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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Aug 21. 2023

계시 - 열등감, 열패감, 조급함, 불만을 위한 에세이

"부조리한 것은 개별 사건이지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마음고생 하느라 정말로 수고 많으셨죠.


사실 이게, 우리가 위로 더 위로 성장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면 맨 처음에 맞닥뜨리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등감과 열패감, 그리고 조급함과 불만들이죠.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성취하고 어떤 좋은 자리에 올라서고 싶은 욕망이 그런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한번 생긴 마음은 나와 타인을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비교하는 마음은 수많은 "가짜 공정성" 들을 만들어냅니다.


제가 말하는 가짜 공정성이란 이런 것들입니다; 

쟤는 저 자리에 가면 안 되는데(그 대신 더욱 정당한 내가 가야 하는데), 

쟤는 그저 운으로만 저기에 올라갔네(나는 노력하는 사람인데), 

쟤는 가진 게 많네(나는 가진 게 충분하지 않네) 

와 같은 생각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은 물리적으로 사실일지라도, 근본적으로 허구의 판단입니다. 그 자리에 가면 안 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상황과 별 노력 없이 재산을 물려받아서 내가 혹은 무슨 복지재단이 썼으면 훨씬 값지게 사용했을 귀한 돈을 탕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그것들은 사회적으로 · 물리적으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내가 내 삶에 대한 불만으로서 이야기하는 순간 그것은 내가 내 삶에 진정으로 접촉하고 연결되는 것을 막아서는 허구의 논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 복과 불운들은 모두 나를 구성하는 유일한 하나의 축복들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로 살 수 있고 내가 오직 나의 방식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이 내가 이 세계로부터 받은 하나의 패키지에 빠짐없이 들어 있습니다. 


인생은 교체되지 않는 완전히 꽉 찬 한 줄입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좋은 일도 과거의 나쁜 일 이 아니었으면 생길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나쁜 일도 과거의 좋은 일 이 아니었으면 생길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결핍과 충만 · 성공과 실패들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지금 이 삶은, 완전히 모든 것이 서로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패키지일 뿐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 따로 떨어진 상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 개별 사건들에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 개별 사건들을 개선하기 위해서 피땀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어진 나의 삶에 불만 가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개별 사건들은 부조리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종종 아주 나쁜 일을 만납니다. 해결하거나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종종 아주 나쁜 사람도 만납니다. 그가 더이상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억제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 소송이나 무력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이 존재하더라도, 우리의 전체 삶은 부조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조리한 것은 개별 사건이지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안 좋은 사건들은 삶 바깥이 아니라 우리의 삶 안에 존재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 삶 바깥에서 일어난 일들을 하나라도 댈 수 있습니까? 우리 삶 바깥에서 사건이 일어났더라도 그것이 우리 삶에 들어오지 않은 한 그것은 존재한 적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 삶에 들어온 일들 가운데 우리가 조금이라도 통제할 수 없었던 사건이 존재합니까? 우리 삶에 들어온 일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던 일은 없습니다. 세계의 일들은 내 삶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에게 요리될 준비가 되게 됩니다. 


비록 그 요리가, 그 문제 전체를 찢고 박살내는 통쾌한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회운동가나 정치인이나 기업가도 문제 해결에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해결되지 못한 악연이 여전히 내 삶에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삶에는 여전히 결핍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목표는 그러한 모든 적대세력이나 부조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되기 위하여, 나만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그것들과의 긴장을 유지해 나가는 일입니다. 내가 그것들을 쉽게 꺾을 수 없듯이 나 역시 그것들로부터 쉽게 꺾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용기낸다면, 불만 있는 현실조차 나를 구성하는 삶의 부품들 가운데 하나임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자기 자신을 그리고 세계를 근본적으로 불만스럽게 여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린 왜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정말로 공정하고 정당하게, 어떻게 보면 사회주의적으로(저는 사회주의를 여전히 사랑합니다), 타인이 누리고 있는 저 대단한 영광과 독점자본과 일등석 티켓들을 나는 왜 가지면 안되는 것일까요? 당연히 가져도 됩니다. 그걸 가지기 위해서 살아가도 됩니다. 한 방에 갖고 싶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여전히 사회주의자의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서 저는 노동계급 혁명이든 공산주의 혁명이든 하겠다는 사람을 비난하지도 말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제가 짚고 싶은 것은, 혁명을 하네 마네가 아니라, 그 혁명을 원하는 마음의 진정한 동기입니다. 


