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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치 Sep 17. 2022

까먹지 말고 적어야지

윌은 내가 같이 협업하는 단체 중의 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지난 2년 동안 두 번을 제외하고 온라인 미팅에서만 마주쳤다. 온라인 미팅의 특성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카메라를 꺼놓고, 침묵이 잦은 환경 속에 윌은 적당히 썰렁한 농담으로 사람들의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그는 지금 근무하는 단체와 같은 캠페인을 이끄는 다른 단체에서 2년 전에 이직했다. 


오늘 캠페인을 함께 이끄는 모든 단체들이 모여서 앞으로의 정치활동의 방향성에 대해 의논했다. 잠깐의 휴식시간 동안 그가 전 직장에서 얼마나 일했는지 물었다가 그가 이직한 사연을 들었다. 


"남아시아 커뮤니티를 대변하는 단체에서 백인 남자인 내가 리더십 자리까지 승진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라서 이직했어." 그래서 그는 비슷한 일을 이직해서 하고 있다. 


개강 후 첫 수업을 2주 전에 했다. 맨 앞줄에 앉은 어떤 학생은 수업 내내 핸드폰을 보거나 엎드리거나 노트에 뭔가를 그렸다. 그는 4학년이었고, 말을 시키면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어폰을 끼고 있었으며, 자신은 친구가 없다고 말했다. 내가 매 수업마다 출석 확인을 할 것이라고 하자 들리게 한숨을 쉬었다. 


두 번째 수업 날 그는 역시 맨 앞줄에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가 누구보다 일찍 강의실에 들어와 맨 앞줄에 앉는 적극성(?)과 시종일관 냉소적인 태도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자신을 설명하는 세 가지 단어를 떠올리고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라고 했다. 모두가 짝을 지어 얘기하는데, 그는 이어폰을 낀 채로 노트에 그림을 그렸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모두가 이미 짝을 지어서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때 그의 옆에 있던 학생 둘이 같이 하자고 했다. 나도 꼈다. 한 명씩 차례대로 세 가지 단어를 말했고, 그의 차례가 왔다. 그가 말했다. "dumb, stupid, and slow." 


다른 두 학생이 당황했다. 나는 dumb과 stupid는 뜻이 겹치니 다른 단어를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때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한 학생이 외쳤다. "creative!" 이번에는 그가 당황했다. 


남은 수업을 진행하다가 누군가가 어떤 개념에 대해서 질문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 개념을 설명해 볼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이어폰을 끼고 있던 그는 자신의 노트를 넘기더니, 그 개념에 대해서 명확하고 알기 쉽게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얼핏 본 그의 노트에는 수업 내용이 정갈한 글씨로 필기돼있었다. 


나는 큰 소리로 그를 놀렸다. "너 아까 네가 멍청하고 느리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멍청하고 느린 사람이 설명을 이렇게 잘하냐, 이제부터 넌 이 수업의 조교야."


수업이 끝나고 한 학생이 교실을 떠나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는 내가 놀렸던 학생 얘기를 꺼내며, 그가 수업을 듣는 태도가 불량하다고 나를 위로하듯 얘기했다. "그 모습이 혹시 거슬리니?" 내가 묻자 그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 학생이 이어폰을 끼고 있는 것, 엎드려서 수업을 듣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잠시 나의 수줍음이 가장 뾰족한 모습으로 발현되었던 어린 날들을 떠올렸다. "그렇게라도 해야 그나마 그 자리에 앉아있을만한 거 아닐까? 난 걔가 편했으면 좋겠어.


본인을 설명하는 세 가지 단어를 떠올리는 것을 학생들은 생각보다 어려워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평소에 남들에게 들었던 말들을 떠올려보라고 했다. 어떤 학생이, "괴물처럼 역겹다."라고 말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누가 그런 소리를 했냐고 묻자, 엄마에게 커밍아웃을 했을 때 들은 말이라고 했다. 그를 섣불리 동정하지 않으려 애쓰느라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we accept you!"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동시에 같은 말을 외쳤다. 

 

괴물처럼 역겹다, 라는 말을 할 때의 담담한 얼굴에서 옅고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 


애들아, 계속 또 가르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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