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 있었음에
Part 2 정체성이 익어갈 때
1. 대부님의 죽음
1967년 봄 3월의 복학을 앞두고 있던 나는, 뜻하지 않은 나의 영세 대부님 ‘배 요셉’씨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는다. 연세대학교 4학년 졸업반이던 대부님의 사망 소식은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죽음에 대한 깊은 고찰의 계기가 되고 내 인생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자리 잡는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도 외교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오신 그분은, 그 꿈의 날개를 펼치기 직전 들이닥친 죽음으로 우리 모두를 아연하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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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사정도 끝났고, 이미 여러 곳의 기업체로부터 입사 제의를 받았으나, 외무고시의 마지막 관문을 뛰어넘던 중 다가온 허망한 죽음은 그분뿐만의 비극이 아닌 늙으신 어머님과 하나뿐인 누이동생에게까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일 수밖에 없었다.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미혼으로 숨져간 나의 대부님과 나와의 인연도, 나중에 하늘나라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슬픈 사연으로 끝나고야 말았으며, 나 또한 영세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대부님을 잃어버렸으니 졸지에 고아 신자가 되고 말았다.
그 할머니(나에게는)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온 나는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 안치된 시신 확인을 시작으로, 장례절차를 밟아 나가기 시작했다. 안치소에서 확인된 대부님의 마지막 모습은 평온했으며, 육군 ‘카시미론’ 내복을 입고 누워 계셨든 모습이 기억이 난다. 정외과 학생회의 도움을 받아 대구까지 운구를 하고 계산동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드린 후 ‘군위 천주교 묘지’에 안장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나는 상주로서 충실히 그리고 기꺼이 임했었다.
당시 17살에 불과했던 내가 그 큰일을 치렀다는 것이 내가 생각해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지금쯤 대부님은 어머님 아버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안식을 누리고 계시리라 믿으며, 나를 위해 기도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대부님의 죽음을 통해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슴 깊이 받아들여, 그 계명을 지키기는 물론이요, 생명의 영원함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졌었다.
이후 비록 대부님은 일찍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셨지만 짧은 인연임에도 나와의 영세 때 서로 약속한 바를 서로 지킬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매일 아침 기도 중에 대부님을 기억하고 있다.
늘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 하신 하느님의 그 말씀을 항상 생각하면서 오늘을 살고 있다.
2. 젊음 젊음 젊음
신림역 근처의 모습은 달포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항상 복잡하며 좁은 통로에 인파들은 넘쳐나고, 종종걸음의 많은 사람들은 제가끔의 발걸음만 재촉하고 있다. 오늘따라 하늘도 청명해서 나의 외출을 반기는 듯하며 마음을 한껏 들뜨게 한다. 바람조차 선선히 불어 덩달아 발걸음도 가볍게 느껴진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푹푹 찌는 더위에 얼마나 많은 날들을 무기력하게 보내고 있었던가? 친구들은 변함없는 그 모습 그대로 ‘미가집’에서 나를 맞아 주었고 우리들의 시간은 늘 그래 왔듯이 잔잔한 미소와 함께 시작되곤 한다.
세월의 흔적들에 따라 풋풋하던 동안들은 비록 숨길 수없을 만큼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지만, 청년 시절 보여 주던 여전히 때 묻지 않은 그 미소와 천진함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어 우리를 기쁘게 해 준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철딱서니 없는 노인들로 남아있을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을 만큼 매번 이 모양이다.
이 친구들이 나는 너무 좋다. 십 대 후반의 까까머리로 만나 칠십 줄의 노인이 되었으니, 모진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나 보다. 이 친구들이 있어 나는 행복하고, 세월에 몸 기대어 이렇게 속절없이 흘러갈지라도, 같이 떠내려가는 벗들이 있어서 나는 외롭지 않다.
전문대학교의 수업 과정은 일반 고등학교와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더더욱 공업전문대이다 보니 보통 1, 2학년 때 교양과목을 끝내고 3학년부터는 전공 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게 되는데, 특히 기계를 직접 다루는 실습시간이 많이 할애되어 있어서 그 시간에는 숙련공이 될 때까지 반복 교육을 시키는 경우도 많았었다.
당시 기계에 관해서는 일본으로부터 제반 기술은 물론이요, 교본 자체도 일본 번역본으로 나왔었고, 무엇보다 실습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분은 그냥 일선에서 일하든 기술자를 데려와 학생들을 지도하게 했으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교수와는 질적인 면에서 성능미달의 교수도 많이 있었다.
‘서무열’ 교수는 바로 그런 케이스에 해당하는 인물로 학생들 사이에는 소위 <후룩꾸>(일본식 발음. fluke)로 불리며,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이득조’ 교수님은 열심히 가르치긴 하는데, 교수라는 직함이 맞지 않은 듯한 어설픈 언행에 우리는 그를 ‘쪼득이’로 부르며 놀려 대기도 했었다.
그러나 미분 적분을 가르치든 ‘장갑득’ 교수님 같은 분은 학생주임으로 호랑이같이 무서웠지만 그분의 교육방침엔 묵직한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어서 우리 모두의 존경을 받기도 했었다.
수업시간에도 ‘바리칸’을 가지고 다니면서 두발 검사는 물론이요, 규정 위반일 경우에는 가차 없이 머리에 고속도로를 내 버리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으나, 우리는 그분을 무척 좋아했었다.
그의 조카가 우리 반에 있었는데 조카인 ‘득찬’이는 나의 평생 친구로 지금도 종종 만나고 있다.
이렇게 나는 웃음과 희망과 꿈을 가지고 학교생활을 내 페이스대로 잘 끌고 나가고 있었다. 학교 내 가톨릭 학생회를 만들어 ‘곽길우’ 신부님을 초청해 창립총회를 이끌기도 하고, ‘장갑득’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위촉하기도 하면서 나는 종교에 대한 나의 자부심을 아낌없이 표출시키기도 했었다. 우리의 주임 교수이셨던 ‘송지복’ 교수님은, 교수님 이전에 우리들의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시며, 항상 학생들의 편에서 학생들을 위한 학생들의 교육에 앞장섰던 영원한 우리의 호프이셨다.
친구 ‘태욱’이는 우리 집 가까이에 방을 세 내어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자취방 은 나의 아지트가 되어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며, 노닥거리 기도 하고 시간을 낭비하기도 했지만, 막걸리 몇 잔에 당시 인기였던 삼양라면을 안주 삼아, 시시껄렁한 철학을 들먹거리며 인생을 논하기도 했었다. 나는 ‘태욱’ 이를 성당으로 이끌어 ‘바오로’란 영세 명으로 신자가 되게 했으며, 나의 몇 안 되는 대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도 서울에 거주하고 있어 가끔 만나는 역시 평생 친구이다.
우리 학교 뒤쪽으로는 푸른 방초 동산의 목장이 있어서 점심 식사 후, 우리들은 그곳으로 자연스럽게 모였었고, ‘수창’이는 웃음을 생산하고, 또 그것을 재생산하여 우리들의 배꼽을 독차지하곤 했다. 근처에서 자취생활을 하던 ‘준호’의 자취방에는 항상 친구들이 득실거려 시골에서 가져온 한 달분의 식량은 단 열흘에 바닥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준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 도 했었다.
넓은 풀밭과 멀리 보이는 금호강을 바라보며, 시국을 인생을, 우리들 자신을 이야기하며 꿈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참으로 낭만스럽고 싱그러웠던 그때가 정말 그립고, 떠오르는 모든 이들이 한량없이 보고 싶을 뿐이다. 우리들의 천국과 같았던 그날들도...
합창단은 합창단대로 많은 친구들로 웅성거렸는데 ‘김비오’는 태너 파트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하는 독보적인 존재로 그의 목소리는 남자들이 들어도 반할 만큼 감미로웠다. 그는 여차한 사정으로 신학교에서 막 나와 잠시 방황하는 듯했으나, 다행히 성가로 마음을 다독이면서 평정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고 다행히 우리 모두는 그러한 ‘비오’를 따뜻하게 감싸주곤 했었다.
그는 군 복무 중 나와 조우하게 되는데, 하필 내가 장교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든 3 사관학교에서였다. 그는 헌병 병과를 부여받아 그곳 헌병대에서 복무 중이었는데, 나는 교육생 입장이라 긴 시간의 만남은 가지지 못하고 그냥 스치는 정도의 만남으로 서로의 안부를 교환하곤 했었다. 대구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한다는 소식을 끝으로 그와의 소식은 두절되고 말았다.
