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찾아왔다면 훈련 시작이다.
옛 연인과 관련있는 동네에 오게 되었다. 나로서는 처음 와 보는 장소지만, 이곳이 그 사람과 관련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와의 온갖 기억들을 마음 안에 불러일으켰다. 거의 다 잊었다고 생각한 사람이고 옛날처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진흙 아래 밀봉되어 천 년 가까이 빨갛게 익어 있었던 난파선 속 곶감처럼, 나를 버린 그에 대한 원망과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회한, 그리고 모든 가장 밑바닥의 그리움은 그 사람의 배신을 마치 엊저녁에 접한 듯 강렬하고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개펄에서 발굴한 천 년 전의 시뻘건 곶감은 당장이라도 입에 넣어야 할 것 같았다. 이 곶감은 음식이라는 생각, 이 원망과 그리움은 실재하는 나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지난 이십여 년의 습관과 경로를 따라 마음을 지긋이 밟고 지나갔다. 이 감정이 참으로 익숙한 것이고…, 굉장히 오랜만에 겪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 생각이 고통이 되기 직전, 그 고통으로 인도될 내 삶과 처지에 대한 해석의 길목에서, 나는 오래전 사랑의 박탈로 거의 죽을 뻔 했을 때 그 갈랫길에 내가 심어놓았던 작은 신호등을 보게 되었다.
고통이 느껴진다면, 거기서 멈추라는 신호였다. 빛을 돌이켜 자기 내면을 비춘다는 회광반조(回光返照)의 빛이었다. 과거에 나는 정말로 죽을 것 같은 외로움과 비참함에 시달릴 때마다 마음 길목의 곳곳에 그 신호를 심으면서, 언젠가 이 빛을 본다면 갖춰야 할 행동수칙을 훈련했다. 그것은, 그 신호등을 보면 즉시 멈춰서서, 내가 삶의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분명히 확인했던 그 정리(Theorem)를 기억해내는 것이었다. 나는 스스로 훈련한 대로 행동했다.
"고통은 사건에 대한 나의 해석이 맞다고 집착하면서 생긴다."
"고통과 슬픔은 그것이 나에게 진짜로 일어났다는 임의적인 믿음을 통해서만 실제 고통과 슬픔이 된다."
"유일하게 실존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지금 나는 실제 그가 아닌, 내 머릿속에 창조된 그에 대한 생각에 고통받는 중이다"
"모든 인연은 시절인연이므로 오고 떠남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훈련은 작동했다. 이 충격적 고통이 스스로 만든 해석의 감정적 결과임을 기억해내고, 그 마음의 느낌을 해석 행위가 당연히 초래하는 표준적 반응으로 바라보았다. 그 멈춤과 객관화 덕분에 나는 고통의 문턱 바로 앞에 멈춰서서 그 아래 검은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객관화했을지라도 아픔이라는 경험 자체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 사람 생각이 나는 순간 가슴을 때리는 시커먼 통증은 존재했고, 그 중 일부는 순간순간 구체적인 원망과 상상으로 비화하면서 익숙하고 끔찍한 고통을 일으켰다. 나는 이 문턱에서 다음 훈련 동작을 실시헀다. 우선, 내 마음의 중앙처리장치에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억울함", "상대방에게 나의 정당한 몫 요구 요망" 등의 해묵은 보고서를 반려 처리했다. 이것은 내 해석에 불과하고, 철지났으며, 상대방에게 청구할 수 없는 해석이란 코멘트를 적어 돌려보냈다. 고통을 억울해하는 순간, 그 고통이 사실은 내가 만들어낸 해석의 감정적 결과라는 것은 자동으로 망각된 채, 그 해석할 만한 일을 만들어낸 타인을 원망하게 된다.
나는 내가 배신당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신당했을 때 분노했고, 아파했다. 나는 내가 (당시) 연인의 가장 각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기대가 깨어졌을 때 상처받았다. 나는 내 연인이 나에 대한 사랑을 거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일이 벌어졌을 때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내 연인이 냉혹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분노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이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었고, 그렇기에 나의 책임이었다. 자의적인 해석이었고, 임의의 세계관이었기 때문에.
