이 문제도 매듭을 짓고 또 가정을 갖고 싶다는 강력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어, ‘소피아’와의 결혼을 전격적으로 결정하게 된다.
‘소피아’의 동의를 득한 나는 양 집안에 통보를 함과 동시에 결혼 준비에 들어간다.
자기의 역사를 기록함은 어찌 보면 ‘고백성사’에 버금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노출을 두려워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끄러운 치부와, 오욕까지도 Open 되어야 함은 물론이요, 심지어 구역질 나는 추억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공개함에 있어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함은 물론이요,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수반되지 않는 한 그 가치가 떨어짐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과거로의 여행은 오염되고, 더러워진 내 영혼을 그분에게 투명하게 내보여 드림으로서 영혼의 치료는 물론이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보람 있고 유익하게 보내는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막상 그 모든 것을 털어 내놓기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나는 절실히 느끼고 있다. 나도 몰랐던 과거의 흠집들이, 갑자기 드러나는 순간에는 나 자신도 흠칫 놀랄 때 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아내와의 연관성이 있었다면 더욱더 신경이 쓰이며 아내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듯이. 그러나 더 낮추고 더 부서져 내가 먼지임을 인식하고, 또 그것을 인정할 때라야 비로소, 나는 그분 앞에 알몸으로 떳떳이 나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분말 이어로라도, 깔려있는 나의 오만과 편견의 파편들을 이 기회에 싹 빨아내고 아이와 같이 해맑아지고 싶다.
머리끄덩이 여성 ‘정애’는 일단 판정패로 결론 나는 듯했으나, 나에 대한 미련을 오랫동안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심지어 ‘소피아’와의 결혼 후에도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가 된 후까지 참으로 줄기차게 그 인연의 끈을 이어 가려고 하고 있었는데, 1978년 7월 내 가 중동으로 파견근무를 위해 떠나는 날, 날아오르는 비행기와 함께 그 질긴 끈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두가 나의 부질없는 욕망과 젊음의 타락에서 빚어진 결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나로 인해 조금의 상처라도 입은 모든 분 둘께 용서와 사죄를 드리고 싶다. 결혼과 함께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태어나고 있었고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나의 미력이나마 앞으로도 노력할 것임을 다짐해 본다.
5. 중동 하나
부모에게 자식이란 무엇일까? 사랑의 산물 아님 혈통을 잇기 위한 수단일까? 교회에서는 이를 두고 하느님의 창조사업은 인간을 통해 계속되고 있고,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역사를 통하던, 부모님의 생애를 보아왔던지 간에 새끼에 대한 어미의 사랑에는 짐승이든 미물이든,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치 않는 것은, 그것이 하느님이 부여한 특별한 본능이기 때문일 것이다.
해가지면 둥지로 돌아오는 새들처럼, 고향을 떠났던 연어의 귀향과 종족번식에 대한 그들의 과정은 처절의 경지를 넘어 죽음조차도 아름다울 만큼 경이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산란과 수정을 위한 암수의 놀라운 희생과 노력은,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이어져 우리를 숙연하게까지 한다. 이처럼 우리 피조물들은 부여받은 종족번식과 새끼 사랑의 의무를 원초적으로 수행하게끔 만들어졌지 않나 싶다. 하느님은 당신의 창조사업의 협력자로서, 인간에게 여러 가지의 선물을 주셨는데. 사랑의 기쁨과, 이에 따른 쾌락의 기쁨이 그것이요, 또 자식들이 부모에게 주는 기쁨도 그 일환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뉴스를 통해서 들은 ‘dink’족이라 했든가? 자식 없이 맞벌이하면서 부부끼리의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간다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라 한다. 아기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전 같지 않게 어려워지고 있다는 현실에 공감하지 않는 바는 아님에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으나, 연어를 인간과 대조하기는 좀 그렇다 치더라도, 같은 피조물일 진데, 창조주의 특별한 은혜를 받는 인간으로서 좀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기쁨의 선물인 열매는 맛있게 따먹고, 주어진 의무는 저버리는 실로 염치없는 삶을 꼭 그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아들딸 낳고, 아득바득 살아가는 젊은 부부들에게 힘찬 응원을 보내고 싶고, 나 역시 그런 시대를 거치며, 아등바등 살아왔든 인생 선배가 아니었던가?
1978년 7월. 둘째 ‘민지(세실리아)’를 낳은 3개월 후, 나는 ‘쿠웨이트’를 향해 나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 가장으로서의 임무에 매진하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김포’를 이륙한 비행기는 약 3시간의 비행 끝에 ‘홍콩’에 착륙한다. 처음 타본 비행기며, 처음 보는 이색적인 풍광들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하였지만, 40여 명의 인원들을 인솔하고 목적지까지 가야 하는 나는 정신 줄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홍콩’에서 1박 후, ‘방콕’으로 이동을 한 후 ‘쿠웨이트’로의 비행기를 대기하던 중, 예약되어있었든 항공편이 결항되었음을 알게 된다. 실로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나는 허둥거리게 되고, 대사관에 연락을 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우리 일행은 쿠웨이트행 항공기에 탑승할 수 있게 된다. ‘사우디’의 ‘제다’를 경유하고 대기시간 포함, 총 30여 시간의 긴 비행은 우리들을 거의 곤죽 상태로 만들기에 충분했고, 이윽고 기장의 도착 멘트가 나올 때서야 비로소 눈을 비비며, 제정신들을 찾고 있었다.
착륙을 위해 비행기는 저공 선회를 하며 활주로에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때, 눈앞에는 바다 여기저기에 산재되어 있는 여러 유정들이 보였고, 그 유정에서 뿜어내던 불기둥들은 정말 장관이었으며, 사막 특유의 냄새와 함께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속한 부서는 ‘중장비사업부’로 여러 공사장에 파견된 중장비의 관리는 물론이요, 정비와 인원의 통제까지 장비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총괄하는 부서로서, 부장 1명을 중심으로 7-8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정비 분야로 장비는 물론이요, ‘쿠웨이트’ 지사에 속한 차량을 포함한 모든 움직이는 것들을 최상의 ‘가동상태 유지’가 목적이었다.