‘김 노렌조’는 영남대학교 기계과 학생으로 서구식 용모와 큰 키에 귀공자 같은 하얀 피부로 뭇 여대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인기 남이었다. 지금은 이름조차 잊었지만, 효성여대 불문과 학생이던 한 여학생은 나의 밤잠을 설치게도 하였고, ‘김 헤레나’로부터는 어느 날 느닷없이 고백의 편지를 받기도 하면서 ‘허 베드로’의 존재감도 서서히 부각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내 마음을 아프게 자극하는 한 친구가 있었는데 바로 ‘조현철’이었다. 일찍 조실부모한 그는 그 어린 나이답지 않게, 야간 업소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어쨌든 부모의 그늘막에서 학업을 이어가던 우리와는 삶 자체의 모양새가 확연히 틀린데도 불구하고, 그 영혼은 한량없이 맑아서 다들 그를 좋아했었다. 음악을 너무 좋아했던 그는 춤 솜씨 또한 뛰어나, 야유회 때나 회식이 있을 때면 좌중의 눈길을 사로잡곤 하면서 요즈음 말로 분위기 맨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어 우리들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 주곤 했었는데, 가끔 드러내 보이던 사슴 같은 그의 눈망울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외로워 보여, 내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그의 모습은 내가 군에 입대하면서 그와 나눴던 악수가 마지막이 될 줄은 그 누가 알았겠는가? 숱한 세월이 지난 후 내가 들은 그의 소식은 너무나 가슴이 아파, 솔직히 여기에 언급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다만 눈망울이 아름다웠던 그의 미소는 영원히 잊지 못할 멍울이 되어 내 가슴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와 못지않게 불우한 환경이었으나 꿋꿋하게 살아가는 또 한 친구는 ‘웅명’이었는데, 역시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누나와 매형 집에서 같이 지내고 있었다. 넉넉지 못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항상 밝은 모습의 그는 그 후에도 가끔 볼 수 있는 친구로 대구에서 잘 살고 있다.
그 시대의 그 사람들은 모두가 어렵고 힘들었으나 요즈음처럼 생을 쉽게 포기하는 등의 약하고 어리석은 행동들은 하지 않았고, 주어진 운명을 묵묵히 감수하며, 열심히들 노력하며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싶다.
이렇듯 나의 황금시대의 곳곳에 조차도 슬픈 현실의 파편들은 산재해 있었으나, 나의 청춘의 쉼 없는 항해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성을 향한 젊음의 욕구는 마침내 나를 주체할 수 없는 욕망으로 몰고 가 자연스럽게 여러 여성들과의 컨텍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앞서 말한 ‘김경희(헤레나)’는 엘토 파트의 멤버로 예쁜 편은 아니었으나, 세련된 커트 머리에 투피스 정장으로 항상 웃음을 달고 사는 명랑한 아가씨로, 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즐겨하는 보통의 여자였다. 그녀가 나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접근해 오는 것을 눈치챈 나는 의식적으로 피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응하지도 않은 채 엉거주춤한 상태로 있는 가운데, 느닷없이 주고 간 고백의 편지를 들고 나는 적잖게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로서는 주로 남자가 여자에게 프로 포즈 하는 것이 대세였는데, 그 반대가 되고 보니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에 빠지기도 했었다.
우리가 세상을 끝내는 날까지 걸어야 할 인생 여정에서 숱한 사람들과의 조우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할 것이다. 때로는 좋은 사람들과 만나 좋은 추억과 기억을 남기기도 하지만, 원치 않는 인연으로 인해 곤란을 겪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일일이 선별하며 만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뿐 아니라, 꽤 풀기 힘든 수수께끼와도 같기 때문이다. 나도 역시 마찬가지로 여태껏 칠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짐을 반복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지만, 젊었을 때와는 달리 쉽게 만나지지도 않고 또 만나더라도, 상대가 누구이던 상관없이 마음을 주기가 전만큼 쉽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다.
내 좋은 시절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 안에서 만난 하느님의 백성들이었음을 그때는 몰랐었는데, 세월이 흐른 한참 후에야 그것을 깨달았고,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바로 하느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배려해 주시는 그분의 따뜻한 사랑을 인생 끝장 판에 왔어야 알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런저런 많은 사연들을 간직한 채 세월은 지체 없이 돌아가고, 굵어진 내 머리와 같이 내게 주어진 삶의 무게도 슬슬 내 어깨를 누르면서, 나는 이제 이십 대 초반의 청년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졸업을 일 년 앞둔 교정은 갈색의 물결로 바뀌고 풋풋하던 친구들의 모습도 서서히 기성세대의 빛깔로 물들어갈 무렵,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한 여인과 조우하게 된다. 바로 지금의 아내 ‘소피아’를 이 무렵 숙명처럼 만나게 된다.
그것이 운명이었든 숙명이었든 간에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만났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3. 베드로와 소피아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만 저녁 무렵에야 그치는 둥 마는 둥 하늘만 잔뜩 흐리다. tv를 시청하든 아내가 갑자기 자장면이 먹고 싶다 한다. 뜬금없이 웬일인가 싶었는데, ‘동네 한 바퀴’란 프로에서 마침 자장면 먹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고, 하필 그곳이 이곳 녹번동이었다. 평소 늘 보든 동네 모습에 더 정겹고 그에 따라 갑자기 자장면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평소 면 사랑에 일가견이 있는 나인지라, 아내와 서둘러 집을 나와 분식집을 향했다.
성당 맞은편에 자리한 분식집엔, 올망졸망한 테이블 몇 개가 전부였으나, 제법 깔끔하게 보이고,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한 테이블에만 손님이 있을 뿐 한가했다. 자장면 외에도 가락국수 또 메밀국수 콩국수 등 메뉴가 다양했다. 서둘러 두 그릇을 주문하고 나니 어느새 그쳤든 비가 후드득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이내 모락모락 김과 함께 나온 자장면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언제 봐도 반가운 팥 빛 짜장이 잔뜩 입맛을 돋운다.
빗방울은 다시 굵어지나 싶더니, 빗소리마저 커지고 아내와 나의 자장면 먹는 소리만 잔잔하게 빗속으로 잦아들며, 참 정겹게 들린다.
이 고즈넉이 비 오는 서울 저녁, 달동네 한 귀퉁이에서.
아내와 같이하는 모든 것은 나에게는 작품이요, 소중한 추억이 된다. 한 사십여 년이 조금 넘었나 보다. 이렇게 같이 멋진 인생 그림을 그리고 가정을 꾸려온 지가. 이십 대 초반, 십 대 후반에 만나 이젠 노구의 노인이 다 되고 말았다.
그날은 흐릿한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추석 전인 것 같은 가을날이었지 않나 싶다. 마침 실습이 있는 날 이어서 쑥색 실습복을 갖춰 입고 등교를 했었는데, 매일 타던 버스가 그날따라 늦게 도착했고, 승객들도 발 디딜 틈 없이 초만원이라 아침부터 진땀을 흘린 데다가 아침 식사도 웬일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먹지 않아 실습장에 들어서니 후줄근한 게 맥이 쭉 빠져 힘이 없었다.
서둘러 내 자리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서 교수’의 실습 진행 설명을 들은 후, 곧바로 설계도에 따른 제작에 착수했다.
그 당시 공작기계인 선반은 요즈음처럼 자동으로 움직이지 않고, 큰 발동기 한 대에 벨트로 서로 연결하여 여러 대의 선반을 동시에 작동시킬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필요에 따른 속도 조절은 돌아가는 휠의 직경 크기에 따라 벨트로 교체하여 조절했었고, 교체 시 돌고 있는 벨트를 손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바꾸게 되어 있었다.
그 벨트의 연결 부위는 강철로 되어있었고 오래된 벨트일수록 연결 부위가 닳아져 강철이 일어서 있는 부위가 있을 수 있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환봉을 재료 삼아 제품 제작에 여념이 없었는데, 선반의 회전 속도 조절을 위해 오른손으로 벨트를 교체하는 순간, 오른쪽 손가락에 전해오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순간적인 비명과 함께 푹 주저앉고 말았다.
이어서 약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에서는 선혈이 솟아 흘렀고, 친구들이 몰려들고 이내 도착한 ‘서 교수’에 의해 나는 일단 집으로 연락함과 동시에,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원인은 벨트 연결부의 일어선 강철이 내 손가락 사이를 찢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아주 깊숙하고 길게.