나 또한 배신당해도 된다. 왜냐하면 배신이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나 또한 하찮은 대우를 받아도 된다. 왜냐하면 하찮은 대접이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나 또한 환승이별 당해도 된다. 사랑을 빼앗기는 일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나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 쓰레기 같은 놈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지켜봐도 된다. 그 인간이 쓰레기라는 건 나의 해석이므로. 나 또한 성격 안 좋은 사람 사랑할 수도 있다. 누군가의 안 좋은 성격을 무릅쓰고 사랑하게 되는 현상은 이 세계에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해석으로서의 불행을 넘어, 인간이면 누구나 공감할 객관적 불행이라 할지라도, 불행한 일은 일어난다. 불행에 나만 면역이어야 하고 예외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내겐 무엇이 반드시 되어야 할 이유도, 내겐 무엇이 반드시 안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모든 고통의 원천은 세상의 실제 면모(제법실상, 諸法實相)와 직접적으로 연동되어 있지 않은 나의 소망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그 소망에 대한 나의 움켜쥠에서 연유한다. 어떤 헬리콥터는 제 자리에 착륙하고, 어떤 헬리콥터는 제 자리에서 이륙한다. 그런데 나는 어떤 헬리콥터가 절대 착륙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내려앉으려는 헬리콥터를 몸으로 떠받치려 하다 뭉개졌고, 어떤 헬리콥터가 절대 이륙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상승하는 헬리콥터를 끌어내리려 하다가 관절이 빠졌다. 이륙하는 헬리콥터는 날아가게 두어야 하고, 착륙하는 헬리콥터는 내려앉게 두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가끔 잊곤 했다.
헬리콥터는 종종 유쾌하지 않은 장소에 불시착한다. 나에겐 그것이 오늘이었다. 마침 일 때문에 그 사람과의 이야기가 얽힌 장소에 와버렸고, 그에 관한 강렬한 기억과 회한과 그리움과 원망이라는 해묵은 해석이 루어낚시처럼 딸려나오면, 놀라운 통증이 덮치고, 나는 허둥지둥 자아가 만들어낸 자동화된 허구와 전투하며 해석의 충격이 치고 간 가슴을 글쓰기로 지혈하는 것이다. 그러나 괜찮다. 이 모든 일들은 일어날 만한 일이기에 일어났다. 사랑에 배신당하는 일도, 분노하는 동시에 그리워하는 일도, "그 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후회하는 일도, 어쩌면 그 일 덕분에 다른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리화하는 일도, 이 제한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세상에 늘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내가 고통받더라도, 이 세계에 객관적으로 새롭게 등장하거나(막아야 하거나) 퇴장하는(붙잡아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사건은 자신의 확률에 따라 일어나고, 모든 결말과 치유는 자신의 타이밍에 따라 찾아온다. 그 사이에 좋았다가 나빴다가 슬펐다가 기뻤다가 하는 것은 나의 마음뿐인 것이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 시간은 흐르고 있고 /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는 가수 이소라의 노래는 이런 측면에서 진실을 비춘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종종 찾아오는 고통은, 세상의 진실을 나름의 해석을 가미하여 옮겨놓은 내 생각 속 세상에서의 마음 대응 훈련이 시작되는 사이렌 소리와 신호 불빛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이 시작된다면, 훈련도 시작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 훈련상황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나는 내가 고통받았다고 해석하고 있는가?"
"나의 고통과 슬픔을 붙잡고 그게 내게 진짜로 발생한 일이라고 여기는가?"
"지금 이 순간이 아닌 과거나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 사람에 관한 이런저런 상상이나 해석을 하면서 고통받고 있는가?"
"내게 필요한 사람이 반드시 그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절대로 안 될 것이라 고집하고 있는가?"
"삶 전체를 다 알지 못함에도 그 일은 해롭고(해로웠고) 그 반대의 일은 좋은(좋았을) 거라고 분별하고 있는가?"
훈련이 거듭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충격과 고통에 대한 우리의 대응 능력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진다(제행무상, 諸行無常)는 점에서 좋고 나쁜 일은 평등하지만, 그 이전에, 나쁜 일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훈련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좋은 일과 동등하기도 하다. 훈련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을 좋은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고통이 찾아왔다면 훈련 시작이다.
Photo by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