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ero Jun 04. 2024

36년 만의 이사

2024년 5월 31일. 대구 본가가 36년 만에 드디어 이사를 했다. 88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이사를 와서 여태까지 사셨으니 칠순이 넘으신 아버지도 반평생을 한 집에서만 사신 거다. 36년이라니, 무슨 일제치하 36년도 아니고 너무 비현실적인 숫자다. 여름엔 덥고 겨울에는 추운데다 손주들까지 열 식구 전부 모이면 다 같이 앉기도 힘든 이 좁아터진 집에 언제까지 사실 거냐고 제발 이사 좀 가시라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잘 기억도 나질 않는다. 분양받으신 아파트 신축공사 첫 삽을 뜨기도 전부터 대체 입주는 언제 할 수 있는 거냐고 그날이 오기는 하는 거냐고 툴툴대며 이삿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마침내 그날이 왔는데, 넓고 쾌적한 아파트로 가셨는데, 이제 더이상 본가에 가도 모기 물릴 걱정 없는데, 속이 다 시원할 줄 알았는데, 막상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또 무슨 변덕일까.


내가 '고향'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4동 어느 골목길에 위치한 은색 대문의 단독 주택이다. 대구 신세계 백화점 맞은편으로 예쁜 카페와 맛집이 즐비하고 술집과 음식점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와중에 골목 안쪽으로 백 미터만 들어가면 마치 타임슬립이라도 한 것처럼 90년대에 머물러 있는 오래된 주택가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곳이 내 마음의 고향이다. 처음 그 집으로 이사를 간 것은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지금은 노인들만 사는 동네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동네 골목길에는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1학년이 한 반에 50명씩 9반까지 있었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할 정도였으니까. 숨바꼭질, 얼음땡(우리 동네에서는 얼음쨈이라고 했다), 땅따먹기, 비석치기에 아이들은 해질녘까지 지칠 줄을 몰랐다. 우리 옆집에 엄청 무서운 할아버지가 살았었는데 해가 지고 나서도 너무 시끄럽게 떠들고 놀면 창문을 열고 무섭게 노려보며 우리를 쫓아 보내곤 하셨다. 그런다고 굴할 아이들이 아니다.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는 또다시 골목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돌아보면 순수하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내 방은 두 평이 채 되지 않았다. 고작 20평 남짓한 공간에 방 세 칸과 거실, 부엌, 화장실까지 구겨 넣다 보니 구색 맞추기로 억지로 끼워 넣은 세 번째 방은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겨우 들어가고 나면 앉을만한 공간도 없었다. 그곳이 고등학교 3학년까지 내 보금자리였다.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집을 떠나기 직전 1년간은 집은 거의 잠만 자는 곳이었는데 그때의 습관이 남아 있는 건지 지금도 대구 본가에 가면 그렇게 잠이 쏟아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누나도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것을 보면 수맥이 흐르는가 싶기도 하다. 아마도 여기가 내 집이라는 편안함이 대구를 떠난 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무의식에 남아 있는 거겠지. 나의 치열한 10대를 함께 했던 내 방은 내가 서울로 떠나면서 쓸모가 사라져 버려 부엌과의 사이에 있던 벽을 헐고 부엌으로 연결해서 썼다. 냉장고 두 대와 김치냉장고 한 대로 꽉 차 버리는 손바닥만 한 부엌 한 쪽 공간이 원래는 아빠의 방이었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모른다. 


처음 이사 갈 때는 2층은 물론 1층 작은방까지 세를 주어서 한 지붕 세 가족이었고, 한동안은 대학생이었던 작은아버지께서 작은방에서 같이 사시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누나가 결혼할 무렵 2층까지 우리 가족이 쓰기 시작했는데 그 덕분에 식구가 하나씩 늘어나도 그럭저럭 한 집에 모일 수 있었다. 열 식구 모이면 2층은 늘 아이들 차지였다. 어른들끼리 티타임이라도 가질라치면 2층에서 쿵쿵대는 아이들의 발소리에 집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걱정하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추억이 되어 버렸다. 이사 간 아파트에서는 이제 더 이상 쿵쿵대며 뛰어다니지 못한다. 


내가 이리도 섭섭한데 아버지 마음은 오죽하랴. 이제는 알 것 같다. 이 집이 아버지에게 어떤 의미인지.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시작해서 드디어 내 집을 장만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마흔이 넘어 아이 둘의 아빠가 된 이제는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한다. 그래도 집을 팔아 버린 것은 아니니 그나마 허전함이 덜하시지 않으실까 싶다. 빈집으로 스러져 가지는 않아야 할 텐데 오래된 주택이다 보니 세입자가 잘 구해지지 않는가 보다. 이 집이 바로 서울대 의대생을 배출한 명당이라고 소문내면 세입자가 쉽게 구해지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 본다. 


이번 주말에 대구 가면 대문 밖에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와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학술대회에서 글쓰기 강의를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