지금도 남아있는 그 상흔은 언제나 아내와의 만남을 증명이라도 해주는 듯 내 오른손에 여전히 남아, 역사의 증거 노릇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하느님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서 서로는 몰랐지만, 그분이 설정해 준 시간을 기다리며 섭리에 따를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왜냐하면 그곳은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성 요셉’ 병원이기도 했고, 어머니의 허겁지겁 등장과 함께 찾은 병원이 왜 하필 그곳이었으며 그 병원에는 지금의 아내 ‘권영숙(소피아)’이가 근무하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급히 봉합수술과 함께 상처 부위에 대한 제반 처치를 완료한 후에야, 비로소 주위를 돌아보니 첫눈에 들어오는 간호원 아가씨가 바로 ‘소피아’였다. 훤칠한 키가 우선 돋보였고 환자를 보는 서글서글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어머니와 ‘소피아’는 이미 알고 있던 사이처럼 보였고,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소피아’는 내 동생 ‘루시아’의 친구였으며, 가끔 우리 집에도 놀러 오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녀와의 첫 대면은 공교롭게도 내 오른손의 상처와 고통과 같이 이루어졌고, 마치 하느님의 고통의 신비를 맛보듯이 그렇게 우리의 사랑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처음엔 그냥 한 번씩 그 병원 앞을 지나치며 얼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나, 날이 갈수록 그 횟수가 많아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전 같지 않은 묘한 감정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녀 나이 18세, 내 나이 21세 되던 1969년 늦은 가을의 큰 이벤트는, 이미 전개되고 있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를 그리워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면에서 지켜보시는 하느님과 또 다른 그 누구의 간섭도 배제한 채, 우리들만의 호젓한 길을 원하고 있었다.
그때 나의 주위엔 몇 명의 또 다른 여자 친구들이 있었으나, 그것을 알 수 없었던 소피아는 양과 같은 눈길로 늑대 같은 나를 믿고 따라오는, 실로 위험의 경지에 처해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나의 이 점이 나를 가장 괴롭혔고 양심의 고동 소리에 때론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행보에 시간이 더해질수록 우리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주위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탈출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일 년이 지난 후까지 이어져 이듬해 군입대를 눈앞에 둔 시점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소피아’를 만난 후의 나의 학교생활은 환희의 날들이었으나, 졸업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우리들의 친구들은, 4년제 대학의 3학년 편입, 사회로의 진출 또는 군입대 등을 놓고 나름대로의 계획을 저울질하기 시작했으며,
나 또한 이들과 다름없이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형의 군입대로 인해 집은 텅 빈듯했고 이제 얼마 후 어디로든지 떠나야 할 나까지 대기 선상에 섰으니 남은 동생과 어머니의 마음도 꽤 허전한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더 하고 싶어 대학 3학년 편입을 원하는 나의 소망을 들어줄 수 있는 형편도 안 되는지라, 내가 갈 길은 뻔히 보이는 사회진출 또는 군입대의 두 가지 길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었다. 어차피 갔다 와야 할 군입대를 미뤄야 할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한 나는 이왕이면 장교로 근무함이 좋을 것이라 판단하고, 때마침 모집 중인 육군 제3사관학교 생도 모집에 응하게 된다.
시험은 그렇게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고 필기시험에 이어, 체력검증을 거쳐 신원조회를 끝으로 모든 전형이 완료되고 이듬해 봄에 그 결과를 통보받게 되어있었다. 남은 기간을 최종 졸업시험에 포커스를 맞춰나가며 나는 마지막 캠퍼스 생활을 서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형이 부모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베트남 참전을 결정하고, 이미 몇 달 전 전쟁터로 떠났다는 소식을 받은 것도 이 무렵으로, 어머니의 눈물 바람은 여전히 마를 날이 없었다.
4. 군입대
불가마같이 용트림하던 더위도 숲 더미가 내뿜는 냉기에 슬며시 뒷걸음치고, 숨 가쁘게 짖어대던 매미들도 지쳤는지 그 울음소리도 뜸 해졌다. 구름과 산등성이는 틈이 많이 벌어져 그사이를 뚫고 갈바람이 드나드니 조석으로는 꽤 쌀쌀하기까지 하다. 엊저녁 맑고 청명한 하늘에 둥그렇게 멍청히 떠 있던 달은 멀지 않은 가을을 예고하고, 따습던 추석 명절도 내년을 약속하며 시야에서 멀어져 간다.
이렇게 또 마주해야 할 새로운 계절에 나는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나? 계절은 다가오는 세월에 발맞추어 그 색상을 달리하고,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분임에 틀림이 없으니, 계절과 인간도 “身土不二”가 아니겠는가? 이제 모두 벗어던져 버리고 알몸으로 나서서, 그동안의 치열하게 살아왔던 시간을 결산해 보자! 하늘의 응답이 어떻게 나올지 두고 볼 일이다.
내가 나를 사랑함에 있어서, 그만큼의 사랑을 남에게도 주었던가? 나에게 들이댔던 그 아량의 잣대를 타인에게도 그렇게 했던가? 혹, 강한 자에겐 강아지처럼 약한 자에겐 늑대처럼 대하지는 않았는가? 옳지 못한 일임을 알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진 않았는지? 나의 안위를 위한 상대의 불편에 눈 감지는 않았는가? 불어 닥칠 찬바람이 볼에 닿기 전에 이 모든 것에 대한 결산을 봐야 하지 않겠나 싶다.
계절은 우리를 그렇게 오래 기다려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49년 전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세월호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고,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듬해 봄. 1970년의 미명이 밝아져 오며 내 인생 여정에서 큰 획을 긋는 숱한 사연들 모두가, 그 출발 선상에서 나를 향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내 정체성의 마지막 벽돌을 쌓는 마음으로 나는 그해를 기꺼이 맞아들인다.
발표된 3 사관학교의 합격자 명단에는 내 이름이 있었지만, 그리 반갑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학교는 새 학년을 맞이하여 겨울의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고 친구들도 덩달아 졸업 학년을 맞이한 들뜸으로 웅성 그리기 시작했다.
군입대를 결정한 친구들조차 자신들에게 처해진 모든 여건들을 무리 없이 수용하고 있었는데, 나는 왜 옛날의 그 비루 감이 되살아나는지 또 정체성이 특별하고 까탈스러운 내 마음이 나를 우울하게 하고 있었다.
친구인 ‘안태욱, 장동수, 김득찬’ 등은 이미 대학 3학년 편입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외의 친구들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진로를 결정하고 있었다. 잠시의 이별을 오히려 기다리는 듯이 그렇게 시간들을 할애하고들 있었고, 연말로 예정된 나의 입대를 기뻐해 줄 그 무엇은 아직 찾아볼 수 없었다. 당사자인 나조차도 그날이 다가옴을 기다리진 않았으니 말이다. 마치 가난에 떠밀려 할 수 없이 타버린 나의 인생 여정 열차조차도 혐오스러워 보이며, 몇 년 전 학비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3학년을 수료 후 장교로 입대해 버린, ‘정규봉’이란 친구가 불현듯 생각나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던 그가, 현실감 있는 결정을 한 배경을 잠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하느님의 말씀을 내 생활에 접목시키려 노력해 보지만,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는 좌절감으로 고개를 흔들고 말았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생활과 신앙의 갈등은 평생을 풀어도 결코 풀 수 없었던 영원한 수수께끼와 같았으니까. 나에게 다가올 미래의 두려움조차도 전혀 낯설지 않음은 웬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입대 전날 밤, 엄마가 눈물 바람과 함께 마련해 준 이별 party는 가까운 몇 안 되는 친구와 더불어 자정 무렵까지 이어졌고, 밤늦은 시각 우리는 먼 훗날을 기약하며, 각각의 길을 찾아 어둠 속으로 모두 사라져 갔다.
적막한 방구석에 덩그러니 앉아 멍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엄마는, 과연 그때 무엇을 생각하고 계셨을까? 그녀를 통해 태어났던 내가 자신의 분신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님, 자신의 아바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또 하나의 개체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직까지 고정되지 않은 나만의 주관, 종교관과 인생관을 수정하고 보완시키면서 ‘허 베드로’ 만의 독특한 정체성으로 탄생시키고 싶어 나는 아직까지 더듬고,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깊숙이 와버린 초겨울의 냉기가 꽤 차가웠던 그날 저녁의 하늘엔, 유독 성근 별과 함께 청명하게 달도 떠있었다.
이튿날 영천에 위치한 육군 제3사관학교 앞에서 그곳까지 따라왔었던 ‘김 헤레나’를 뒤로하고, 나의 GoldenHour와 팽창을 거듭하던 청춘 세계, 그리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증오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당분간의 안녕을 고하며, Military Zone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5. 훈련 단련 인내
밤새 어깨 통증으로 밤잠을 설쳤다. 부스스한 눈으로 아침을 맞으니 기분이 영 그렇다. 하늘마저 잿빛으로 착 가라앉아, 금방 비라도 쏟아질 것 같이 후텁지근하며, 가까운 산등성이와 구름도 딱 붙어있어, 바람이 빠져나갈 길이 없다. 아예 바람은 불지 않고, 숲과 나뭇잎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뻣뻣하게 서 있다. 꽉 막힌 내 마음처럼 모든 게 정체된 느낌이다.
