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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an 28. 2023

날의 찬가

나루시선, 59

날의 찬가


                      서나루



수련회를 가는 마지막 나이였다

밤에 양치 시간이 되고

수건 사이에 싸 온 면도기를 꺼냈을 때 여자아이들은

다시는 볼 수 없을 미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 와 너 면도해?


다른 성별에 대한 호기심이나

2차 성징 교육에서 말로만 듣던, 남자는 수염 난다는 사실을

눈 앞의 애한테 직접 보아서 신기했을까?

어른 취급에 마음 으쓱했지만


쉐이빙폼 한 통을 다 쓴 날

여지껏 듣지 못한 소리가 들렸다

손잡이를 거꾸로 쥐고 피부를 잡아늘인 채 턱을 긁어올릴 때 드드드득

찬 쇠가

살에 직각으로

결을 헤치며

짓누르며 거슬러오르는

피흐르지 않고

그러나 베는

칼이 아닌

날의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난

그 아이들, 내가 아니라 면도기를 보며 말했음을 기억해냈다

(모든 기억은 현재라는데)


- 와 너 이제

얼굴에 날을 대야 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얼굴에만 대겠니. 칼갈이집에 맡긴 식도를 찾아올 때마다

날을 수직으로 세워서, 온 몸 비질하듯 쓸어 보는데

자. 칼과 날이 뭐가 다른지 봐라.

보라고.


내가 쥔 것은 칼이 아니라 날이라는 통제감

칼은 토막내는 것이지만

날은 깎아내되 베지 않는 것

그 끝을 딛고 일어설 수조차 있는 것


날 - 덮쳐오는 유리 더미에 뻗으면

만화처럼 박살낼 것 같은 전능감

그러나 더 소설처럼, 교과서에 나온 헛소리 같은 절차대로

번쩍이는 춤

관혼상제의 춤 물음이 여쭘이 되고 우려가 진실이 되고 안부가 망각이 되는

무언가 경동맥 옆 5센티를 날아다니는 삶

미군이 보병을 일컫는 말 '소프트 타겟'

그 시뻘건 유부주머니에 대고 누르면 당첨된 자비처럼

날 - 깎아내며 미끌려 비켜주는데


승객에게 조금씩 매연 먹이는 디젤엔진 진동처럼

매 연말 더 슬퍼지는 혀 끝 샴페인 기포처럼

날 - 긁어 올리며 무어라 골에 울려퍼지고


미역처럼 자라는 사슬의 시간

쉐이빙 폼이 도랑 풀섶처럼 푸석이고

나는 칼잡이가 아니라 날잡이야, 날잡이라는 말이다

생채기 하나 없는 몸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계란 같은 내 턱을 움켜쥐곤 그아이 말하지


네가 칼에 재주껏 비껴서고

날이 네게 왜인지 미끄러질 때

네가 그것과 맞물린 톱니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니


아무것도 너를 부수지 못했다면, 네가 무언가를 부수고 있는 거야

뚫어내고 있는 이 광맥의 파동이 느껴지느냐고










Picture by Unsplash Mank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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