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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May 21. 2021

당혹

저 멀리 구름이 가네요

 종일 비가 온다고 했었다.

 창 밖으로 내다본 하늘은 흐렸다. 그렇다고 비가 마구 쏟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른 무더위가 가실만큼 가는 물방울이 흩뿌렸다. 좋은 날이라 생각했다.

 안내보다 길이 더 막혔다. 도시와 도시 사이의 어딘가를 지날 무렵에는 빗줄기가 거세졌다. 길은 온통 빨간색으로 가득했다. 쉽게 나아가지 못했고 비가 왔다. 무섭게 내렸다. 안내대로 잘 가고 있었는데, 문득 그 길이 아니라 했다. 그전에 빠졌어야 했나 싶었지만 분명 다른 길은 없었다고, 기억을 되짚으며 생각했다.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에 못 보고 지나칠 리 없었는데.

 디카페인 음료를 주문하였는데, 투명 플라스틱 잔의 스티커에는 디카페인이라는 말이 빠져 있었다. 똑같은 검은 물이라 주문이 맞게 들어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확인을 받자니 시간이 촉박하였다. 길을 잘못 든 탓이었다.

 지하를 빠져나오니 해가 쨍했다. 맑은 하늘이 더없이 신선했다. 길어진 해에 놀랐고, 말끔히 개인 하늘에 또 놀랐다. 파아란 하늘과 푸르른 잎새에 붉은 벽돌 건물이 멋들어졌다. 오래전 동경하던 곳이었다. 지금도 그 마음이 남아 있을까.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오늘은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다. 젊음의 한 복판이어서, 또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서, 어떠한 이유를 붙여 보아도 아무래도 좋았다. 철저한 외인이라는 점, 젊음에서 한 길 비켜나고 있다는 점에 위축될 법도 하였으나 나름대로 괜찮았다. 책이 한 권 있다는 점을 자랑으로 여겼다.  년 가까이를 매년 읽고 모으던 책이었다. 근래에는 뜸하였는데 꿈이 한 풀 꺾였다는 방증이었다. 그래도 며칠 전, 모처럼 혼자가 되어 거닐 적에, 이전 생각이 나 한 권 사 들고는 마음 깊숙이서부터 든든해하던 것이었다. 책의 첫머리부터가 동경하던 이름 그 자체였기에. 벤치에 앉아 가만히 책장을 열어 보았다. 예술의 역설을 젠더의 권력으로 풀어낸 것이 볼 만하였다. 대상 수상의 이유가 충분히 납득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다음 이야기가 펼쳐졌다. 장애와 동성애. 트렌드에 충실했다. 또 다음. 동성애와 젠더 혐오. 다음, 다음의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그만 책을 덮어 버렸다. 다양성과 천편일률을 다른 이름이 아니게 만드는 것도 엄청난 재주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동경하던 이름을 영영 얻을 수 없게 되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까닭은 잘 모르겠다. 오는 길에 들었던 라디오에서, 그들은 너무도 쉽게 책을 쓰고, 출판 기념회를 열 것이라며 쉽게 깔깔대었는데도.

 어둑하니 조명이 하나 둘 비추는 지경이 되었다. 갈 곳 없고 할 것도 잃어버린 철저한 외인이 되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대답할 말이 없어 나가려고 합니다, 하고 동문서답했다. 정원과, 벤치와, 연인들의 모습 너머로 구름이 붉게, 또 어둡게, 그리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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