매사에 정해진 규칙을 중히 여기며 생활의 질서를 강조하며 살아온 나의 일상에 질서가 와해되고, 규칙이 엉망이 되어 버린 지는 내가 은퇴하고 불과 얼마 되지 않아서이다. 친구들보다 그래도 꽤 늦게까지 직장생활을 이어가던 지지난해까지만 해도 아직은 몇 년 더 버틸 것은 자신감에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곤 했었는데, 급작스럽게 눈앞에 닥친 은퇴란 현실 앞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물론 나이가 있는지라 어느 정도의 예상은 했다 하나, 그래도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무릇 살아가는 방식이야 옛날이나 지금을 떠나서, 나라고 특별할 리가 없듯이 사회와 현실은 이제 나의 손길 따윈 안중에 없게 되었으니 그 시류에 반할 제주가 내겐 없다.
그래, 흐르자. 흘러가자 고이지 않는 물이 맑아지듯이, 흐르는 그곳에 내가 있고, 머물 수 있는 나의 공간을 찾아가 보자. 팽창과 생육의 시간은 후딱 흘러가 버리고, 이제 찌부러짐과 위축의 세월만이 저만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내가 잘 알고 있지 않는가?
먼 곳에서 햇볕이 슬며시 스며든다. 아주아주 조금씩. 스며드는 손수건만 한 빛조차도 반가운 나의 그 초라함도, 부끄러워하지 말며 자연의 당연한 이치이려니 생각하자. 먼 옛날 3 사관학교의 넓은 연병장을 향해 젊음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디뎠던 그해 그 겨울처럼 올 겨울도 나름의 발걸음을 재촉해 볼까 한다.
영천의 겨울은 칼바람과 찬바람을 합쳐놓은 것처럼 앙칼지게 추웠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훈련의 강도는 점점 더 세어지고, 체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우리들은 헉헉대기가 일쑤였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 군부대의 특수요원 31명으로 편성된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 일당은, 청와대 폭파를 목표로 남쪽으로 급파되고 이른바 ‘1·21 청와대 습격사건’을 저지른다. 이 사건은 온 나라를 들쑤시며, 아군 특수 부대의 창설을 부추기고 있었고, 국회에서는 연일 그 대책을 국방부에 요구하게 된다.
그 대책의 일환으로 설립된 제3사관학교는, 정예 사관학교인 육군사관학교와는 그 탄생 밑그림 자체가 판이하게 틀릴 수밖에 없었다. 요즈음 말로 2 등품을 대량으로 양산하여 국민들에게 싸게 공급하는, 그야말로 소모품 장교의 생산 공장과 다를 바 없었다. 이를 모를 리 없었던 나는 임시방편인 이곳을, 잠시 지나가는 내 인생의 임시막사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크게 기대를 걸진 않았다. 그런데 훈련의 강도가 점점 심해지고 가끔 도태되어 퇴교되는 동료들을 목격하면서 은근히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젊음의 오기인지, 대량 생산될 2 등품인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나는 기회를 보아 퇴교의 수순을 밟으려던 애초의 계획을 접고, 적극적으로 훈련에 적응하기를 마음먹는다
. 입교 1주일 후인 1970년 12월 21일. 몇 명의 동료들을 퇴교시킨 6기 사관생도 일동은 눈이 펄펄 내리는 넓디넓은 연병장에서 정식 입교식을 거행하게 된다. 식순에 의해 진행된 입교식 말미에 군목 군종신부, 군승의 순으로, 하느님의 배려를 바라는 기도가 진행되는 동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생도들의 흐느낌은 소리 없이 내리던 눈 속으로 애잔하게 가라앉고 있었고, 내린 눈물인지, 흐르는 눈물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그렇게 1970년의 겨울과 함께 역사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 오늘에 내가 있었던 그곳에서의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파고에 따라 흔들리는 조각배와 다름없이 세월의 물결에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본격적인 훈련은 곧바로 다시 시작되었고, 우리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과 속으로 휘말리면서, 고속으로 회전하는 획일적인 군 세탁기 안에서 사회의 잡물들을 빠르게 걷어내고 있었다. 북한 124군 부대에 버금가는 장교들을 육성해야 하는 시급 함인지 모르겠으나, 훈련의 강도는 생각보다 혹독할 정도로 강했으며 한창 젊은이들만 모였음에도 모두들 힘들어하며 그날그날을 버티며 내일을 모르는 오늘을 견디기에 급급하였다.
장교는 국제신사라는 것을 강조하며, 그 자부심을 심어주면서도 국제신사의 체면 따윈 안중에도 없이, 개돼지보다 못한 육체적인 고통과 수치심을, 그들은 체력단련이란 미명으로 포장하기도 했었다. 영하 15도의 혹한에 얼음을 깨고 수영을 시키는가 하면, 섭씨 35도 이상의 혹서기에 40Kg의 배낭을 짊어진 채 산악행군을 강행하기도 했다. 그 더웠던 1971년 영천의 염천 같은 더위는, 결국 동료들 몇 명을 희생시키기도 하였으나 훈련의 강도는 변함이 없었고, 여전히 그곳에는 우리의 끈질긴 인내와 그에 따른 강한 적개심만을 요구하고 있었다.
몇 주간의 교육이 끝난 후 주어진 첫 면회 날이 다가오고 있었고, 우리 모두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가족들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나 또한 가족들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보고 싶은 마음이야 여느 동료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날이 다가올수록 곤란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입대 이후, 계속 변함없이 소식을 전하며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오던 두 여인을 두고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댈 수밖에 없었으니, 바로 ‘소피아’와 ‘헤레나’ 때문이었다.
그날은 어김없이 내일로 다가와 있었는데, 오늘의 나는 밤잠을 설치며 숙고를 계속하고 있었다. 정작 보고 싶었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고 엄마의 손 냄새가 베인 여러 가지의 음식들만이 엄마를 대신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여동생 ‘루시아’와 가까운 친구들 하며 그 뒤로 수줍게 서 있는 ‘소피아’까지 모두가 반갑고 고마웠지만, ‘소피아’의 화사한 얼굴만이 내 눈에 들어옴은 숨길 수 없는 마음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나의 시선은 면회장 이곳저곳을 살피며 혹시나 와 있을 ‘헤레나’를 찾았었는데 그때까진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러기를 얼마 후,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내 이름 호명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저쪽 켠 안내데스크 옆에서 나를 찾고 있는
‘헤레나’를 발견하고 반가움 반, 당황스러움 반으로 전전긍긍하기 시작했고 그러나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참 이게 무슨 꼴인가 싶기도 하면서 이 지경을 만든 나 자신이 너무 미웠고 두 여자에 대해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하여간 그때 그 일을 어떻게 진정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은 없으나 첫 면회의 기쁨은 고사하고, 그날을 생각하면 내가 참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어디로 없어지고 싶기도 했다. 다행히 그 후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날 저녁 야간 불침번 교대근무를 위해 막사를 나가는 나에게 전해진 불룩한 편지봉투에서 나온 사연은, ‘헤레나’의 심정을 고하는 장문과 함께 나와의 영원한 안녕을 말하고 있었다. 차라리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려니 할 수도 있었으나 이렇게 끝내야만 했던 내가 원망스럽고, ‘헤레나’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또 한 사람과의 이별은 나를 더욱 야물게 만들어 세월의 때는 야금야금 내 피부로 달라붙고 있었고 그 두께는 점점 더 두꺼워지고 있었다.
총 62주 교육 훈련 기간 중, 약 반을 소화한 우리들은 어느덧 거의 짐승이 되어 야간훈련은 물론이고 몇 날 몇 밤을 자지도 않는 걷고, 뛰고 하는 거의 인간의 한계점에 준하는 최고의 훈련을 감당하고 있었다. 특히 생존술이라는 특수한 훈련은 적지에 고립되었을 시 그곳을 탈출해 아군 진지로 복귀하는 기술을 의미하는데, 식량도 주지 않은 채 자급자족으로 버티면서 시간 내 우리 캠프로 귀대해야만 하는 힘든 훈련까지도 우리는 잘 견뎌내고 있었다.
이외의 제반 훈련은 시간이 해결해 주면서 우리 모두는 육군 소위의 그 다이아몬드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서며 이제 거의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육군 장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젊음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보고 끊임없이 전진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1972년. 2월 25일 아직도 쌀쌀한 경북 영천의 바람은 그날도 여전히 차가웠고 임관식은 엄숙하고 간략하게 치러지고 있었다. 밥풀떼기 하나를 달기 위해 계속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우리는 그날만큼은 긴장을 풀고 젊음을 만끽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소피아까지 나를 축하하기 위해 와 주었고, 나는 또 다른 세계와 마주하며 영천을 떠나 강원도의 모처를 향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6. 군 장교 하나
오랜만에 찾은 경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니까 2004년 전후의 무렵이었으니, 15년 전쯤 되었나 보다. 당시 모 레미콘 생산업체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한수원에서 발주한 원자력 발전소 건설현장의 레미콘 공급업체 현장소장으로 이곳 경주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었으니, 짧지 않은 세월이 참 많이도 지나간 셈이다.
