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민들레는 민들레>
나는 나, 너는 너 <민들레는 민들레>
시흥에 있는 고등학교 학부모 특강을 했는데 그 주제는 “책으로 크는 나”였다. 독서 소통법과 비경쟁 토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는 담당 선생님과는 달리 학부모회에서는 좀더 부드럽고 편한 분위기에서 고등학생을 둔 학부모의 고충을 얘기하는 시간이었으면 했다. 저녁 시간 총 7분이 참석했고, 1학년과 2학년 3학년을 둔 분들이었다. 책으로 크는 나에게는 아이들도 있지만, 나 지신도 있음을 미리 말했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어떤 아이로 컸으면 좋을까?”생각해 본적이 있는지 질문드렸다. “배려심이 많은 아이,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 아이, 균형감 있는 아이,”등 지금의 아이에게 기대하는 바를 말씀해 주셨다. 한 분이 나에게 강사님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아들이 현재 고3이고, 중3이라는 얘기를 서두엔 한 터라 비켜갈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궁금하다고.
나는 어떨까? 아이가 고3이 되면서, 그동안은 공부를 안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남은 시간동안 공부를 해주길. 아이에게는 “조금만 하면 되”라는 말로 용기를 줄려고 했다. 1학기가 지나고 2학기가 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입시에는 손을 놓은 채인 아이를 보면서, 내가 그동안 너무 무관심했나하는 자책을 하기도 했다. 내가 조금만 관심을 더 썼더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세상이 큰 아들같은 아이에게 어떤 말을 퍼붓는지를 너무 잘 아는터라. 입시를 앞둔 고3학부모의 불안감을 나도 느꼈다. 물론 미약하게. 어릴 때는 너무 유순해서 걱정이었던 큰 아이는 초등3학년을 넘기면서 자기 주장이 강해졌다. 아이의 급작스런 의문은 나를 당혹스럽게 했고, 정답을 주기 위해 허둥되었다. 지금에서야 정답이라는 것이 있을까 싶지만. 나름 노력하면서 느꼈던 나의 뿌듯함은 아들이 중학교를 올라간 이후 심한 죄절감으로 뱐질되었다. 해도 안된다는 생각, 왜 다른 애들은 잘도 하는데, 이렇게까지 반항적이며 공부에 관심이 없을까라는 생각들.....불면으로 이어지는, 새벽에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일어날만큼 아들과 나의 균열은 중학교를 지나는 내내 이어졌다.
아, 좀 수월했으면, 이 시간이 무사히 지나갔으면 하는 생각들이......
나는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지라는 질문에 이제는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고 답을 했다. 예전에는 아이에 대한 수많은 기대들과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정말 분명했다. 내가 못한 것을 아이는 다 이뤄주기를. 아니면 내가 했던 것 중에 정말 즐거웠던 것들을 아이가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고 갈등의 시간을 몇 년 보냈다. 요즘은 아이와 곧잘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는 쉽게 어떤 것에 대립하지는 않는다. 물론 때론 많은 것들에 생각이 다르지만, 예전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날카로운 눈초리를 하거나 날선 말들, 차마 주워담지 못할 말을 하지 않는다. 아이가 이제 성인의 길목에 들어선 나이라는 점도 있지만, 나 자신이 상장했다는 것도 우리 관계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어린 아이에게 “너는 이 좋은 환경에서 왜 못하니?”라는 말로 힐난했다. 나는 못한 것들을 “너는 뒷바리지 해준다는 데, 게을러서 못하는 건 아니니”라는 말을 붙여서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이와 도덕적으로 사사건건 부딪쳤고, 비도덕적인 아이의 언사에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라며 되묻곤했다. 아이와 보낸 시간 동안을 돌이켜보니 내 인생의 불안한 변곡점도 보였다. 어린시절 나의 결핍을 아이를 통해, 아이에게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좀더 강했고,열심히 했다. 아이들에게 곧잘 했던 말이 “이를 악물고”였으니.
어느 날 아이가 “엄마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직접 하라고”했을 때, 나는 멍해진채 할 말을 잊었다. 그런거였지. 알고 있었으면서. 부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내 아이’라는 생각에 잊어버렸던 진실이 그제서야 기억났다. 교육은 존재가 존재로 이르느 길이라는데, 나는 아이에게 무엇을 배우라고 했고 얻으라고 했을까. 자기 존재를 부정당하면서까지 배워야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돌이켜보니 나도 어린 시절 외모, 성적, 가정환경, 경제 사정으로 존재를 부정당하기도 하면서 이름없이 살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았는데. 그 중간 과정없이 아이에게 내가 이룬 성과만 알려주는 전단지의 역할만 했단 말인가하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옛 어른들처럼 “살아보니 말이야”라는 이야기를 곧잘 하게 된다. 예전에는 그 말들이 잘 와닿지도 않았고, 어른들의 젠체처럼 들려서 싫었다. 내가 그 말을 하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을 줄이야. 나로 산다는 것의 고민은 내가 누구인가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내가 어떤 인간인 줄 모르는 데, 나 자신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은 실체없는 연기같은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건 아이도 같은 상황일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잊고 있었다. 성공스토리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아이에게는 강요나 따라갈 수 없는 이야기였음을 돌이켜보았다. 나 자신도 수많은 실패를 거치면서 겨우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 가고 있는데.
김장성 작가가 글을 오현경 작가가 그림을 그린 <민들레는 민들레>는 아무 곳에나 피는 민들레의 한 살이를 그린다. 봄이 되면 노랗게 피어 걸음을 멈추게 하거나, 걸음을 멈출 만큼 화려한 아름다움은 없는 민들레. 김장성 작가는 담벼락에 핀 민들레를 보고 이 작품을 생각했다고 한다. 어디서나 피는 민들레. 책 속에서는 잊지 말라고 주문을 외는 것처럼 “민들레는 민들레”가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민들레는 민들레, 어디서나 민들레는 민들레. 민들레는 민들레......희준이는 희준이. 희준이는 희준이....희승이는 희승이....희승이는 희승이. 혜령이는 혜령이......혜령이는 혜령이. 세상의 많은 것들에 부정당하지만, 결국 민들레는 그냥 민들레라는 것을 ,지금 이 모습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책을 덮으면서도 마음에 새긴다. 책의 면지에 있는 아이들의 얼굴처럼, 책은 우린 그냥 존재함으로써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존재의 가치는 얼마나 잊기 쉬운가. 그래서 잊어 버린채 윽박지르고 닦달한다.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아들에게 오늘은 꼬옥 안고(다 큰 아들은 몸을 빼겠지만)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다. 이만큼 까지 자라느라 애썼어. 넌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나를 꼬옥 안아주면서 “넌 지금도 잘해오고 있다고. 앞으로도 잘 할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때론 그런 시간은 얼마나 부족한가.
특강을 마치면서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사랑할 수 있도록, 삶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시라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나도 오늘은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