업무는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섭씨 45-5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는, 각오는 하고 왔었지만 익숙해지기까지의 어려움은, 어차피 거쳐야 할 과정이기에 묵묵히 견디며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서의 최상급자인 ‘이 부장’은 작은 체구와 왜소한 체격의 소유자로 ‘한양대 기계과’ 출신으로 이론에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무 면에서는 ‘민과장’의 도움이 필요한 40대 후반의 안경잡이였다. 반면 ‘민과장’은 나의 직속 상사이기도 했지만, 공군 상사 출신으로 나이는 부장보다 많은 50대 초반의 대머리로, 현장 경험이 많은 실무자 스타일 이었으므로 부장의 기술적인 리스크를 채워주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 밖에 ‘이 과장’은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의 40대 초반으로, 관리 부분을 총괄하고 있는 인물로서 몸이 많이 비대해서 사막의 더운 날씨를 힘들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29세의 내가 그들과의 동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에게 부여된 첫 과제는 독일산 ‘콘크리트 펌프카’를 수리하는 것이었다. 이는 곧, ‘Guarantee Repair’를 말하는 것으로 Maker인 독일회사를 방문해야 했으며, 이것은 기술과 언어 구사력이 요구되는 사항들이었다. 그런데 이 지시는 신입으로 오는 자의 근무 수행능력을 Test 해보기 위한, 부장의 특별지시였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나는 첫 과제에 대한 부담감으로 잠시 곤혹스럽기는 했으나, 일단 부딪쳐 보기로 작정을 한다. 서울에서 가져온 한영사전을 뒷주머니에 넣고, 학교에서 배웠든 영어문장 다섯 가지의 형식을 머리에 간직한 채, 나는 독일회사로의 방문을 시도하게 된다. 더듬거리고, 헤매고 또 찾아보고 하는 등, 노력을 한 결과 무난히 그 임무를 완수하게 되고, 어느 정도의 신뢰를 인정받은 나는, 거침없는 행보로 나의 실력을 발휘하여 업무수행에 나서게 된다.
쿠웨이트의 화폐단위는 ‘디나르’였다. 우리의 ‘원’과는 그 가치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며,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인정해주는 화폐였다. ‘오일달러’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기도 했었다. 아내가 이따금 보내주는 편지와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덥고 건조한 사막의 열풍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위안거리가 되었고, 그 위안 속에 가족들의 미래를 설계하며 우리들은 각자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근무하기를 6개월, 회사에서 제공하는 유럽여행의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또 들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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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로마’를 향해 비행을 시작하고, 창밖을 통해 보이는 사막 밭은 온통 누런빛이었다. 그곳에서 육 개월을 뒹굴며 보낸 우리도 누런빛이었고, 그 누런빛을 벗어난 나는 하늘에서 벗어버린 내 허물 같은 그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름간의 유럽여행은 나를 어떻게 변모시킬지 나도 궁금했으며, 미지의 세계로의 첫걸음이 나의 마음을 무척이나 설레게 하고 있었다.
공중에서 내려다본 ‘로마’ 시는 도시계획이 잘되었던 것 같았고 각지고 반듯반듯한 모습의, 획일적인 모습으로 내게로 다가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은 여느 공항과 다를 바 없었으며, ‘로마’는 이제 막 아침을 맞이하며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곳은 딴 세상이었다. 화려한 색상의 건물과 거리의 쇼윈도는 활력에 넘치고 있었으며, 오가는 사람들은 풍요로웠으며 하늘마저 청명하여, 숨쉬기가 송구할 정도로 행복했다. 모래바람에 앞은 항상 뿌옇고,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더위에 헐떡거리며, 오직 가족을 위한 고생이려니 치부하며 지냈던 그곳을 잠시나마 벗어난 나는 문득, 남편 없이 홀로 아이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는 아내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에, 잠시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었다. 언젠가 그 보답을 할 날이 오려니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주어진 나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를 결심하고, ‘서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곳은 한국 사람이 경영하는 호텔이었고, 우선 언어소통에 문제가 없었으며, ‘이탈리아’를 여행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정보와 안내까지 제공하고 있어서 나에게는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우선 그 유명한 ’vatican city’ 관광을 시작으로 ‘쏘렌토’를 비롯해 세계 3대 미항인 ‘나폴리’, 아직까지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로마제국’ 시대의 유적지 ‘폼페이’등 4박 5일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끝내고, 나는 다음 예정지인 ‘스위스 베른’으로 향하게 되는데, 출발 전날 머물던 ‘서울 호텔’의 늙수그레한 노인 지배인이 자신이 가수 ‘페티김’의 시아버지라고 소개하며, 한국인에 대한 친근감과 함께 며느리 자랑에 신나 하기도 했었던 기억도 난다.
로마에서 ‘유럽 레일’을 이용하여 스위스‘베른’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레만 호수’를 비롯한 시내 관광을 한 후 그곳에서 1박을 하게 되고, 이튿날 ‘몽블랑’에 오른다. 정상까지 연결된 케이블카 덕분에 우리는 여름에서 겨울로, 다시 겨울에서 여름에로의 여행을 마무리 짓고, ‘파리’로의 입성을 위해 다시 ‘유럽 레일’에 탑승했다.