‘경주’라고 쓰인 이정표를 따라 오른쪽 도로로 진입을 하니, 커다란 한옥식 지붕 밑으로 아담하게 꾸며진 톨게이트가 우리를 반겨주고, 하이패스 구역을 통과하여 조금 지나니 확 펼쳐지는 들녘의 싱그러움이 코끝으로 스미어 든다. 오른쪽으로는 경주의 남산이 그때나 지금이나, 늘 그 모습 그대로이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전보다 많이 세련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깔끔했다. 최근 지진이 지나갔다는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도시는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관광도시의 면모를 보란 듯이 과시하고 있었다.
버스 기사의 설명을 들으며 도착한 곳은 불국사 근처의 ‘김동리 박목월 문학관’이었다. 역시 한옥으로 지어져 古都다운 냄새가 물씬 풍기고 향토색이 베인 실내는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으며, 잘 보관된 유품들과 초고 원고들도 가지런히 잘 정돈된 채로 우리를 맞아 주어, 그분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글을 쓰고 시를 읊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진데, 그 많은 언어들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다루어,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감흥과 깨달음을 선사했던 두 분의 해맑은 그 영혼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다가온다.
성선설과 성악설을 두고 볼 때, 작가나 시인들의 그 순수성을 볼라치면 성선설이 맞는 것 같고 사회의 좋지 못한 악습들을 보면 또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해 도무지 혼란스럽기 조차하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관장님의 간단한 문화 소개를 끝으로 우리는 그곳을 벗어나 원래의 목적지인 한수원 본사로 향했다. 날씨는 청명했으며 덥지 않은 태양이 빛나고 있었고, 토함산 중턱을 향하는 버스의 엔진 소리도 경쾌하게 들려 덩달아 우리들 마음까지 가벼워지고 있었다.
결코 가볍지 않았든 47년 전의 영천에서의 그 고된 훈련과 뼈를 깎던 고통의 결과는, 너무나 초라했다. 1972년 겨울 끝자락에서 건져 올린 것이라고는, 이마에 달랑 붙은 ‘다이아몬드’ 하나였을 뿐. 62주 동안의 고된 훈련과 뼈를 깎아내던 묵직한 고통의 대가로는 너무나 미미했었고, 부추기는 시대의 장단에 춤추던 우리들 자신들도, 우리가 불쌍하고 하잘 것 없는 존재들인지를 그때는 아무도 몰랐었다.
1972년 2월 25일. 그날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으며, 중요한 내 역사의 일부가 되는 바로 군 장교로서의 첫발을 디디는 날이었다.
한 달간의 꿀 같은 휴가는 물같이 금방 흘러갔고, 이제 물도 설고 낯도 익지 않은 미지의 세상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친구들도 모두 군 적령기를 맞아 육군으로, 카투사로 공군으로 각각의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오랜만에 찾은 교정에는 쓸쓸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조금은 더 희끗희끗해진 교수님 몇 분들만이 나를 보고 겸연쩍게 웃고 있을 뿐 옛날의 그 싱싱하던 생명력 같았던 젊음도 웃음도 낭만도, 다가오는 봄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곳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는 ‘허 베드로’의 영혼은 잠시 보류되면서 듣기에도 거북한 ‘허소위’만이 존재함을 나 스스로 다짐하기도 했다. 이제 사랑하는 가족과 ‘소피아’를 뒤로하고 나는, 강원도 하고도 첩첩한 산골마을 ‘서석’으로 향하기 위해, 낳아주고 길러주고 키워준 대구를 떠나고 있었다.
그때가 4월 초쯤이었으니 남녘의 꽃망울은 이미 터트려져 꽃 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강원도 횡성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함박눈을 맞으며 부대로 향하고 있었다. 공업전문대 졸업생답게 나의 병과는 ‘공병’이었고, 동료인 ‘서소위’와 ‘김 소위’는 같은 대구 출신이었으며, ‘조 소위’는 서울 출신으로 호리호리한 몸매가 영락없는 서울깍쟁이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단 본부 인사장교의 안내로 단장에게 전입신고를 마치고, 이미 발령이 난 예하 대대로의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서소위’는 제일 벽지인 홍천군 서석면으로 이동해야 했으며, ‘김’과 ‘조 소위’는 이곳 군 소재지에 위치한 대대에서 근무케 되어 각각의 길로 우리는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1972년 당시 전력수급 사정은 썩 좋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대도시에서조차도 盜電이 성행했고, 일반가정에서는 밤새 전등을 켤 수 있는 경제적인 여건도 되질 못하는 실정이었는데, 시골의 사정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으며, 더더욱 강원도 면소재지는 아예 관공서 외에 전기 공급은 꿈도 꾸지 못하는 처지였다.
드디어 도착한 ‘서석’은 암흑에 싸여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얕은 잠에 빠져있었다. 횡성에서 버스를 타고 ‘안흥과 청일, 갑천’을 거쳐 서석에 이르게까지 무려 2시간을 이동해 왔는데 도착한 그 시간은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면소재지 전체가 조용하고 침묵에 빠져있었다.
우리를 마중 나온 선배장교의 안내를 받아 미리 부탁해 뒀던 하숙집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그 서글픔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었으며, 그나마 찾아 들어간 그 집도 호야불로 어둠을 밝히고 있는 답답한 실정이었다. 첫날밤을 암흑과 궁금함과, 설렘으로 잠을 설친 우리는 이튿날부터 젊은 장교의 특징인 순발력으로 이 모든 것에 대해 빠르게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내 나이 23세의 봄은 이렇게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당시 병사들의 나이는 평균 27-8세로, 많은 사람은 30세 이상도 있고 결혼한 아이 아버지들도 수두룩해, 귀때기 새파란 소대장이 그들을 다루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노련한 대위급 중대장들조차도 부하 통솔에 애를 먹고 있어서, 대대에서는 신임 소위들만이 그들의 군기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매년 정기적으로 배출되는, 신임장교들에게 은근히 기대고 있는 실정이어서, 우리들을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대대는 한동안 신임 소위들의 독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고, 병사들의 긴장감과 함께 얼어붙은 분위기는 한참 동안 이어져, 우리들의 존재감은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70년대 당시에는 군대생활의 대부분은 일제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답습이 계속 세습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획일적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고, 비상시나 전시를 대비한다는 미명 하에 폭력적으로 또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지시하는 상관이나, 받아들이는 부하들이나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일고의 변명이 통하리라고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왜’라는 단어는 서서히 없어지고 ‘네’ 또는 ‘알겠습니다’ 만이 존재하는 그야말로 목적만이 있을 뿐 그 방법론은 무시되기가 일쑤였다. 그것은 장교 간이건 사병 간이건 불문율로서 지켜지고 있었고 일반화되어 있었다. 이것은 사관생도로서 교육받을 때나, 장교로서 실무부대에서 실제 업무를 담당하고 있을 때나 똑같았다.
박정희 군사정부의 모든 제반 행정이나 업무는 군에서 행해지는 것을 그대로 가져와 답습했던 관계로 일반 관공서의 업무도 거의 군과 같은 지침이나 내규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목적이 우선되는 시대에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각종 부조리와 비리가 판을 치면서 목적을 위한 그 방법이 설사 불법이라 할지라도 묵인되고, 용인되던 시대였고, 이러한 시대사조는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어 말할 수 없는 혼란과 불안으로 고조되어 선량하게 살아가는 대다수의 선민들을 허탈감으로 빠지게 했으며 이러한 구조 속에서 군 생활을 시작한 나는 또 한 번의 불행한 시대를 맞고 있는 셈이 되고 있었다.
내가 속한 제1중대는 대대의 선임 중대로써, 중대장은 갑종간부 출신인 ‘반 청하’ 대위가 중대장이었고, 나는 제2소대 소대장으로 보임되었다. 나 외에 ROTC 출신 ‘김 소위’가 있었는데, 한양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경남 의령 사람이었다. 이외의 하사관(요즈음 ‘부사관’) 여러 명이 장교를 보좌하며 각각의 위치에서 중대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해 1972년 11월 21일 실시된 소위 ‘유신 헌법안’이라 불린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는 독재의 상황에서 벌어진 최악의 부정투표였었다. 나는 군내에서 공공연하게 또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부정투표를 직접 목격까지 했으나, 결국 침묵으로 동조까지 하고 말았으니 결국 나도 그 공범임이 틀림이 없었다,
우리가 배우고 추구해 왔던 민주주의는 독재자의 횡포로 유린되고 짓밟혀 그 싹부터 말라 버리고 없었다. 국민들은 개돼지에 불과하여 “배불리 게 먹여 줄 테니, 찍소리도 하지 마라” 며 우리는 먹고 잠만 자빠져 자는 짐승에 불과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이를 보고 있던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기도 했으나 허공에 맴도는 메아리에 불과했었다.
