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평소 나를 pc충이라고 부르는 친구가 pc (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의 끝에는 뭐가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당장 떠올렸을 때는 "무슨 상관이야"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 세상이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아무도 단절되지 않고, 모두가 연결돼있음을 당연시 여기는 세상이다.
어려서부터 아무것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기제가 있었다. 내가 비건 지향을 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고기를 먹던 어린 시절도 종종 왜 사람들이 동물의 신체 일부를 장식용으로 쓰는지 의아했다. 예를 들면 고양이 귀나 토끼 귀 머리띠 같은 것이 이상했다. 사람을 지배하는 외계인이 있어서, 사람이 귀엽다고 귀만 잘라서 머리띠를 만들면 소름이 끼칠 것 같은데. 비슷한 이유로 호피무늬의 옷이나 악어가죽 질감의 가방과 신발도 패션으로 소비되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에게 미약하게나마 동물과의 연결감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내가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해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밉지는 않았다. 다만 식사는 양해를 구하는 일이 되었고, 외로웠다. 폭력이 돈이 되는 세상에서 걷기만 해도 우울감이 발에 치였다. 언젠가 '먹자골목'을 지나가며 냉동고에 돼지머리와 마주쳤고, 필요에 따라 땅만 보고 걷는 습관이 생겼다. 집에 와서 걷는 내내 어금니를 깨무느라 턱이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동물성 상품. spc 브랜드. 남양. 스타벅스. zara. h&m 등등. 자본주의 사회에서 폭력이 연루되지 않은 소비를 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가, 뉴스를 찾아가면서 불매를 하지는 않지만, 일단 귀에 들어오면 불매를 안 할 수 없다. 특히 요새는 어딜 가나 있는 파리파게뜨와 그 가게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면 종종 무력감을 느꼈다. 지난 5월, 화섬 식품 노조 파리바게뜨 지회 임종린 지회장이 노동환경 개선 등을 요구하며 53일간의 단식투쟁을 했고 그의 체중은 20kg 넘게 줄어들었다. 소비자들 탓이 아니다. 다만 살이 되는 빵과 빵을 만들다 없어지는 살의 단절감이 괴로웠다.
많은 사람들이 비건을 육류, 해산물, 우유와 계란을 먹지 않는 식단 중심적으로 이해한다. 비거니즘에는 동물 착취를 기반으로 한 소비를 하지 않는 것도 포함한다. 따라서 꿀과 젤리(젤라틴 함유)도 먹지 않고, 동물성 가죽으로 만든 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동물실험으로 만들어진 화장품이나 그 외의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다.
가끔 디자인이 맘에 드는 비건 신발이나 가방이 해외배송을 해야만 살 수 있을 때가 있다. 해외 운반에 드는 에너지 소비량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했을 때 비건이라는 잣대 하나로 내가 지향하는 가치관이 실행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라테를 시킬 때 귀리 유나 두유로 바꾸면 종종 돈을 추가로 내야 한다. 한살림에서 장을 보면 유기농 식품과 나무상자로 포장된 복숭아를 살 수 있다. 비싸다. 폭력 (플라스틱) 이 연루된 유통, 생성과정의 비용이 덜하기 때문이다. 또는 어떤 가치를 지키는 데는 돈이 든다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세상을 바꾸려는 마음으로 삶의 양식을 바꾸면 진이 다 빠져버린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미리 사는 느낌으로, 선택권 행사를 고민처럼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죄책감이 아니라 연결감으로 움직이는 몸이고 싶었다. 폭력의 고리를 따라가는 시선에 지친마음이, 지키려는 마음도 연결돼있다는 것을 문득 자각했다. 나의 지난한 피로감이 사실은 어느 지점의 사랑의 순환점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