‘파리’의 하늘은 음습했고, 옅은 잿빛이 되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도착한 ‘리옹’ 역은 사람들로 붐볐고, 우리는 이내 역사를 빠져나와 숙소로 향했다. 정신없이 보낸 ‘이탈리아’와 ‘스위스’ 여행에 천금 같은 일주일을 소비하고 ‘프랑스’에 도착한 우리는, 피곤하기도 했으나, 남은 일정을 소화하기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남은 일주일의 여정을 이곳 파리에서 모두 소진하게 된다. 바쁜 일정 중에서도 늘 가족들을 생각했던 나는 당시 인기였든, ‘랑콤’ 콤펙트 set와 ‘삐에르. 까르땡’ 스카프 등 아내의 선물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고 기뻐하는 아내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었다. 여러 관광지를 순회하며 여행 일정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다시 모래밭으로의 귀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과 겨울을 동시에 경험했던 몽블랑 관광처럼 화려했던 유럽에서 다시 뿌연 모래의 나라로 복귀했다. 며칠 동안의 시차 적응과 환경변화에 따른 혼란을 우리는 빠르게 벗어나고, 다시 현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건설하고 있는 이곳의 공사는 ‘Rural housing’ Project와 ‘Car Parking’ Project로 일반 서민 주택과 그 기반시설, 그리고 주차용 빌딩을 짓는 것이었는데, 당시 쿠웨이트는 넓은 사막에 거주하는 유목민들이 많아, 이들을 ‘국민화’시키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일 때였다. 이들을 도시로 이주시켜 집단적인 촌을 형성하고 국가를 ’ 개념화‘ 시켜야 하는데, 조상 때부터 이어오든 이들이, 그 생활방식을 버리고 도시 집결을 요구하는 정부의 방침에 순응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정부는 좋은 조건의 집단촌을 형성해 이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유화책으로 이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이때쯤, 나는 본국으로의 휴가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일 년간의 근무 기간이 끝나고 나는 한 달간의 본국 휴가를 얻어 귀국을 하게 된다. 공항에 마중 나온 가족들을 보는 순간의 그 감격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격으로 다가왔고, ‘안토니오’는 아빠를 부르며 내 품에 안겼으나, ‘세실리아’는 눈만 껌뻑거리며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 이러한 아이들의 반응과는 다르게 ‘소피아’는 반 웃음 반 눈물로 나를 맞아 주었고, 아이들 데리고 혼자 고생한 아내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한편 불쌍하기도 하여 꼭 안아주기도 했다. 그동안 문래동의 구석진 쪽방에서 반지하지만, 화곡동 두 칸짜리 큰방으로 이사한 우리는 오랜만의 해우를 맘껏 즐기며, 한 달간의 꿀맛 같은 휴가를 보내고, 내년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나는 다시 쿠웨이트로 돌아왔다.
막바지 공사와 준공을 눈앞에 둔 어느 날 아침, 그때가 1979년 10월 말쯤이었다. 발주처인 ‘쿠웨이트 주택성’에서 공사감독으로 파견 나와 있든 이집트 국적의 ‘핫셈’이 내민 영자신문 한 장에 내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기사를 담고 있었다. 한국 중앙 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했다는 기사가 2단짜리 기사로 나 있었고, 그 기사와 함께 ‘전두환’의 사진이 개제 되어 있었으며, 그때 그 신문은 그를 ‘Strong Man’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회사는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국내의 이러한 사건이 회사와의 관계 등을 타진하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각자들도 국제전화를 통하여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들 하고 있었는데, 외신을 통해 전 세계로 이미 퍼져나간 이 소식은 국내에서는 까맣게 모르고들 있었다. 언론통제의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한동안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가라앉는 듯했고, 예정된 우리의 공사는 공정표에 따른 스케줄로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국내 소식이 궁금하기는 하였으나 언론이 통제된 그곳의 소식은 깜깜히 그 자체였고, 영자 신문을 통한 소식이 우리에겐 유일했었다. 그로부터 약 일주일 후부터는 조금씩 국내 신문이 반입되면서 국내의 소식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우리들도 차차 안정을 찾아가기에 이른다. 국내의 그 사건과는 무관하게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된다.
소피아는 현재 비록 두 칸짜리 전세를 살고 있지만, 보내준 봉급을 꼬박꼬박 저축하여 우리 집 마련의 꿈을 키우고 있었으며, 나 또한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이미 조금 모여진 자금으로 작은 것부터 마련하자는 마음으로 우리가 살던 화곡동에 있던 ‘시범아파트’ 13평을 전세를 안은 상태에서 구입을 하고, 우리는 계속 전세살이를 계속해 나가기로 한다. 이러한 계획을 전해 들은 나는 멀리서 도와주지는 못하고, 아이들 키워가며 모든 집안일까지 챙기는 아내가, 너무나 안쓰럽고 애처로웠으나 아내는 우리 집 마련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며, 나에게 기쁜 소식만을 연일 전해주고 있었다.
우리의 현장은 거의 공사가 마무리되고 있었고, 또 다른 공사 수주에 따라 현장이 분리됨에 따라서 우리도 현장에 분산 배치되는 등의 인력 재배치를 받게 된다.
나는 그동안의 근무실적에 따라 중기사업소 본부에 머무르게 되어 현장관리를 총괄하는 업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해외근무 의무기한인 2년이 다가옴에 따른, 국내 근무냐 혹은 해외근무 연장을 할 것이냐를 두고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가게 된다. 아내와의 교신을 통한 숙의 끝에 나는 일단 국내 근무를 하기로 하고, 80년 7월 일단 귀국을 서두르게 된다. 그 해 5월엔 광주에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민간인 대량 살육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이른바 ‘광주 민주화 운동’이 그것이었다.
6. 중동 둘
“실손 보험 있으세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상대방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러고 있는 나에게 ‘실장’이라는 그 여자는 “실손 보험 없으세요?” 하고 다시 물었다. 머뭇거리는 나를 대신하여, 옆에 있던 아내가 대답한다. “없는데요? 근데 그건 왜 물으세요?” 하는 물음엔 별 대답도 없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웬 얄궂은 기계 팸플릿을 내밀며, 설명하기 시작한다.
무엇을 설명하는 것인지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내가 왜 이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슬며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어깨 통증이 엊저녁엔 잠을 설칠 정도로 심하여, 일찌감치 병원을 찾아왔다. 미간이 좁고 얼굴에 걸맞지 않은 안경을 쓴 새파랗게 젊은 의사는, 영 믿음이 가지 않는 몇 마디 상투적인 질문과 나의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한 뒤, 소위 ‘실장’이라는 역시 푸릇푸릇한 여자애(?)에게 배구 볼 토스하듯이 나를 넘기고, 느닷없이 나는 의사 아닌 또 하나의 의사에게 죄인 심문당하듯이 엉뚱한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의사에 대한 믿음이 전보다 못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요즈음 노인들이 병원에서 느끼는 불신감은 이보다 더한 게 사실이다. 초 고령 사회를 목전에 둔 우리나라는,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노인 상대의 병원이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 범람하고 있고, 병원 간의 경쟁 또한 만만찮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처럼 자격 내지는 성능 미달의 의사들을 보면 한숨보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환자를 보면, 의료 수가부터 어림하는 의사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오늘 내가 들른 병원처럼 의사와의 만남은 대충 그리고 빨리, 그러나 실장과의 상담은 길게 그리고 자세히, 환자와 의사와의 만남이 가장 중요한 병원에서, 돈과 직결된 실장과의 상담을 더 중시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무리 세상이 배금사상에 젖어 있다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나 혼자만 씨불이는, 의미 없는 넋두리에 지나지 않나 싶기도 하면서, 왠지 씁쓸하다.