중대에서 반대표가 1표라도 나오면 그 중대장은 물론이요, 대대장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아예 공문으로 작성되어 예하 부대로 하달까지 할 정도이니, 그 뻔뻔함에 놀랄 뿐이었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국민들을 깔보면서 함부로 하는 경향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도대체 100% 찬성이 어느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인가? 그때는 있었다. 부정으로. 언젠가 이승만 정권처럼 무너질 날이 분명히 올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지 않았던가?
이듬해 봄. 우리 중대는 ‘내촌-김부리’ 간 전술 도로 공사에 투입되어 野地로 파견됨과 동시에 천막생활로 접어든다. 막사 동은 모두 6개 동으로, 각소대별 1 개동씩과, 중대본부 1개 동 창고 1개 동으로 편성되어 산막 생활을 하며 장비와 더불어 도로를 개설하기 시작한다.
당시의 박정희 정권은 국민들의 먹거리 해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인권문제로 미국과의 관계도 매끄럽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국은 국내 반전주의자들의 여론에 밀려, 미국 젊은이들의 희생을 줄이고자 선언한 ‘닉슨 독트린’으로 20년 가까이 끌어오던 ‘베트남’ 전쟁에서 서서히 발을 빼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 미국은 우리에게 파병 요청을 하게 되고, ‘박정권’은 이러한 기회를 경제성장의 호기로 삼는 동시에,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에 따라, 1964년 7월 의무중대 130명 파견을 시작으로, 1965년 3월 비전투요원인 비둘기부대 2000명을 파병하더니 그해 10월에는 전투부대인 해병 청룡부대 1개 여단을 파병하기에 이른다. 1975년 종전 시까지의 한국군은 32만 명이 파병되어 5,100여 명의 사망자를 내며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희생에 따른 우리에게 돌아오는 경제적인 효과는 적지 않았음은 사실이다.
종전이 되며 철수되던 장비나 물자의 대부분은 한국으로 반입되어, 헐벗고 굶주리던 우리 국민들에겐 일자리와 그 ‘인프라’ 구축의 기초가 되어, ‘박정권’ 유지 수단의 호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반입되는 최신형 건설장비들은 우선 군에 투입이 되면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강원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술도로 개설에 역점을 주게 된다.
이러한 군 계획에 의해 우리 공병대대의 할 일은 더욱더 많아지게 마련이었다. 우리 중대는 상부 지시에 따라 정해진 공기를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쉼 없는 공사는 계속되었고 어느덧 계절은 여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여름이 막 시작되는 6월 6일. 나는 이때껏 겪어보지 못한 한 사건을 경험한다.
7. 군 장교 둘
새벽 공기가 이젠 제법 쾌적하다. 이웃 동네 응암동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고, 어슴푸레한 보라색 미명 아래 많은 건설 노동자들의 발걸음 또한 바빠지기 시작한다.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하는 그들이 이 나라를 지탱해 가는 척추요, 등뼈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누군가는 받쳐주어야 할 그들의 가정과, 우리 모두를 위한 그들의 노력은 오늘도 어김없이 부산하게 이어진다. 그 무리에서 과거의 나를 발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젊은 시절의 모습은 바로 현재의 그들의 모습이니까 말이다.
미사 중 잠시 그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며, 과거의 나를 반추해 보기도 했다.
오늘 강론 중 ‘성찰’이란 단어가 유독 귀에 머무른다. 미래를 위한 우리들의 노력은 현재 진행형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그 focus는 오직 미래에로만 지향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과거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진실을 외면한 채, 거짓과 변명으로만 일관하는 이웃 나라의 예만 보드라도, 우리에겐 성찰이란 바로 미래로 가는 첫걸음임을 잘 알려주고 있다.
과거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우리 크리스천들의 모습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제의 잘못된 습관이나, 행동들을 아직까지 버리지 못함을 시작으로, 또한 나로 인해 상처받은 이웃의 상흔을 살펴보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은 그분에게 용서를 청해야 할 일이 분명함인데도, 느끼지 못하고 지나치는 우둔함까지, 우리는 돌아보고 살펴봐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은 존재들이 아니던가?
성찰 후 반성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거듭 다짐을 해보지만, 우리는 또다시 그 일을 반복하고 있지 않는가? 뻔뻔함까지 곁들인 우리의 몰염치는, 그분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실로 두렵기까지 하다.
칭찬에 목말라하지 말고, 비판과 핀잔에 익숙해지고, 꾸지람에 귀 기울이는 우리가 될 때까지 끊임없는 담금질로 더 다져가야 할 것이다
깊은 강물은 소리 없이 그리고 조용히 흐르는 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어떤 그릇에도 담길 수 있는 물처럼, 낮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내려가는 내가 되게 해달라고 오늘도 감히 빌어볼 뿐이다.
타인들의 잘못에 눈감았던 나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나도 그들과 함께 공범이었음을 고백해 본다. 열심히 새벽을 열어가는 그들 보기가 심히 부끄러운 아침이다.
1973년 6월 6일. 현충일이다. 모처럼의 휴식을 맞이하는 중대원들의 표정은 밝았다. 추모의 날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병사들의 관심은 지급되는 특식과 주어지는 자유 시간, 그리고 모처럼 즐길 수 있는 회식과 유흥 시간이 더 기대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아침부터 쏟아지는 햇빛은 텐트 막사를 서서히 달구기 시작하더니 회식이 막 시작되던 11시쯤에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워져 모두가 헉헉대며, 막사에서 나와 산그늘을 찾게 된다.
그러나 젊음의 열기를 식히기엔 산그늘도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으며 가둬놓은 정열을 발산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라면 더 이상 필요할 게 없었다. 그들은 젊음이 있기에, 쏟아내지 않으면 폭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언제든지 보유하고 있었다. 군대란 특수조직에서는 상존된 폭발력은 전쟁 시에는 그것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지만, 평화 시에는 그것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지가 지휘관들에겐 충분한 당면과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날의 사고는 어쩌면 미리 예견된 일임에도 우리의 무관심 속에 소리 없이 우리 주위를 옥죄어 오고 있었다.
시작은 술이었다. 당시 강원도의 인기 소주는 단연 ‘경월’이었고, 그 알코올 포화도는 꽤 높아서 나처럼 술에 익숙하지 않은 놈은 단 한잔만으로도 나가떨어지기에 충분했다. 군대의 항고 뚜껑 한잔은 지금 소주잔으로 서너 잔이 될 정도로 양이 많았다. 회식은 알코올의 흡입과 함께 점점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더위와 젊음과 알코올의 삼박자는 중대 전체를 녹일 듯이 달궈내며, 급기야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선임하사가 권하는 단 두 뚜껑의 술에 휘청되게 되고, 이내 막사 안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반 기절 반 잠으로 헐떡거리다가, 마침내 병사들의 떠드는 소리를 꿈결에 들으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야 만다.
얼마나 지났을까? 목마름과 함께 눈을 뜬 나는 주위의 웅성거림과, 어수선한 분위기에 뭔가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되고, 좋지 않은 어떤 일이 발생했음을 예감하고 사태 파악에 나서게 된다.
3소대 소속이었던 ‘지기동’ 상병의 앓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막사는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옆 동의 조그마한 소리조차도 바로 들릴 정도이며, 옆 3소대 막사에서 들리는 ‘지상병’의 앓는 소리는 그 목소리 자체가 조금은 특별하게 들렸던 게 사실이었다. 이어 보고되는 ‘김하사’의 진술에 의하면 평소에는 매사에 솔선수범하며 아래 부하들에게조차 존경을 받았고 대대로부터도 모범사병으로 표창까지 받았던 ‘지상병’이 술이 과했던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이를 제지하고 말리는 과정에서 소대 선임하사이던 ‘천중사’와 시비를 붙게 되고, 계급사회인 군대의 조직문화는 곧바로 ‘천중사’의 반격으로 이어지며, 하급자인 ‘지상병’은 ‘천중사’가 휘두르는 주먹에 땅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고 말았다 한다. 술이 취한 탓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천중사’는 넘어진 ‘지상병’의 아랫배를 군홧발로 다시 한번 밟아버려 그 충격으로 인해 ‘지상병’은 혼절하는 사태까지 가고 말았다.
