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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카도 May 16. 2023

통제감의 위로


  친구 H는 입맛부터 취미까지 꽤나 많은 취향이 나와 겹친다. 한번은 H와 함께 간 연희동 돌솥밥집에서 도미 솥밥이 나오길 기다리며 각자 열심히 하고 있는 운동 얘기를 한 적이 있다. H와 나는 당시 요가와 필라테스를 하고 있었다. “왜 운동을 하느냐?”는 내 질문에 대학원 석사과정이던 H는 본인이 쓰는 석사논문 주제를 잊기 위해 운동을 한다고 했다. H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나는 생각을 그만하기 위해 운동을 한다고 했다그리고 우리는 대화를 이어 나가며 세상에 우리 맘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내 몸만은 온전히 내 의지대로 움직여 준다는 통제감에 위로를 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언가를 통제하고 있는 감각에서 즐거움과 만족감을 느낀다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때내 일상생활을 건강하게 유지할 때더 나아가서 인간관계가 내 생각대로 흘러갈 때많은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때하다못해 방 안의 물건이 제자리에 위치할 때에도 마음은 한결 평온해진다하지만 통제에서 느끼는 감각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평온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다루던 통제감이 나를 찌르기도 한다분류학에 있어서 큰 발자국을 남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우생학을 근거로 사회적 약자들을 궁지로 몰아넣으며 "통제감"을 느꼈다. 그가 통제에서 오는 만족을 느낄 때 누군가는 인생을 통째로 관통하는 트라우마를 얻었고,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일상 생활에서의 통제감을 완전히 잃어버려 우울증을 얻었다.


  우리 인생은 우리 뜻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고고개를 들어보면 목적지라고 믿었던 종착점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으며삶이라는 기차는 목표를 잃고 그냥 달리고 있을 뿐이다나는 사범대를 졸업하고 임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울증을 얻었다. 정신과를 처음 방문할 때의 불안은 의사 선생님의 진단으로 확신이 되었고, 내가 글러먹은 인간이 아니라 단순히 병에 걸린 것에 안도했으나,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와 같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이 병은 몇년째 내 인생에 들러붙어 신경줄을 야금야금 좀먹고 있다.


  약물 치료에 한계를 느낀 나는 상담센터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나는 인생 전체에서 통제감을 상실했다는 기분에 크게 좌절한 상태였다수업 시간에 자거나 집중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으면 수업이 내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괴로웠고동료 교사들과 대화할 때 내 의도와 무관하게 상황이 흘러갔다는 생각에 힘들었으며삶의 경로가 내 뜻대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내 인생인데도 당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게 누군가가 고심해서 하나하나 설계해둔 덪처럼 느껴졌다.


  몇 번의 상담을 나눈 뒤에야 나는 비로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통제하려고 너무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이유는 내 수업이 때문이 아니라 그냥 잠이 부족했거나단지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뿐이라는 것동료 교사들과의 얘기는 그들의 머릿속에 그렇게 중요한 얘기로 남지 않는다는 것통제해야 한다고 믿었던 대상은 나의 통제 밖에 있으며내가 하는 행위들은 사실 큰 의미가 없고 타인의 삶에 그리 많은 영향도 비중도 차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위로가 되었다인간은 우주에서 먼지 보다 작은 존재이며 지구에서 인간들이 지지고 볶는 과정은 먼지끼리 얽히고설키는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우울의 구덩이에서 꺼내주었다. 통제를 포기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자유로워졌다.


  아직도 예상치 못한 통제 불가능한 사건과 대화가 나를 우울로 잠식할까봐 노심초사하곤 한다반대로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울때 조차도이 기분이 언제 진창에 처박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에 떨게 된다그리고 이런 우울불안평온함즐거움의 주기가 길고 질긴 인생 전체에 걸쳐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도 든다그럼에도 나는 통제 불가능한 인생을 살면서 내 팔과 다리등과 목을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감각으로 하루를 견뎌내고그래봤자 인간은 우주의 먼지라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으며 살아갈 것이다지면을 딛고 선 나의 두 다리로 오늘 하루도 잘 건너왔다고 스스로를 칭찬해 줄 것이다.


  마침내 돌솥밥집에서 도미솥밥이 나왔을 때, H와 나는 손으로 주전자를 집어 들어 돌솥에 따뜻한 물을 넣고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입안에 한가득 넣은 뒤턱과 혀를 움직여 천천히 밥을 씹었다. 씹힌 쌀알에서 은근한 단맛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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