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미나'와의 Face talk의 여운이 체 가시지 않았는데, '미나'옆으로 언뜻언뜻 보이던 네 모습이 조금은 그리운 아침이다. 이제 제법 싸늘해지는 바람에, 저만큼 와있는 겨울이 벌써 보이는 것 같아 자꾸 옷깃을 여미게 되는구나.
네 나이도 이제 불혹을 넘어 지천명을 향하고 있건만, 이 아비의 눈에는 이직 엣 된 소년의 엣 날 모습으로만 남아있으니, 덜 떨어진 노인의 눈은 세월에는 무감각하고, 감정은 더 여려지는 것 같다.
잘 지내고들 있지? '미나'엄마도 잘 있고? 엄마와 나도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가끔 들려오는 멕시코 소식이 좋은 것만은 아니니, 조바심이 상존함은 어쩔 수가 없구나. 특히 코로나-19에 대한 Maxico 정부 당국의 대처방안이 국민들의 불신감만 고조시킨다 하니, 더더욱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머나먼 타국에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살아가는 네가 너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네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노년을 맞이한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어쨋던
오늘 아침의 감회는 왜 이렇게 복잡한지 모르겠구나.
가끔, 나는 부모와 자식으로 만난 우리들 인연의 끈이 참 질기다는 엉뚱한 상념에 빠지곤 한단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관계가 단순하고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인간배아가 자궁 속에서 태아가 되는 순간, 그때부터 인간관계는 형성되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엄마와의 관계는 아빠와 형제 등 등으로 이어지며. 점점 더 확대되어 거미줄 같은 인맥으로 발전되기 마련이다.
이는 성장하고 활동하는 동안 계속 늘어나고, 자녀의 혼기 이후 주춤하다가 노년을 기점으로 정점으로 치닫는다. 죽음과 함께 소멸되는 인간관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상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하고 있다. 그 사회적이란 정치적 이기도 하고 또 경제적, 이념적 이기도 하면서 어쨌든, 우리 모두는 같이 어울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네가 어릴 적, 화곡동 집 골목 여기저기를 누비며, 같이 웃고 떠들고 놀던 그 불알친구들 모두가, 이제는 누구의 아빠들이 되었고, 또 누구의 아저씨가 되어 너와 마찬가지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각자 속해있는 분야에서, 아니 어쩌면 그 중심에서 또 다른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가며 나름데로의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이처럼 나를 중심으로 얽히고설키는 관계 속에서 나와 우리의 역사는 창조되고 또 이어나가며, 이는 결국 동시대를 같이하고 우리 모두의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로 남아, 후대의 교과서로도 활용되지 않나 싶다.
여기서 너도 알고 있는 아빠 친구 k 아저씨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친구인 k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망연자실한 그들 가족의 슬픔은 충격을 넘어 경악의 경지로 내 달리고 있었다.
1988년 한 여름의 이 사건은 이렇게 우리 앞에 전개되었고, 그 후의 벌어질 가족들 간의 갈등을 우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모 대기업 차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철 덜난 남동생 그리고 슬하에 남매를 둔 한 집안의 가장으로 그야말로, 고군분투하며 아이들의 아버지로 아내의 남편이며, 또 부모님의 든든한 장자로, 동생의 믿음직한 형으로서 힘겨운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항상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를 유지하는 당찬 젊은이 이기도 했다.
그의 어깨에 엊힌 중압감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고, 그렇게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지켜나가는 그를 우리 모두는 대견스럽고 선망의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던 중 들이닥친 그의 소식은 이 모든 기존의 질서들을 깨트리며, 그의 가족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넘어 큰 재앙이 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미칠 파장이 의외로 더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로 장례식이 끝난 며칠 후였다. K의 동생 p의 전화를 받은 것이 바로 그날이었으니 말이다. 머뭇거리던 그의 입을 통한 전말의 사정은 이러했다.
회사에서 지급되는 적지 않은 위로금을 포함해서, 그의 사후에 정산되는 모든 지급금은 당연히 상속자인 아이들과 미망인인 그의 형수에게 전액 지불되었는데, 형수인 k 처가 시부모를 포함하여 시동생인 자신에게는 어떠한 생계의 후속조치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해진 그와 부모님들은 어디 하소연도 못한 체,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고 했다.
평소 k는 효자로도 소문이 날 정도로 그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이를 너무나 잘 아는 우리 친구들은 이럴 수가 없다는 결론에는 도달했으나, 제삼자인 우리가 개입할 방법이 없었으며, 이제 막 상을 당한 미망인에게도 예의가 아님에 참으로 난감했었다. 그들 가족들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사택에 머물고 있었는데, 당장 집을 비워야 할 처지인지라 아들 잃은 슬픔은 제처 두고라도 갈 곳이 당장 없는 실로 딱한 사정에 직면하고 있었다.
아들이자 남편이며, 아버지이자 형인 그가 유명을 달리하자, 끈끈하게 맺어왔던 온 가족들의 연대감은 일시에 무너지고, 오히려 타인보다도 못 한 원망과 미움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간관계의 나쁜 단면이 그 치부를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했다.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은, 우선 선천적으로 맺어진 경우와, 후천적 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있을 것이다. 나는 앞 Episode에서 처럼 인위적이고 후천적인 경우보다는 출생과 함께 선천적으로 맺어지는 경우가 우리들에게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미 주어진 인간관계를 제대로 관리와 유지를 하지 못하면서, 인위적이고 후천적인 경우까지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이러한 인위적인 인간관리는 다양한 경로를 통한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터득할 수 있으며, 친구와, 동료와 또 선후배와 직장상사와 부하직원 등, 이들과의 관계 설정에는 다양하고 손쉬운 지혜들이 동원될 수 있으며, 타인의 경험을 나의 경험으로 탈바꿈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소위 말하는'oo처세술' 이라든지 'oo 방법론'등 범람하는 미디어 매체들이 우리를 깨우쳐 주기도 한다.
인간관계의 기본은 나와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으로부터 시작됨을 알아야 한다. 가장이 무너지면 가정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의 기본 인프라가 붕괴되면서 혼란이 야기되기도 한다. 이러한 평범한 진리의 원천은 가족이다. 가족은 절대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미 주어진 여건이며 선천적이고 원초적인 인간관계이다. 이 원초적인 관계의 붕괴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사회적인 혼란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요즈음 사회 전반에서 발생하는 가족들의 와해되는 모습들을 지금 우리들은 보고 있다. 남편이 아내를, 아들이 아버지를, 손자가 할머니를 위해하는 현상들은 이러한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수신재가 치국평천하'라고 했다. 진정한 인간관계란 상대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너'가'나'가 없다고 해도 그 관계가 없어지거나 무너져서는 아니 될 것이며, 너와 나를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관계는 지속적이고, 은은한 향기와 훈훈한 정이 담긴 관계로 승화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 코로나의 광풍이 짧은 기간에, 또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구나. 지구 북반구는 이제 겨울로 접어들고 있으니, 더더욱 걱정이다. 심지어 Twin Pandemic을 예상하기도 하니, 장기적인 안목으로 가족건강을 각별히 잘 챙겨나가기 바란다.
2020. 깊은가을. 아버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