1981년 6월 나는 나의 청력 이상으로 한 병원을 찾았는데, 그곳은 먼바다 건너 ‘Saudi Arabia Riyadh’ 병원이었다.
1980년 7월 귀국 이후, 이 년 만에 맛보는 가족들과의 생활은 즐겁다 못해 황홀했다. 모처럼 가장으로서의 자부 감도 가지면서,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음과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음을 과시나 하는 듯이 나는 신이 나 있었다. 본사는 여의도에 있었으며, kbs가 빤히 보이던 ‘전경련 회관’ 6층이었다. 화곡동에서 여의도까지의 거리도 적당했었고, 통근버스가 집 앞으로 왔으므로 출퇴근에도 별 문제없는,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서먹서먹하게 아빠를 대하던 둘째 민지(세실리아) 와도 많이 친해져, 퇴근해 오면 쪼르르 아빠 품으로 뛰어와 안기기도 하며, 가족으로써의 친밀감을 다져 나가며 나는 본사 생활에 차츰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동안 아내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을 하나하나 챙기며 아내와의 거리도 더 다지는 계기가 되었든 시간이기도 했다. 부모님에게도 그동안 자식으로서 부족했던 점들을 채워주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모님과 아내와의 갈등도, 그래그래 잘 넘기고 지나가기도 했다. 이처럼 나에게도 이런 시기가 있었던 가 할 정도로 행복한 시기였지 않나 싶다. 얼마의 세월이 물같이 흘러간 몇 개월 후 때쯤, 해외근무의 압박이 서서히 나를 다시 감싸고 그 조임이 시작된 것은, 본사 근무 약 10개월쯤 되든 1981년 4월 말 경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학 건물을 짓는 큰 공사의 수주 소식이 들려왔다. 회사는 기쁨에 들떠 있었지만 혹시 떠밀려 나갈지 모른다는 소문들이 돌더니, 그 소문은 내 앞에서 멈춰 섰고, 나는 떠밀리듯이 사우디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제2차 해외파견 발령이었고, ‘Riyadh University’ 프로젝트(RUNI)였었다.
다시 선 사우디의 사막 밭은 쿠웨이트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쿠웨이트는 해변을 끼고 있는 작은 나라였고 해변 덕분에 습도도 적당히 있어서 다소 지낼만했었지만, 사우디는 쿠웨이트의 몇 배에 해당하는 넓은 사막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수도 ‘리야드’는 내륙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 건조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습도가 적당히 있어야만 더위도 견디기와 건강에도 좋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러한 조건이 우리에겐 상당한 우려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해 모래폭풍은 유독 심하여 두건을 뒤집어쓰고 모래 방지용 마스크를 쓰고 있음에도 입안으로 모래가 들어오기가 일쑤였고, 밥을 먹으면 밥과 함께 모래도 같이 씹히면서 버석버석 소리가 날 정도였다. 건조한 날씨는 콧속의 모세혈관을 자극시켜, 수시로 코피를 쏟아내게 했으며, 선발대로 파견된 나의 고생은 본진보다 더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현장은 황량한 사막 밭의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었고, 여기저기 버려진 자동차 잔해와 낙타 유해인 털가죽과 뼈다귀가 산재해 있었으며, 뿌옇게 몰아치는 sand storm만이 우리와 같이, 공존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우선 ‘컨테이너’ 한 채를 현장에 설치하고 소형 발전기를 동원해 ‘에어컨’부터 가동하며 아지트를 마련했다. 곧이어 현장측량을 시작으로 본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해야 할 일들을 챙기기 시작하면서, site cleaning 에도 착수하게 된다.
이렇게 어려운 날들을 이어가고 있던 중, 며칠 전부터 귀가 좀 근질근질거리더니, 소리가 멀어지며 이명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말겠지 하고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있든 어느 날 아침, 깨어나니 침묵의 세상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서둘러 병원을 방문하게 되고 안내를 받은 나는, ‘이비인후과’에서 한참 대기하게 된다. 한 젊은 여의사가 흰 가운을 펄럭이며 내 곁으로 다가서고, 순간 뿜어내는 진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그 의사는 무슨 기구인지를 가지고, 내 귀를 한참이나 살펴보고는 대수롭잖다는 투로 간호사에게 뭔가를 말했다. 잠시 후 간호사가 가져다준 ‘스프레이’ 비슷한 것을 내 귀에다 꼽고는, 물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높은 압력으로 내 귀에다 주입하기 시작했다. 순간 약간의 통증이 있기는 했으나. 시원한 느낌과 동시에 액체와 작은 모래 덩어리들이 함께 쏟아져 나오며, 나는 침묵의 세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뻥 뚫린 내 귀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시 받아들이며, 나는 어제의 청력을 되찾았다. 옆에 있든 한국 간호원 아가씨의 설명은, 모래의 미세한 먼지가 귀를 꽉 채우고 있었으니 들릴 리가 만무하며, 평소에 귀 청소를 게을리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집을 떠난 서러움이, 아님 그 한국 간호원의 친절에 불현듯 멀리 있는 아내 생각이 났던지, 불현듯 울컥한 마음이 왜 그때 밀려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약 두 달간의 고군분투는 본진이 합류함으로써, 서로 간의 고통 분담으로 이어지며,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게 된다. 나도 그 간의 선발대로써의 임무에서 제외되면서, 중장비를 관장하는 본 업무로 복귀하게 되고 본 공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의 특수 장비 탐색에 들어가게 된다.