당신은 타인의 재물을 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타인의 삶을 원하는 것입니까? 타인의 재물을 원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경제적 · 정치적 혁신의 동기이니까요. 할 수만 있다면 멋진 혁명도 해 보십시오. 현실적인 혁명이라면 세상이 수용할 것이고, 비현실적인 혁명이라면 세상이 거부할 것이니 어느쪽이든 괜찮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이 타인의 삶을 원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혼란과 파괴의 동기일 뿐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타인의 어떤 크고 멋져 보이는 것을 추구한다면, 똑똑해지고 싶어서 유능한 사람의 뇌를 끄집어내서 먹는 것과 같은, 파괴적이고 미신적인 '동종요법'을 감행할 위험에 처합니다. 중국의 정치 리더였던 마오쩌둥은 모두가 자신이 자라온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짐작합니다. 정치권력을 잡은 그는, 수백만 명의 지식인과 학생을 시골로 강제로 보내서 농사짓게 하는 '하방운동' 정책을 시행했고, 몇 년 후에는 지식인을 학살하고 지식문명을 말 그대로 불태우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정책까지 자행했습니다. 그는 타인의 삶을 가지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타인의 삶을 해체시키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지금 당신이 타인의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이 되고 싶어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재물이 아니라 추상적인 질투의 대상을 꺾어 가지고 싶어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꽃은 꺾는 순간 죽습니다. 당신이 살아있는 꽃을 가지는 방법은 스스로를 꽃피우는 것뿐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가지세요. 그러나 그것을 갖고도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나만의 삶으로, 나만의 방식으로 가져야 합니다. 내가 내 방식으로 타인의 것을 갖기 위해서는 나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곳에서 주어진 나의 삶을 어떤 신비로운 출발점으로 여기고, 불만 없이 출발해야 합니다. 지금 이곳에서 어떤 감정적인 동요와 못 받아들이겠다는 불만을 느끼면서 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되어가고자 하는 자기긍정, 내가 나의 출발선을 끌어안는 자기사랑을 누락한 채로 타인의 삶을 욕망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인의 욕망을 좇는다는 그 모습 자체가, 내 안의 아름다운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로서 출발하기 위해서는, 내가 내 삶의 형태로 계시받은 존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신에게 계시받은 것이 아닙니다. 신은 허구입니다. 그러나 계시는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계시는 하나의 벅찬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 자신으로 부름받은 하나의 계시임을 인정하는 그 벅찬 긍지는, 지금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아주 특별한 고유성을 음미하는 순간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계시입니다. 지금까지 이것이 계시라고 불리지 않았다면 지금부터 우리는 이것을 계시라고 부릅시다. 우리는 계시받은 사람입니다, 아니, 우리는 스스로의 이 신비를 하나의 목적성을 가진 계시라고밖에는 해석할 수 없는 가슴 벅찬 사람들입니다. 이 계시는 무엇을 위해서 누군가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곳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엄청난 전 우주의 단 하나뿐인 역사상 그리고 미래상 단 하나뿐인 이 하나의 운명과 특성과 인연을 타고 태어났다는 것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신비롭습니다. 이 신비에서 우리는 축복을 추론해낼 수 있습니다. 누가 나한테 줬기 때문에 축복이 아닙니다. 그냥 우연히도 축복이 생긴 것입니다. 그 아찔한 우연성이 우리를 한 번 더 충격받게 합니다. 이 어마어마한 축복에 비하면, 돈이 없거나 원하는 것을 아직 덜 가졌거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마음에 근심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그 모든 어려움과 결핍들은, 나만의 여정을 완성시켜 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신화의 설정이기도 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아무런 고통 결핍도 없다면, 우리는 타인은 커녕 나 자신의 어두움과 슬픔조차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둠과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삶은, '너무 지나치게 불운할 만큼 운이 좋았던' 역사 속의 수많은 사람이 증명해 준 바와 같이 인생을 얇고 납작하게 만듭니다. 그런 인생은 축복받은 인생이 아니라, 삶의 깊이와 신비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불운한 인생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100년에서 120년 사이에 '완성'되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대한 빌딩이나 재물을 소유했다고 한들 그것은 100년 안에 전부 반드시 끝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지배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배하거나 소유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생활인으로서 어느 정도 추구해야 할 목표이지만, 그것을 위해서 우리 삶이 너무 많은 시간을 쓰게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해롭기도 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시한부 인생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개별 사건에 다 만족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굴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당신의 삶에 싸움의 필요성이 있다면 싸우십시오. 욕망할 필요성이 있다면 욕망하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 되어도 다 좋습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진정 만족하기 위해서는, 할 건 다 하되, 그렇게 폭풍처럼 몰아치는 지금-이곳에 존재하는 나의 운명 전체를 놀라워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불만을 가지되 삶을 사랑하십시오. 불만이 있되 그 불만을 제기하는 자기 자신을 인정해주십시오. 


우리는 또한 내가 사랑한 이 운명으로, 이 버전으로, 이 특성으로, 이 캐릭터성으로, 이 부름받음으로, 이 계시받음으로 출발한 삶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쇼타임을 만들어내려는 일종의 쇼맨십을 가져야 합니다. 이 쇼는 자기 자신을 위한 쇼입니다. 세상에서 오직 자기 자신만이 공연하고 자기 자신만이 관람하고 자기 자신만이 진정으로 이해하고 만족할 수 있는 쇼입니다.


어려움과 축복을 동시에 받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계시입니다. 아수라장 같은 인간세상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인간 세상에 당장 잡혀가서 해체되어버리지 않았고, 여전히 살아 숨쉬면서 세상과의 긴장과 경계를 형성하며 꿋꿋이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계시의 증거입니다. 그 계시가 없었다면 우리의 삶은 개시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살아있음이 계시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중추신경계를 중심으로 조직된 상당히 이로운 우연을 통해 시작했고, 그것을 거의 뭐 '계시'라고 이름붙여도 충분할 만큼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뭘 해야 될 지 알고 있을 겁니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 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자신이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최고의 행운이고 축복입니다. 그 행운과 축복보다 더 이루기 쉬운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자신만이 진심으로 상처받은 고뇌로부터 계시를 얻고, 우주에 단 한 번도 밝혀지지 않았던 어떤 시야를 밝히는 자신만의 관점에 긍지를 느끼십시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성공과 실패 너머로 가서, 우주에 단 하나뿐인 가치로운 축복을 완전히 끌어안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사진: UnsplashBarna Ková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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