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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Nov 29. 2023

전두광 부관참시

<서울의 봄> 후기 1편

 사극 팬에게는 연일 즐거운 나날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이 안방극장의 화제다. 극장가에서는 <서울의 봄>이 관객 수를 늘리고, 리들리 스콧의 <나폴레옹>도 곧 개봉 예정이다. 사극을 좋아하지만 잘 안 보는 편임에도 '이건 보아야겠다' 싶은 것이 줄줄이 이어지니 반가운 마음이다.


 잘 안 보는 편이라는 말에 설명이 필요할까. 역사를 전공해서ㅡ교만을 떠느라 사극을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되려 관심이 많다. 새로 사극이 나오면 대개 시놉시스를 찾아 읽어본다.  어떤 인물과 사건을 소재로 삼았는지,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져왔는지만 체크해 보아도 좋은 사극이 얼추 가려진다. 어찌 되었든 역사가 스포일러니까 사극의 결말은 다 정해져 있다. 그래서 알고 보아도 재미있을 만큼 소재가 매력적이어야 한다. 알고 보아야 재미있는 소재도 있다. 시놉시스를 읽으며 이 인물을 어떻게 표현해 낼까,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서 그려낼까 하는 기대감이 차오른다면 좋은 사극일 가능성이 크다.


 솔직히 대단한 전문가는 되지 못해서... 역사 지식이 그렇게 풍부한 편도 아니고... 왜, 인터넷에 보면 정말이지 디테일에 통달한 전문가들이 많다. 역사 전공자가 아니어도 수두룩하다. (가입 사실 만으로도 아내에게 두고두고 놀림감이 된 <대하사극매니아카페> 같은 곳에 보면) 두정갑이 어떻느니 의복 고증이 어떻고 환도의 패용 방법이 어때야 하느니 하는 걸로 댓글 토론이 오가는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르는 부분이다. 한참 열심히 공부할 때도 잘 몰랐다. 시대를 꿰뚫는 거시적인 관점에 소름 돋았던 경험이나 빠져드는 스토리텔링의 존재가 역사를 사랑한 이유였다. 외우는 것을 워낙 싫어해서, 유물 유적 이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슬쩍 발을 뺏던 기억이다. 아무튼 이런 '라이트 한' 시청자이자 관객인 내가 보기에도 지금 나오는 사극들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예를 들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이야기구조를 병자호란 상황에 치환한 <연인> 같은 것들 말이다. 표절이니 오마주니 이야기들이 있던데, 다 떠나서 그런 연결고리를 찾아 펼쳐낸 작가의 능력은 충분히 대단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보지는 않았지만.


<서울의 봄>을 보았다. 소재와 관련해선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다. 드라마 전체를 다 본 것은 아닌데, 12.12 쿠데타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편만큼은 모두 챙겨보았었다. 어릴 때라 세부적인 내용은 잘 모르면서도 두 가지 특징적인 장면은 기억에 남았다. 상황실 같은 데 둘러앉아서, 보고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반란 수뇌부의 퍽 지질한 모습. 명색이 군사 반란이라면서 왜들 전화만 돌리고 앉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두 번째는 그 유명한 장면. 아니, 형님은 또 왜 거기 계십니까? 황당해하던 장포스가 돌변하여 "반란군 놈의 새끼들"에게 "탱크를 몰고 가 대갈통을 날려버리겠다"고 일갈하는 장면은 정말 사이다였다. 어조나 표현은 달랐지만, 묵직한 일갈을 이반 영화도 잘 재현하고 있었다.

장포스 오오 장포스

 연기 잘하는 줄 알았지만 봐도 봐도 대단하다. 황정민 배우 말이다. 처음에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는 되었지만 비주얼이 너무 다른데, 싶었다. <제5공화국>의 이덕화 씨도 외향은 실존 인물과 전혀 달랐으니까 뭐 그러려니 했다. 아무리 대머리 분장을 한들 황정민은 황정민이고 전두환은 전두환이지, 했는데 웬걸. 전두환 그 자체였다. 얼굴이 닮고 목소리가 같고... 그런 게 아닌데, 그냥 전두환이었다.


 가명을 쓰긴 했지만, 영화적 과장을 위해 덧붙인 장면이 더러 보였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듯 사건의 큰 틀은 완벽하게 유지되어 파악하기 쉽게 잘 전달되었다. 설정이나 대사도 적절했다. 보통 사람 노태우의 "이 사람 믿어주세요"도 그랬고,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운운하는 전두환도 그랬다. 대사를 통해 5.16 쿠데타 때 육사 생도 모아 찬성 시위 한 공로로 눈에 띄어 박정희 키즈로 부상한 전두환의 내막도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전두환이 누구를 모델로 이런 겁 없는 짓을 벌였는지 영화는 여러 모로 잘 드러내 주었다.


 감독의 생각을 농축한 대사는 갈등의 최후 단계에서 장태완을 모델로 한 인물에게서 직접 나왔다. 철저하게 참 군인으로 묘사된 인물의 일갈이었다. "넌 대한민국 군인으로도, 인간으로도… 자격이 없어." 저 대사를 들으니 하나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말 하려고 만든 영화구나.


 역사가 스포일러라고 하지 않았나. 대체역사판타지를 만들지 않는 다음에야 정해진 결말을 바꿀 수는 없다. 심박수 챌린지가 등장할 만큼 분노가 이는 과거를 생생하게 되살려내놓고는, 성공한 혁명을 완수한 당시 승리자였던 그에게,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된 그에게, 시간을 뛰어넘어 불행의 역사가 시작되려는 시점의 그에게,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담아 감독이 전하는 말이었다. 대화는 사람끼리 하는 거야. 너는 인간이 아니야. 전두환 부관참시. 영화의 목적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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