본 공사는 리야드에 들어서는 최초의 대학 건물 건축공사로, 이슬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명운을 걸고 건설하는 만큼 정부 자체의 관심은 물론이요, 뭐든지 최고를 요구하는 발주처의 당당함은, 오일달러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에 발맞춘 우리의 행보도 점점 고부가 공사로 발돋움하고 있었으며, 공사는 미국과 프랑스의 컨소시엄 회사가 사우디 정부로부터 수주받아, 우리 회사에 재 하청 형식으로, 재계약된 공사로, 모든 공사에 대한 감독과 지시는 미. 불 회사의 지분 배분에 따른, 미. 불 회사로부터 받게 되어있었다. 특히 공사 자체는 전부 특수중장비로 시공 설계됨에 따라, 중장비 부서의 감독관이 무려 3명이나 배치되어, 꽤 성가시고, 번거로움이 예상될 수밖에 없었다.
3명 중 2명은 미국인이고, 1명은 프랑스인이었는데, 미국인과 프랑스인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음은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이었는데, 이처럼 반목적이고, 배타적인 줄은 진짜 그때 처음 알았었다. 하여튼 그들의 그러한 관계까지의 악재를 딛고, 또 여러 번의 어려운 고비를 숱하게 넘기며, 그럭저럭 공사는 잘 진행되고 있었다.
이즈음 아내는 우리 집 마련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마침 살고 있던 화곡동 근처에, 법적 분쟁에 휘말린 주택 한 채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는데, 아마 주위의 시세보다 값이 조금 저렴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분쟁에 휘말린 집이라는 사실이 꺼림칙하긴 했으나, 모든 것을 면밀히 검토한 아내는 그것을 구입하기로 마음먹고, 나에게 최종 승인을 요구하게 이른다. 나야 멀리 있으니 아내에게 모든 것을 일임할 수밖에 없으니,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말 외엔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렇게 하여, 우리는 결혼한 지 5년 반, 서울에 입성한 지 4년 반 만에 마이홈 대열에 합류하게 되고, 진정한 서울시민이 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뛸 듯이 기뻤고, 가장으로서의 자부심을 한껏 즐기며, 앞으로의 계획을 더 세밀히 분석하고 실행하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다음 휴가 때는 내 집으로 당당히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내 업무에 더욱 충실히 매진할 수 있었고 매일매일이 즐겁고, 짙은 분홍빛이었다
‘Grafton’ 은 우리 주 감독관 중에 팀장이었다. 그는 ‘텍사스’ 출신의 미국 개량종으로, 덩치가 엄청 컸고, 청바지에 반 가죽 장화를 즐겨 신었으며, 굵다란 시가를 항상 입에 물고 다니는 전형적인 카우보이 타입의 호남이었다. 우리 중 장비팀 하고는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또한 우리와 모든 것을 협의하고, 우리는 또 그의 지시를 수용하며, 업무를 수행해나가고 있었다.
그는 친한 파로 한국에 대하여 관심도 많았고, 특히 그들의 아이들이 한국 라면을 그렇게 좋아해서 우리는 아예, 그의 집에 라면 떨어지는 날이 없도록 조치함으로써, 라면이 우리 업무 수행에 상당한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그들은 가족을 동반하여 이곳에 왔으며 현장 외곽에 그들의 camp촌이 따로 건설해 놓고 있어, 우리와는 천당과 지옥의 차이만큼이나 그들의 생활은 풍요로웠다. 방학 때마다 그들의 아들딸들은 무슨 별장에나 오는 것처럼 그들 부모를 방문했고, 한 번씩 들여다본 그들의 캠프촌은 거대한 수영장과 각종 오락시설이며, 그토록 황량했던 사막 골짜기를 낙원처럼 꾸며놓아, 그야 말로의 아방궁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국력의 차이가 이토록 우리 근로자 에게까지 위축과 수축함을, 실감케 할 수 있음을 생각하며, 우리도 언젠가는 팽창과 신장의 기회가 올 날이 오겠지 생각하며, 우리의 비감한 마음을 애써 감추곤 했었다.
‘리야드’ 시내에는 한국 사람이 경영하는 ‘청수장’이라는 요릿집이 있었는데, 우리는 향수와 시름을 달래는 마음으로 그 집을 가끔 방문하곤 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Grafton’도 이 자리에 합석할 기회가 되어 우리는 그와 동석하게 된다. 그 날의 메뉴는 불고기와 또 특별히 오이소박이 김치가 나왔었는데, 원래 한국식 음식을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날 보여준 그의 한국 음식 사랑에 우리는 실로 다시 한번 놀라고 있었다. 참 재미있었던 그와의 인연은 현장이 완공됨으로써 끝나고 말았지만, 미국인과의 그만한 친밀감을 느껴보기는 다시없는 좋은 기회였지 않나 생각한다.
그렇게 모래바람과 사투를 벌인 지도 또 일 년이 되었고, 나는 한 달간의 본국 휴가를 맞이하게 된다.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3동 ****번지. 직사각형의 우리 집은 앞마당에 화단이 있고, 한 편으로는 수돗가가 위치하고, 다른 편으로는 대추나무가 우뚝 서 있는 40평 정도의 자그마한 단독주택이었다. 뒤쪽으로 돌아가면 세를 놓을 수 있는, 부엌이 딸린 1칸짜리의 독립된 방이 있었고, 그전에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그곳에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작은 거실과 함께 왼쪽으로 안방, 오른쪽으로 작은방 하나, 거실을 지나면 주방과 함께 또 작은방 하나가 있어, 도합 방 4개에 화장실 하나가 딸린 집이었다. 집으로 들어서는 그 순간도 나에게는 축복이었고, 하느님에게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오며, 아내의 노고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기쁜 시간이었다.
실로 몇 년 만이었던가? 내 집을 가져본지가? 먼 옛날 민달팽이 시절에서 그 많은 설움과 수모를 견뎌야만 했던 부모님과, 성인이 되도록 까지 셋방살이를 전전했던 그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나는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고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다. 아내는 벌써 한문으로 새겨진 문패를 준비해 두었고, 나에게 그것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이건, 당신의 집이고, 이 모두가 당신의 덕분으로 이루어졌어요.”하고 울먹이며 말하였고, 이렇게 우리만의 집 떨이를 행복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을 보면, 참 딱하다는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얼마 전 tv에서 본 청소년들의 현실은 취업의 문은 좁고, 제반 환경들은 점점 악화되어, 도무지 희망을 말하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이다. 한창 미래와 희망과 꿈을 이야기해야 할 건강한 청소년들의 앞날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못해 아예 앞이 캄캄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를 어쩌면 좋으랴! 이때껏 나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불행한 사람임을 자처하며, 나 자신의 불행을 시대 탓으로 돌리기도 하면서, 나를 교묘히 변호하는 변명으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었지만, 시대의 흐름은 나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했고, 나 또한 시대 흐름의 수혜자였음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기회조차 제공받지 못하고 있는 요즈음의 젊은이들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시대의 아픔이 하루라도 빨리 가셔서, 우리 젊은이들에게도 햇살 같은 따뜻함과 안개처럼 촉촉한 그 무엇이 빨리 생겨났어, 그들의 얼굴에 희망의 꽃이 피어났으면 좋겠다.
