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울 Feb 04. 2023

차갑지만, 따듯했던 기억의 조각.

월요일에는 산책을, <1100 고지>

산울 @mamadonotworry

 온화하고 따스한 섬 제주도. 한국의 어느 곳을 비교해도 평균 기온이 높아 온화한 기후를 갖고 있는 이곳에서 <눈>을 관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눈이 내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누구보다 먼저 차를 몰고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 1100 고지를 올라갔다.

 제주에서 만나는 설경. 한라산을 배경 삼아 내리는 어여쁜 눈송이를 잡아보았다. 온화하고 따듯한 감각이 손을 타고 올라와 머릿속 기억을 헤집기 시작했다.

산울@mamadonotworry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설경> 즉 모든 것이 눈으로 뒤덮여 얼어붙은 모습을 관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릴 적 네비게이션이 없어 대한민국 지도를 차에 하나씩 갖고 여행 다니던 시절, 그 당시에 아버지가 운전하시던 운전석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 꽤나 높아 보였던 것 같다.


 그렇게 지금의 시선보다 한참 낮은 시선으로 달리는 차의 창문 밖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서울에서 강원도로 가기 위해선 지금처럼 영동고속도로의 터널을 뚫고 가는 게 아니라 미시령, 대관령, 높디높은 태백산맥의 굽이길을 지도를 보며 다녀야 했다.


 어릴 적의 기억이지만, 휘영청 밝게 떠있는 달과 그 옛날 밤하늘을 가득 채웠던 무수한 별이 생각난다. 늦은 밤, 평소였으면 뒷좌석에 누워 쉬이 잠을 잤을 터이지만 고갯길을 넘어갈 때면 그들을 바라보며 머릿 속 작은 우주를 만들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무궁무진한 상상을 하느라 잠에 들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선, 차가 산을 오를수록,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온이 낮아진다는 것이 당연한 이치임을 알고 있다. 다만 어린 나에게 만화책에서 봤던 내용대로 자동차가 산을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차가워 진다는 것을 낡은 자동차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외풍이 확인시켜 주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동이 트기 전 새벽 무렵, 허름한 민박 혹은 산장 같은 곳에 도착하곤 아직 잠에 들지 않은 나를 바라보며 놀라시던 부모님의 얼굴이 아직 선명했다. 먼 길을 달려 도착한 그곳의 방바닥은 따듯했고, 화려한 눈깔사탕 같은 색들이 섞인 할머니 베개와 두툼하다 못해 무겁기까지 한 그 이불을 덮고. 금세 나는 잠에 들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었을까, 들었던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시골이었고, 강원도였으니까. 함께 주무시던 부모님께선 이미 밖으로 나가신 후였다. 눈을 비비고 안경을 찾아 썼다. 미닫이 문에 장식된 유리 모양 틈으로 아침 햇살이 뭉개져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미닫이 문을 열었다. 아마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며 밀어본 문 중에서 가장 부드럽고 매끄럽게 열린 문 일 것이다.


 방 안으로 따스한 볕이 쏟아졌다. 눈이 부셔 다시 한번 눈을 비볐다. 처음 보는 광경에 넋이 나갔다.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였다. 색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흰색으로 칠해진 것과 칠해지지 않은 것으로 세상은 이미 나뉘어 있었다. 극한의 대비 값을 갖고 있는 풍경. 그저 채도가 옅어진 서울의 모습만을 봤던 미천한 나의 눈은, 이 이미지를 뇌 속에 빠르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차가울 것만 같았던 쌓인 눈의 촉감이 따스했다.

RICOH GR3 / @mamadonotworry

 폐의 깊은 곳까지, 코 끝이 차가워질 때까지 크게 한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었다. 이 온도마저 기억하리라.

귀를 열었다. 어린 나를 부르는 부모님의 따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산중에서 고요히 퍼져나가는 그들의 음성.


 고개를 돌려 그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시골 정취에 어울리는 가마솥. 불을 쬐고 있는 걸까, 선명히 확인되는 가마솥 뒤에서 그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만 육안으로 그들을 볼 수는 없었다. 역 앞, 돌돌 말은 모자를 두른 이모님이 있는 만두집. 그 만두집의 뚜껑을 여는 것, 아니 그 이상으로 희뿌연 연기가 치솟아 올라 내 시야를 방해했다.


 산을 타고 울려 퍼지던 내 이름을 부르는 그들의 음성은 희뿌연 연기 너머 잔잔히 흩어져갔다. 다시는 이어 붙일 수 없게 산산조각 난 예쁜 도자기 그릇처럼. 치기 어린 마음에 엎어버려 흩어져버린 퍼즐 조각처럼. 신기하게도, 꼭 한 조각만 잃어버리고 도저히 찾을 수 없던 그 조각은, 제주의 설경을 배경 삼아 꼬옥 쥔 어른의 내 손에 한 줌의 기억으로 자리했다.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고, 기억하려 해도 더 이상의 기억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단 한 줌의 기억의 조각으로 무채색의 설경은 따스함으로 남아있다.


 아마도, 기억을 완성하고 싶어도 완성할 수 없다. 날카로운 한 조각의 도자기 파편만이 뇌리에 남아있다. 완성될 수 없는 퍼즐의 마지막 한 피스만이 내 머릿 속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희미한 연기 뒤편의 음성과 실루엣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중요하지 않아. 겨울은 계속 찾아오고, 세상은 계속 눈에 뒤덮힐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머릿 속 편린이 다시 한번 기억을 헤집겠지.'

RICOH GR3 / @mamadonotworry



작가의 이전글 물영아리 '-영아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