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이랑 나랑 - 철없는 이모의 간접 육아체험
결국엔 아빠였어
아이들이 한참 걷기 시작해서 자기 머리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시기. 그 시기의 아가들을 참 좋아한다. 말은 정확히 못 하지만 몇 가지 단어와 제스처로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시기. 정말 귀엽다. 그 시기 때 아이들은 나뿐만 아니라 다 예뻐하는 것 같다. 왠지 돌아보고 손이라도 흔들어 줘야 할 것 같고, 미소 짓게 해줘야 할 의무가 생긴 것 같은...
헌이도 그 시기가 있었다. 어르신들이 자식은 어릴 때 평생 할 효도 다한다 하시던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시키지 않아도 '이쁜 짓' 같은 걸 하며 손가락을 볼에 찔러대고, 기저귀덕에 한껏 업된 엉덩이를 흔들어가며 애교를 부리곤 했다. (지금은 13세다. 상상도 할 수 없다. 심지어 자기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우긴다. 하지만 너는 스마트폰보다 늦게 태어나서 증거가 많아.)
그런 이쁜 시기엔 어딜 가나 환영을 받았다. 특히 교회에 결혼 전인 청년 이모 삼촌들 눈에는 더 예뻐 보였던 것 같았다. 다들 한 번씩 안아보고 싶어 했으며 툭하면 인기투표의 현장이 펼쳐졌다. "헌아, 이리 와 봐" "아니야, 사탕 줄게 이리 와 봐" 다들 손을 벌리고 박수를 쳐대며 헌이를 유혹하려 애쓰지만 사실 답은 정해져 있다. 그 당시의 헌이는... 이모보다는 삼촌 쪽이었으며 특히 정장을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넘겨 빗은 삼촌을 좋아했다. 대단히 유혹이 될만한 과자나 사탕, 선물이 아닌 이상 변화는 없었다. 교회에서 인기 좀 있다 하는 삼촌들은 모조리 골라내는 능력이 있었다. 보고 있는 내가 민망할 정도로... 좀 프리한 스타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모든 삼촌이든 가리지 않고 안기지 않았다. 아... 이 녀석...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다 커버린 헌이와 자동차 극장에 갔다. 그런데 짝꿍의 실수로 우리 차가 방전이 된 것이었다. 어찌어찌 영화를 보고 자동차 보험 출동 서비스를 신청해 두었는데 내가 봐도 훤칠하니 너무 멋진 분이 오신 거다. 멋진 분의 도움으로 차에 시동이 걸렸고 집에 가는 길에 "근데 헌아. 아까 그 삼촌 너무 잘생기지 않았어?" 했더니 "으흐흐... 네... 멋있었어요." 하는 거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이 녀석이 이렇게 진지하게 호응을 할 줄이야. 심지어 집에까지 오는 길이 삼십 분 정도 소요됐는데 그동안 내내 그 멋진 직원분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평소에도 여러 주제로 대화를 시도하지만 이제 이런 주제도 통할 줄은... 짝꿍은 자기한텐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며 서운해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커버린 조카의 모습에 씁쓸해했다. 이 녀석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날 출동한 잘생긴 직원분에 대해 일기도 썼더라. 이 녀석... 내피는 한 방울도 안 섞였는데 내 맘에 쏙 들어... 아주...
근데 가만 보니 결국 이 녀석 자기 아빠를 좋아하는 거였다. 말은 늘 아빠는 별로라고 하는데 헌이의 아빠가 교회를 갈 때면 정장을 차려입고 머리도 꽤나 신경 써서 세팅하고 다녔다. 그리고 헌이의 아빠는 꽤나 패션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평소에도 깔끔하게 잘 꾸미고 다니는 스타일이다. 더더군다나 퇴근하는 헌이 아빠를 만났는데 그 보험사 직원분과 헤어스타일도 거의 비슷하고, 입고 있는 옷 스타일도 비슷한 거였다. 헌이한테 이 말을 하니 역시나 "아니에요. 그 삼촌이 훨씬 멋있어요. 아빠는 잘생기지 않았어요." 한다. 그렇지만 다 안다. 남자는 악기도 한두 개 이상 다뤄야 하고, 노래도 좀 잘 불러야 하고, 자기 일에 능력도 있어야 하며... 등등 늘 헌이가 읊어대던 이상형이 애초에 아빠라는 걸... 결국 딸은 아빠 닮은 남자 만난다더니... 근데... 너 너무 따지는 게 많고 기준이 높아. 적당히 좀 줄여보자. 그리고... 너무 잘생긴 것만 따지지 말자. 다 개성이 있는 것 아니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