1983년 5월. 2년간의 ‘사우디 리야드’의 생활을 거의 마치고 귀국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나에게 날아든 인사발령은 전혀 엉뚱한 곳인 ‘그룹 감사실’이었다. 나는 원래 중기사업소 소속이었고, 귀국하면 당연히 원 소속인 그곳으로 복귀하는 것이 관례인데, 전혀 엉뚱한 감사실로의 발령은 나에겐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하여튼 나는 예정대로 귀국하여 일단 휴가를 보내게 된다. 아이들은 그사이에 많이들 컸고, ‘안토니오’는 7살이 되어 내년엔 학교를 가야 했으며, ‘세실리아’는 한창 유치원에 다니며, 온갖 미운 짓과 재롱을 떠는 귀염둥이로 성장해 있었다. 아이들이 성장할 동안 쭉 떨어져 지내다 보니 아이들의 생활이 궁금하기도 하여, 짧은 휴가 기간 동안 내내 그들과 같이 지내기도 하면서, 그렇게 휴가를 마치고, 나는 ‘그룹 감사실’로 일단 출근을 했다.
그곳은 입사 이래 지내오던 곳과는 너무나 다르고 생소한 곳이었다. 회사의 중추인 핵심요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은 바는 있었고, 기획업무를 주로 하는 것으로 생각했지, 그룹 전체의 경찰 업무까지 관장하고 있을 줄은 미처 깨닫지 못한 사항이었다.
우리 ㈜한양은 건설이 주 업종이었으나, 당시 인기가 좋았던 ‘한양유통’‘라자가구’의 maker인 ‘한양 목제’ 또 ‘타워 크렌’ 생산업체 ‘한양공영’, 국영기업체를 인수한, ‘㈜대한 준설’ 등 그 규모가 크고, 타 건설회사보다 월등히 방대하여,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5 공의 우두머리 ‘전두환’의 입김이 회장 ‘배종렬’에게까지 미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 미친 칼춤의 장단에 멋모르게 놀아났던 내가 참 어리석기 짝이 없던 시대였었는데, 그땐 그것을 전혀 몰랐으니까 어찌하리오. 그 주 업무는 절대적인 친위대 역할이었다. 배 회장의 눈 밖에 나거나, 조금의 비위의 첩보가 들어오는 임원이건 누구이던 그 사람은 주요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우리들은 명에 따라 집요하게 그 뒤를 캐내어 그의 옷을 벗게 했고, 종종 들어오는 음해성 투고든, 아니든 투고에 근거한 조사는 필수였으며, 이천 여명의 직원 곳곳에 심어놓은 ‘프락치’들의 첩보 내용까지 조사하는 등 그 범위는 광활했었다. 우리의 활동은 회장 직속부서라는 직함으로 보호되고 있었으며, 나치 독일의 ‘SS요원’을 방불케 하는 그룹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조직으로 통하고 있었다. 정기 감사나, 수시감사는 그냥 서류감사로 지나가며, 실제로는 위에서 하달되는 임원들의 찍어내기에 주로 동원되는 편이었다. 이러다 보니 우리들은 임원들의 비굴하고도 비겁한 웃음과 자주 마주하게 되고, 나 또한 서서히 다른 동료들과 함께 어느새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때로는 죄 없는 말단사원이 희생되기도 했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때론 그냥 눈감아야 하는 나는, 점점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거의 매일 ‘룸살롱’이나, 고급 술집을 들락거리며 그들과 어울려야 함은 정말 견디기 힘든 나날이 되고 있었다.
도덕적으로 피폐한 이러한 행위들이 나의 종교와도 상충되고 있었으며, 나는 이 생활과의 결별을 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한 달이면 거의 20일 이상을 출장으로 보내고, 거의 술에 절어서 지내는 내 꼴이 아내의 불만을 자아내게 했고, 그러한 것이 좋은 것 인 줄로만 아는 남편이 한심했던 모양이었다. 그보다도 앞으로 이곳을 떠나면 동료들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때로는 동료를 팔아먹어야 하는 이곳 업무가 썩 좋을 리가 있겠는가? 나는 슬슬 이곳을 빠져나갈 구실을 찾게 되고 그 기회는 곧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회사 구조는 한 현장이 발생하면 우선 현장소장부터 선정이 되고, 그 이후의 인원 선정은 소장에게 일임하게 되어있었다. 마침 그때 ‘Libya 벵가지’ 지역에 ‘상수도 매설’ 공사를 수주하게 되는데. 나는 미리 선정될 소장을 수소문한 결과 평소 약간의 친분이 있었던 사람임을 확인했다. 이후 그와의 접촉을 통해 그곳으로 가기를 원하니, 인원 선발 시 나를 고려해 달라고 요청을 해놓고 기다리던 차, 예상보다 발령은 일찍 나고 말았다.
7. 아! 아프리카
태풍의 후렴인지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추적거리는 빗소리는 잠결에 들어도 반갑기 그지없다. 덕분에 좀 더 깊은 잠으로 빠져들 수 있었고 흐린 하늘이지만, 모처럼 개운한 아침을 맞았다.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그냥 조금 말고, 많이 오는 날이 더 좋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아스팔트에 내려 꽂이는 그 빗발은 나의 ‘카타르시스’를 한껏 부풀어 올려, 시원하기가 이를 데 없다.