또 마침 넘어진 곳이 중대의 식수 공급을 위해 파 놓은 샘터 주위로, 넘어지면서 하필 그 주위에 있는 돌무더기에 머리 부분까지 부디 치면서, 꽤 많은 피까지 흘렸다고 한다.
우리가 주둔하고 있던 곳은 대대본부와 멀리 떨어진 외진 곳 이어서, 이미 해도 져버린 캄캄한 밤에 대대까지의 이동은 사실상 불가능했었다. 중대장은 내일 아침 일찍 대대로 후송시킬 것을 결정하고, 중대에 파견되어 있던 위생병으로 하여금 ‘지상병’을 돌보게 함으로써 그날의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하고 있었다. 소대장인 나와 ‘김 소위’도 그를 예의 주시하며 그 밤을 거의 뜬 눈으로 보내고 있었는데, 밤이 깊어 갈수록 그의 병세는 더 심해져, 급기야는 온몸이 퉁퉁 붓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새벽녘에는 혼수상태까지 가고 말았고, 당황한 위생병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료지식을 총동원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나,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군홧발에 차인 아랫배의 충격으로 장이 파열되면서, 출혈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지상병’은 덤프트럭에 실려 대대로 출발하고, 우리는 침울한 가운데 그의 무사함을 빌며, 우리들의 일상으로 다시 복귀하고 있었다.
당시의 통신수단은 열악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나빴다. 중대에 비치된 무선 통신기는 월남전에서 미군들이 쓰다 버린 P-10 무전기로 그 성능은 믿을 수가 없었으며, 조금의 거리만 떨어져도 교신 불능 상태로 이어져, 인편이 동원되는 ‘파발’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되어 시간이 지체됨도 감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저녁 늦게 전해진 ‘지상병’의 소식은 우리 중대 전체를 Panic 상태로 몰아가고 있었다. 대대에 도착한 그는 후송 도중 이미 숨이 끊어져, 도착했을 때는 그 어떤 처치도 필요 없는 상태였다 한다.
대대는 물론이요, 상급부대까지 초비상이 걸려, 대대장은 사건 전모를 파악하는 등 뒤 수습에 동분서주하고 있었고, 우리 중대는 그야말로 초상집으로 변하고 말았다.
내가 죽음에 대한 것을 처음 접했을 때는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짧은 1학기 동안 친하게 지냈던 친구 ‘권상복’이는 여름방학이 끝났음에도 학교로 돌아오지 못하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었다. 짧은 인생을 살다 간 그를 나는 평생 잊지를 못함은, 어린 나이의 나에게 그 사건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고 죽음에 대한 나의 사고를 정립시키기에는 너무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대구 칠성동은 대구역 뒤편에 자리 잡은 동네로 무연탄 하치장이 가까이 있어서, 그 근처 땅은 항상 거무스름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큰 저수장이 있었고, 그곳으로 아이들이 많이 놀러들 왔으며, 저수장엔 항상 물이 가득히 담겨 있었다. 그 물은 가까이 있는 무연탄 탓으로 항상 시커먼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상복‘이는 그물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 한다. 참으로 어이없는 그의 죽음은 그 가족들은 물론이겠지만, 그것을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 않나 싶었다. 꿈과 희망과 전개될 앞으로의 미래를 향할 그 나이에 느닷없이 달려든 죽음의 그림자는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일임은 분명했다.
그 5년 후 다시 맞이하는 우리 대부님의 죽음 앞에서 나는 또 한 번의 ‘상복’ 이를 만나게 된다.
중대의 모든 업무는 중단되고, 우리는 바로 사태 수습에 돌입하게 된다. 당시 군내부에서 발생되는 모든 사항은 보안 사항으로 철저한 비밀유지는 물론이고, 언론의 접근은 아예 봉쇄되고 있어,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할 수 있는 여건은 얼마든지 상존하고 있었다. 그 사건을 조사하는 보안대, 헌병대도 결국은 군인들이므로 군사정부 시절의 관공서를 비롯한 모든 기관은 군의 통제하에 움직인다 해도 과언이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단장을 비롯한 대대장. 중대장까지 참여한 비상회의가 소집되고, 그 결과는 중대장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달된다. 그 사건에서 핵심적인 폭력행위를 감춘 나머지의 시나리오가 짜이고 우리는 연기자가 되어 각자의 배역으로 배분되고 있었다.
‘지상병’의 시신은 연병장 천막 안에 안치되었고, 가족들의 확인을 위해 기다리는 동안 불침번이 천막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 덥던 여름의 폭염은 천막 안의 온도를 급상승시키기에 충분했으며, 더위와 함께 진동하든 그 역한 냄새는 정말 참기 힘든 고역이었다.
며칠 후 도착한 가족들의 시신 확인도 그렇게 끝나고 사건은 서서히 종결의 절차를 밟고 있었다. ‘지상병’의 아내는 지난번 휴가 때의 합궁으로 배가 이미 불러 있었으며, 큰애는 그때 5살쯤 돼 보였는데 아빠의 죽음도 모른 채 그 여름의 더위를 용하게 잘 참고 있었다.
그동안 보안대로, 헌병대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었던 ‘천중사’는 대대와 중대의 방호막 속에서 보호를 받으며, 그 어려운 인생 여정의 터널을 힘겹게 빠져나왔고, 우리 중대는 잠시 동안 숨 고르기로 들어간다. 그 이후 그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고 종결된 지는 모른 채, 우리 중대는 근 1년간의 야지 생활을 다른 중대에 인계하고 대대본부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
그들 고인의 가족에 대한 연민과 미안함과 자책감도 세월의 조각배에 실려 시야에서 사라지고, 이제는 그 흔적조차 희미해질 때쯤 나는 대대 작전 장교로 보직을 변경받아 중대를 떠나 S-3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때 나는 이미 진급하여 중위가 되어 있었고 작전 과장은 공교롭게도 대구 출신의 ‘우수성’ 소령이었다. 그는 대구 ‘성광고’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군 장교로 입대했었는데, 전형적인 아부형으로 나와의 충돌은 잦았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하느님에게 고백할 또 하나의 큰 죄악을 품에 안고 있는 가운데, 1974년 가을은 붉게 타고 있었고, 나는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아직 헤매고 더듬기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해 겨울 나는 ‘전역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8. 전역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나무에 나쁜 열매가 열린다. 오늘의 복음 말씀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 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우리의 속담과는 그 뜻이 차이가 나는 듯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의 근본인 그 뿌리에 관한 얘기일 것이다. 좋은 뿌리는 훌륭한 나무를 키워 양호한 열매를 맺게 함으로써, 수많은 생명체들에게 좋은 영양분을 공급하여, 사회를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들지만 나쁜 뿌리의 열매가 이 세상에 끼치는 해악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고, 그 영향으로 인한 세습되는 피해까지를 감안한다면 실로 그 피해는 생각보다 더 지대하다 할 것이다. 선은 착함이요, 듣기만 해도 기분 좋고 산뜻한 느낌의 이 단어는 위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기분은 더러워지고 공기는 탁해지는 느낌이다.
위선은 거짓 착함을 말함인데 열매로 치면 나쁜 열매에 속한다 할 것이다. 우리는 선에 관해선 좋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행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또 각자의 모든 사람들도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잠재성을 항상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를 가장한 위선에 우리는 너무 쉽게 속으며 살고 있다. 오늘의 현실은 내가 가진 개념 자체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순수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선이든, 위선이든 행하는 그 의도를 주의 깊게 관찰해 볼 일이다. 여기서 의도란 나무뿌리에 해당하는 근본을 말함이다. 행하는 사람의 목적에 따라 선과 위선은 구분되며, 파생되는 여러 가지의 결과는 좋은 열매 혹은 나쁜 열매로 갈려지게 마련이다. 내가 행하고 있는 봉사나 선행이, 처음 내가 시작할 때의 그 의도에서 벗어나지는 않는지 가끔 뒤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그 순간 나는 또 선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감을 느낄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그 의무는커녕 오히려 동조자로서의 범법행위가 나를 괴롭혔고, 그것은 두고두고 회한의 눈물로, 나를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지상병’의 사건은 내가 임관한 이후 꿈꾸어 왔던 장교 생활에 대하여, 큰 지각 변동으로 작용하기에 이른다. 불과 3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에 겪은 군 생활의 혐오감은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 나 자신이 점점 헤어날 길 없는 수렁으로 빠지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도 모른 채 시류에 편승하여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는, 실로 알맹이 없는 껍데기와 같은 삶을 무기력하게 이어가고 있었다.
면소재지에는 몇 개의 주점이 있어, 젊은 장교들의 解憂所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는데 나는 자주 이곳을 방문하여 내 젊음을 무한정 반납하곤 했었다. 때론 때 묻은 풋사랑 같은 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정체성에 반하는 내 행동에 스스로 침을 뱉기도 하면서 깊고 깊은 자학의 늪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비정상의 시대에 만연된 부조리 하며,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는 이 시절에,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알기에 더욱 비감해하며 세월을 낭비하고 있었다.
