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나의 18번 노래 ‘타타타’의 첫머리 가사이다.
나는 이 노래를 정말 좋아한다. 특히 가사 중에서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의 부분은 정말 나와는 딱 맞는 케미이고, 이 노래의 압권이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뜻을 가진 구절이 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마태복음 6장 26절).
듣기만 해도 창조주의 푸근한 정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 말 데로라면, 우리네 인생살이는 풍요롭고 한없이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같지 않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생존경쟁의 치열함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자신들의 행복을 향한 욕구를 위해, 그 노력의 불꽃은 오늘도 더 용열하게 타오르고 있고, 새들처럼 노래만 부르며 세월을 보내다가는 쪽 바가지 신세가 되기가 십상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그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참으로 알쏭달쏭하지 않을 수 없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전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하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여유로운 상태’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이 욕구와 욕망은 어느 정도라야 하는지 그것을 버금 하기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그릇은 다른 사람의 그것과는, 양과 질의 차이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의 욕심쟁이 놀부는 현세에서는 영웅으로 대접을 받으며 호 시대를 구가하고 있는데, 우유부단한 흥부는 무책임과 무능력의 대명사로 지탄을 받고 있는, 오늘의 이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놀부의 욕망과 흥부의 만족감을 비교해 본다면 그 답이 나올 것 같은데, 문제는 그것을 수치상으로 나타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들 각자가 원하는 마음을 산술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할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이 욕구의 만족도는 바로 이 연장선상의 제일 마지막에 존재하고 있는 행복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흔히들 인간의 욕구를 구분함에 있어서, 우리는‘식욕’을 단연 그 첫째로 꼽는다. 그 엣 날 우리의 조상님들은 오로지 생존을 위한 먹거리 마련에 온 힘을 다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불과 50-6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보릿고개가 상존하고 있었고, 그 시대의 중요 화두는 ‘주린 배’였다. 오늘날의 ‘배고픔’과는 그 차원이 다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말 그대로의 원초적인 것이었다.
그러면 그때 그 시절에도 행복이 존재하기는 했었고, 우리는 과연 그 행복을 느끼고는 있었을까? 하고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비 오던 늦봄의 어느 날, 3남 2녀의 우리 형제들은 함석지붕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옹기종기 방에 누워 있었다. 봄은 한참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쌀쌀한 냉기는 바닥을 통해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고 있었고, 점심을 건너뛰고 뱃속의 허기를 달래야 하는 현실이, 어린 나이의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이웃 잔치 집에 다녀오신다는 엄마를 기다리며 우리 형제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지붕을 때리며 요란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함께 우리들의 노래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송알송알 싸리 잎에 은구슬’로 시작해서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가면’등, 연달아 터져 나오는 우리들의 노래는 처연하고 쓸쓸하게도 들렸지만, 우리들에게는 배고픔을 달래 보려는 자구책이 되기도 했고, 엄마를 기다리는 애틋함이 묻어 있기도 했다. 형제애를 뭉클하게 느꼈던 때도 바로 이때가 최고였지 않나 싶다.
그때를 생각하면 슬픔의 자국만이 남아있을 것 같았던 그 자리에도, 비록 엷었지만 어슴푸레한 행복의 그림자가 함께 존재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지나온 날들의 파편 조각들에는 허기와 슬픔과 애증의 세월들만 남아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사아 사이에 알알이 박혀 있으며, 우리들을 기쁘게 해 주었던 순간의 행복 알맹이들도 많이 있었다. 우리 형제들은 나중에 이때를 행복의 시대였다고 공감하듯이 말했다.
우리들의 욕망과 욕구가 왜 재물에만 국한되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오늘날 우리 모두는 그것에 매달려 세월을 허비하고 있다. 주위에 널려있는 많은 행복의 이삭들을 외면하고 버려둔 채 허상과 신기루만을 쫓기에 여념이 없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되짚어 볼 일이다.
한 시대의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규정하는 인식을 우리는 ‘패러다임’이라고 말한다.
이 ‘패러다임‘과 ’ 시대의 가치관‘과의 차이는 또 무엇인지 때로는 헛갈리기까지 하다.
한 마디로 ‘패러다임’은 곧 여론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날이 갈수록 진보와 발전을 거듭하는 오늘의 사회구조는 변하는 시대에 맞추어 그 패러다임도 시시각각으로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인간 본연의 가치관은 결코 변할 수도 없고, 또 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회의 발전과 진보도 이 가치관을 무너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짐이 바람직한데 현세는 이를 무시하고, 재물에다 그 가치관을 맞추어 나가고 있다.
이 사회를 이끌고 나가야 할 정신적인 지주는 여론도 아니고, 패러다임도 아닌 바로 진실과 정의가 발맞추는 그 가치관이 되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안타깝게도 이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 그 흔들리는 자리에는 재물의 어두운 그림자가 이미 자리하고 있음을 우리 모두는 느끼고 있다. 행복의 파편과 이삭들은 삭정이처럼 버려지면서, 우리는 그 중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찾을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신기루 같은 행복을 좇지 말고, 또 메꿀수록 더욱더 깊어지는 욕망의 구덩이를 채우려 하지 말자. 눈을 크게 떠, 주위에 널려있는 소소한 행복의 낱알들을 찾아보자. 그리고 그 알맹이에 박혀있는, 진정한 행복의 맛을 깊게 음미해 봄이 좋지 않겠는가 싶다.
20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