‘워킹 맘’인 딸아이의 생활을 살펴보면 참 바쁘게 산다. 요즈음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인데도, 내 자식이라 그런지 몰라도 때론 상당히 안쓰럽다. 곁에 가까이 있지 않으니 일일이 볼 수는 없지만, 통화 중 들리는 주변 분위기는 바삐 돌아가는 모습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우리네 젊었을 때의 방식과는 딴 모습인 지금 신세대의 생활 패턴이 때론 참 낯설게 보이는 것은 웬일일까? 지금이야 흑백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칠. 팔십 년대의 여느 가정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회사로, 어머니는 집에서 아이들 건사하고, 시부모 모시며 가사에 전념하는 것이 전형적인 일반 가정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물론, 그 시대에도 사정에 의한 다른 방식의 삶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엄청난 변화와 진보를 거듭하면서, 생활의 많은 부분에 까지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과거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 우리의 시선을 현혹시키기도 한다. 또 사실 어떤 것은 우리에게 간편함과 편리함을 가져다주어,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너무 형식에만 치우친 나머지 비효율적이고, 겉만 번지르하고, 소위 가성비가 떨어진 것들도 적지 않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때론 이러한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자극시켜, 우리는 점점 쓸데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비단, 그것이 물건이나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발생하는 것들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우리는 평소 무의식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악습들이, 생활의 무질서와 헛된 욕망들로부터 파생됨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가 있다. 또 그 속에서 해어 나지 못한 채, 더 깊은 혼란의 늪으로 빠지기도 한다. 나 역시 한때 그 욕망의 찌꺼기를 걷어 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나 자신이 그곳에 함몰된 줄도 모르고, 귀중한 시간과 육신을 낭비와 탕진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매너리즘에 젖고 시류에 편승하여, 쾌락과 순간의 안락만을 추구하며 방황하고 있었다.
전보다 조금 나아진 환경의 변화에, 나는 독아가 깨물어 뱉어내는 그 맛에 중독되어, 교만과 편견의 아집으로 뭉쳐졌고, 속절없고 끝없이 그렇게 끌려가고만 있었다. 내가 그곳의 헛됨을 자각하고, 탈출하고자 했을 땐, 이미 나는 그 맛에 한참 중독된 뒤였으며, 이후에도 그 독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한동안 많은 시간을 허우적거리기도 했었다.
감사실 근무가 내게 남긴 것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1년 6개월의 세월은 원래 우유부단하고, 표리 부동한 원래의 내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은 채 그렇게 흘러가 버렸다. ‘Owner’의 말 한마디에 재주넘는 원숭이처럼 짓 까불기 하기를 18개월. 지나간 시간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 속에서도 하느님은 나에게, 내가 알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메시지’를 어김없이 전해주셨다. “너, 자신을 정확히 파악하라.”라고, 그리고 “용기를 잃지 말고, 선의 길에 서고, 또 그것을 실행하는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라고.
감사실장인 ‘유 전무’는 나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감사실 요원들은 나름의 ‘엘리트 의식’의 뿌리가 꽤 깊이 박힌 곳이기 도 했다. 왜냐하면 감사실은 회장 직속이었고, 면면을 회장이 직접 관여하기도 했으며, 또 타 부서에서 느낄 수 없는 그룹의 민감한 부분까지를 요원들은 다 알고 있었고, 이 중에는 회장의 내밀한 면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인원 선정에도 상당히 신중할 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인재들도 꽤 유능하고 믿을 만한 친구들로 만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정해진 근무 기간이 끝난 후, 타 부서로 전출 시, 한 계급 이상의 ‘프로모션’이 묵시적으로 보장된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부서에 말단인 나 ‘허 과장’이 스스로 이탈을 시도했으니, 실장으로서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것보다 이것을 택하기로 마음을 정했으므로 나중의 어떤 인사의 불이익까지도 각오한 바, 별 흔들림 없이 리비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물론 ‘이것’은 내가 지향하고 있든 도덕성이었고, ‘그것’은 구역질 나는 현실의 시궁창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Libya’는 아프리카에서 4번째로 큰 나라이며, 수도는‘트리폴리’였다. ‘UAE‘ 의 ’ 두바이’를 경유해 대기시간을 포함한 26시간의 비행 끝에, 나는 ‘트리폴리’ 공항에 도착했다. 1985년 6월이었다. 이곳은 좀 으스스한 곳이기는 하였다. 우선 국가수반인 ‘카다피’는 미국이 지명한 국제적인 테러리스트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었고, ‘리비아’ 국내의 정치상황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정적은 예외 없이 제거된다고 했으며, 가족들만의 족벌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했다.
국민들의 입과 귀는 철저히 통제되고 있어, 그야말로 공포정치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마치 ‘조지 오웰’의 ’ 1984‘의 본무대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한국을 떠나기 전 들은 정보에 의하면, 일반택시 기사들도 전부 정보원들이라, 절대 함부로 얘기하지 말 것을 다짐하곤 했다. 공항의 분위기도 살벌하였고, 회사로 들어가는 차 창가의 풍경은 사회주의의 냄새가 물씬 풍겼고, 거리 곳곳에는 ‘카다피’를 칭송하는 플래카드 만이 잔뜩 걸려있었다. 처음 보는 이러한 모습은 당시 필름을 통해 본 북한의 그것과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또 북한과는 오래전부터 외교관계가 정립되어 ‘리비아’ 내에는 북한의 기업체 및 공장들도 상당하다고 했다. 오직 당시의 ‘동아그룹’ 회장이었던 ‘최원석’과 ‘대우’의 ‘김우중’과의 개인 친분이 국내의 화재거리가 된 바도 있었지만, 어쨌든 여러 건의 건설수주가 우리에게는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곧이어 발표된 ‘동아건설’의 ‘대 수로공사’는 우리 건설업계에서도 큰 이슈거리로, 국내가 떠들썩하기도 했다.