시작이 정당하지 못했든 정권이 그 권력 유지를 위한 몸부림은 사회의 곳곳에서 불협화음과 부조리를 양생 하고, 급기야는 파국의 집단으로 추락하고야 만다는 결론은 이미 예고된 수순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하숙집 아줌마 ‘승렬이 엄마’는 전형적인 여필종부의 아낙으로 작은 덩치에 곱상하고, 전형적인 한국 아줌마였었다. 그녀에겐 우리보다 조금 위인 큰아들 ‘승원’이와 초등학생인 둘째 ‘승렬’이가 있었는데 우리들은 그녀를 ‘승렬이 엄마’로 부르고 있었다. 승렬이 아버지는 요즈음 말로 ‘백수’였으며 아줌마가 운영하는 하숙집에 기대어 무위도식과 고주망태의 조합 품으로 그 역시 나처럼 세월을 낭비하고 있음이 똑같았다. 그 아줌마는 그냥 생계유지형의 하숙 아줌마이기도 했지만, 우리에겐 엄마와 같은 존재로 항상 따뜻한 미소와 포근함으로 우리를 대해주었고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밥을 챙겨 주는 정 많은 아줌마였다.
나와는 같은 천주교 신자라 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어 나 또한 스스럼없이 그분을 대해 왔었다. 면에서 부대 쪽으로 조금 나가면 천주교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때 당시 그곳에는 ‘오스트리아’에서 파견된 외국인 신부님이 계셔서 나는 가끔 그분과 교분을 쌓으며 미사에 참례하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아줌마와 같이 미사를 보기도 했었는데 신심 또한 돈독하여 나는 마음속으로 그분을 내 신앙의 멘토로 삼기도 했다. 일찍 돌아가신 내 대부님 덕분(?)에 영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냉담을 하며 헤매던 내가, 잠시 하느님에게 돌아오게 해 준 것도 바로 그 아줌마였다.
고주망태와 무위도식을 일삼는 남편에게 조차도, 일언반구의 불평 한마디 없이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아줌마의 모습이 때론 답답해 보이기도 했으나, 바탕이 착하디 착한 그녀는 천사 그 자체였었다.
하느님은 진짜 야속하게도 그런 분을 내 곁에서 거두어 가시기로 작정을 하셨는지, 어느 날 들린 소식이 나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폐결핵 말기.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그분의 생은 그렇게 마감되어야 하나 싶어 비통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그 소문은 하숙집 전체로 삽시간에 퍼져나가 하숙생들을 술렁이게 했고, 야박한 인심은 어김없이 그 모습을 보이면서, 하숙생들은 하나 둘 하숙집을 떠나가기에 이른다. 그때만 하더라도 폐병이라 함은 바로 죽음과의 등식으로 연결되던 때 인지라 떠나는 사람들을 야박하다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나는 아줌마의 진정한 충고로 그 집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후 들려온 아줌마의 사망 소식은 인생의 허무함을 다시 한번 내게 안겨주었고, 나에게는 제3의 ‘상복’이가 되어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1975년 봄, 작년 연말 처음으로 제출한 ‘전역 지원서’가 반송 처리되어 돌아왔다. 이유인즉, 의무 복무 기간이었다. 국가에서 비용을 부담하여 장교를 육성했는데 최소한 5년은 근무해야 한다는 육군 내규에 따라, 1977년 이후에나 가능하며, 현재로서는 ‘사고’로 인한 전역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다 한다.
짧은 기간 동안 내가 겪은 군 생활은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적폐로밖에 생각되지 않았고, 더 이상 현재의 상황을 끌고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고’를 위장할 방법도 내겐 없었기에 답답한 시간을 하릴없이 보내고 있었는데, 육군본부에서 날아온 회보에 ‘항공장교 모집’ 이란 낭보가 보였다. 지원 자격 조건은 충분했고 영어시험과 체력검증만 통과하면 무난할 것 같은 예감에, 선뜻 지원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그 일을 진행시키기로 결정했다.
서울로의 출장을 몇 번 거듭한 끝에 최종 시험을 통과한 후, 나는 당시 조치원에 위치한 ‘육군 항공학교’에 입교하게 된다. 그때가 1975년 여름 끝자락쯤 되지 않나 싶다. 입교 전 ‘소피아’와 보낸 며칠간의 휴가는 환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생애 최고의 휴가였든 것을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비행기를 조종한다는 것을 나는 전혀 꿈꾸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나의 3 사관학교 졸업앨범에 나와 있는 프로필 난에 기재된 장래희망은 ‘한국 최초 우주비행사’로 되어있다. 그만큼 그것에 대한 열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큰애가 항공대 ‘운항학과’를 졸업한 것도 이와 무관 치는 않다. 하여튼 나름의 희망을 가지고 조종훈련에 임했던 나는 그동안 불만으로 일관했던 군 생활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능동적인 동참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며 관숙 비행을 시작으로 짜인 일정에 따라, 무리 없이 조종기술을 소화하고 있었다.
당시 배정된 비행기는 요즈음은 전쟁 기념관에서나 볼 수 있는 O-1 기종으로 관측기에 불과했다. 날개가 고정되어 있다 하여 ‘고정익’이라 불렀고, 헬리 콥트는 프로펠러 자체가 날개이므로 ‘회전익’이라고 불렀다. O-1기는 주로 포병 관측용으로서 관측장교가 탑승, 공중에서 포사격 지점을 관측하여 지상 포대에 그 위치를 알려주기 위한 구식 비행기로, 이미 현장에선 철수되어 교육용으로만 이용되고 있었다.
총 약 40주쯤의 교육 기간 중 반쯤의 기간이 끝나고 교육의 정점인 Solo비행도 거의 끝날 무렵, 나에게 날아든 소식이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하고 있었다.
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그 시절은 소위 ‘연좌제’라고 하는 고약한 것이 존재할 때였다. ‘연좌제’란 범죄인과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연대책임을 지게 하고 처벌하는 제도를 말함인데, 여기서 말하는 범죄인이란 주로 좌익분자나 간첩 등 이념 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개인 신원조회 등에서 밝혀지는 여러 가지의 문제들은, 선민들을 옭아매는 방법으로, 이 법을 이용하기도 했었다.
특히 조종사들은 이 점에서 당국의 감시하에 수시로 그 사상을 점검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수시로 발생하는 조종사들의 항공기 동반 월북 사고를 막기 위해서도, 더욱 그러하였다. 실제 당시에도 발생한 수건의 월북 사고는 조종 교육을 받고 있든 우리들에게도 그 영향이 미쳐, 우리들의 사생활은 보안요원들의 중요 사찰대상이 되고 있었다.
전방 근무 때 저질러 놓은 나의 피폐의 파편들이, 이렇게 큰 바위덩이가 되어 나에게 덮치리라 곤 상상도 못 했는데, 그 상상을 뛰어넘은 비창이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곳 전방에서 알고 지냈던 몇 명의 여인들로부터 날아들던 편지들이 오는 쪽쪽 보안대의 검열 대상이 되어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보안 요원들의 학교 방문은 잦아지며 학교에서조차 나에게 경고를 몇 번 하더니, 급기야는 퇴교의 수순을 밟는 순간까지 오고 말았다.
누구를 탓 하리오. 내 탓 이오를 아무리 외쳐도 나의 갈 길은 빤히 보였고, 나는 또 한 번의 좌절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돌아온 기간 부대에서의 나의 근무는 빠질 대로 빠져버린 내 영육 간의 피로감이 말해주듯 매사에 의욕은 없었고, 어서 빨리 이 지옥 같은 군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나의 뇌리를 파고들 뿐 아무런 희망도 없는 허허로운 세월만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연거푸 제출한 ‘전역 지원서’ 덕분인지 내년 진급 대상자 명단에는 아예 내 이름은 없었고, 나는 이제 버린 자식으로 취급되어 떠날 날만 기다리는, 쓸모없는 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침 부대의 조직개편에 따라 나는 서울에 위치한 ‘도하단’에로의 전출명령을 받고 1976년 겨울 서울에 입성한다.
그해 봄 ‘소피아’와 이미 결혼식을 올린 나는, 8월에 태어난 큰아이를 부둥켜안은 채 대한민국 수도 ‘서울’ 시민으로 입경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엄마 아빠가 되어있었으며, 나는 가장으로서 어깨가 무거워짐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이듬해 5월 31일 5년간의 지긋지긋한 의무 복무기간을 뽀 도시 채운 나는, 원래의 내 자리를 찾기 위해 사회로 복귀하게 된다. 내 나이 28세 되던 해의 여름 초입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