도로 주변 곳곳에 배치된 대공포는 섬뜩하게 보였고, 마치 전쟁터에 온 느낌마저 들었다. 미국 정보기관이 카다피를 잡기 위해 여러 가지의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그의 거처는 비밀에 싸여,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또다시 이곳에서 비행기로 1시간가량 떨어진 ‘벵가지’로 이동해야 했으므로, 일단 이곳에서 여장을 풀었다. 잠시 들러본 트리폴리 시내는 한가했고, 백화점 앞을 지나다니는, 치마저고리 차림의 북한 여성들이 가끔 보여 눈길이 쏠리기는 했으나, 북한 사람 들과의 접촉은 금하고 있었기에 신기하게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며칠 후 벵가지 현장에 도착한 나는 미리 파견되어 있던 몇 명의 직원들과의 미팅을 통해 현재의 현장 사정 등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사회주의 구조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들은 현장을 운영하는 여러 가지 분야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었고, 생필품은 물론이요, 소소한 모든 자제들도 모두 배급제 체재로 공급되게 되어있어, 공기단축을 목표로 한 우리의 공사 운영 방침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본국에서 이미 발송한 식자재는 관세청에서 통관을 기다리고 있으나, 그 통관 시점을 추정조차 할 수 없었으니, 당장 우리들의 끼니마저 걱정해야 할 정도로 시급하기 짝이 없었다. 임시숙소로 쓰고 있는 컨테이너도 현지 업자를 통해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었고, 모든 자제는 하 세월로, 기약 없는 통관만을 기다리는 등 현장의 사정은 악화일로에 놓여있었다. 사회주의 체재의 시스템은 모든 분야에 걸쳐 우리를 옥죄이고 있었고, 그 해결책이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우리 공사는 모든 면에 있어서 낙후된 벵가지 시내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인프라 시설 중에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상수공급 라인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Water Supply Line Project’였다. ‘벵가지’ 시내 구석구석을 굴 토하여 물 공급 파이프를 매설하고, 또 중간중간에 대형 발브 및 가압설비까지를 설치하여 각 가정에 원활한 상수공급이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자제는 물론이요, 이미 일본에 발주한 ‘Komatsu’ 굴삭기 등이 빨리 반입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체재하의 모든 시스템은 이 모든 것들을 거의 중지 상태로 몰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생필품은 물론이고 사소한 자제 하나라도 전부 중앙의 통제하에 배급제로 공급되고 있었으니 참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문제는 전혀 엉뚱한 것에서 발생한다.
이 지역은 군사지역으로 시내 해변가에 나가면 우리로서는 처음 보는 잠수함도 있었고, 그 외에도 군사장비들이 심심찮게 보이곤 했었다. 중동 사람들에 비해 ‘리비아’ 인들은 대체로 인상들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카다피’만 보드라도 영화의 범죄인 비슷하게 생겨, 우리가 보기에도 영 아니다 싶기도 했었다. 우리 직원 중에 ‘김 반장’이라고 있었는데 공사는 진척이 없고, 장비와 자제는 답보상태로 세관에 묶여있으니 꽤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관세청에서는 근처에 철조망을 쳐놓고, 보세구역으로 설정한 다음, 그곳에 통관까지의 장비와 물품들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수입한 일본산 굴삭기도 그곳에 있었다. 갑갑한 마음에 그는 우리 장비들을 구경하려고 철조망 근처를 얼쩡거리다가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감방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는데, 우리가 고용한 현지 법률 대리인은 그 사건을 크게 보며 많이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이렇듯 그들은 안보 분야에 있어서는 국내인이든, 외국인이든 관계없이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그들은 상당한 금액의 보석금(?)을 받아 챙기고 난 뒤에야 그를 풀어주었다. 참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고,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을 무렵. 또 한 건의 돌발사고가 발생한다. 북한예술단이 이곳 ‘벵가지’를 찾아 공연을 펼쳤는데, 이른바 ‘피바다’ 뮤지컬이었다. 철딱서니 없는 일부 직원들이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곳을 찾았다가, 중정요원에게 적발된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우리는 궁지에 몰렸었고, 해당 직원들은 ‘트리폴리’로 소환되어 그야말로 식겁 들을 했었다. 회사 임원들이 동원되는 등, 그렇게 우리는 간신히 그 터널을 빠져나오기도 했었다.
이리저리 시간과 세월은 흐르고, 본사에서는 연일 공사의 진척을 독려하고 있었으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의 사정을 속속들이 모르는 본사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회주의 체재에는 뇌물이 존재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오히려 더 심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공사가 시작되고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얼마 뒤, 뇌물을 준 덕분으로 장비와 자재가 통관되고, 다시 출고되어, 우리는 본격적인 공사에 돌입하게 된다.
밀려있던 공기를 맞추기 위해 현장은 숨 가쁘게 달리기 시작했으며, 밤 낯없이 강행된 작업으로 우리는 지치기도 했으나, 도미노 현상처럼 짜 맞추어진 공정의 빈틈을 아무나 침범할 수도 없었다. 누가 봐도 공사는 잘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또 실제 밀린 공기를 조금씩 채워가고 있었고, 본사와의 소통도 자연스럽게 해소되고 있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하라 사막으로 되어있는 리비아는, 인구의 대부분은 해안을 따라 모여 살거나 해안과 연결되는 내륙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던 옛날과 달리, 원유를 발견한 이후의 그들은 오일의 힘을 빌려 강대국으로 발돋움을 꿈꾸고 있었으나, 미국의 제동에 그 위세가 주춤거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미국과의 대립은 곧 전쟁상태를 의미하고, 따라서 그 위험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었으며, 공사를 수행하는 우리들에게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현장 이외의 장소로의 이동은 자제해야 했으며, 매사를 신중하고, 주의 깊게 처리해야만 했다.
본사의 좋지 못한 소식들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 아마, 이때쯤이었지 않나 싶다. 그 좋았든 건설경기가 내리막길에 들어서고 있다는 불길한 소식과 함께 우리도 곧 구조 조종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어느새 우리들 사이로 비집고 들기 시작했다. 소문과 동시에 본사의 업무협조 건 문제들이 잘 해결이 되지 않으면서, 뭔가의 문제가 감지되기 시작했고, 현장도 뒤숭숭해지면서, 술렁거리기 시작했으며, 봉급 지불도 연체되고 있다는 소식이 연달아 전해지고 있었다.
1986년 4월. 나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냥 앉아서 구조조정을 당하기보다, 내 진로를 스스로 찾기 위해 과감한 결정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는 이미 명예퇴직을 종용하고 있었고, 많은 동료들이 퇴사를 서두르며 제각각의 길을 찾아 떠나고 있었다.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건설업 전반에 걸쳐 불경기의 한파가 막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8년간의 사막 밭과의 사투는 서로에게 좋은 추억을 남기고 이렇게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 38세 되던 여름이었고, 아이들은 11살, 9살 그리고 아내는 35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