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겨울 Apr 30. 2024

기행장군 양양이

홍보가 아닌 소개글


유튜브와 나


  옛날 사람이 되어서 그런가. '유행'을 넘어 생활이 되어 버린 '유튜브'에 영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영상 매체가 익숙하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하는데(이건 무슨 조선시대 같은 말인가), 영상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이 시간낭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이젠 꼰대의 향기 난다) 영상 매체를 싫어한다는 말이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 보는 것은 참 좋아한다. 심지어 단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기에 작은 신(Scene) 하나를 놓쳐도 전체의 풍미를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일종의 강박이다) 하지만 대다수 유튜브 영상은 뭐랄까. 마치 '건너뛰기' 버튼이 활성화되기만을 기다리는 광고를 계속 보는 그런 기분이다. 맞다. 결국은 조급성이 문제다. 어느 정도 속도조절이 가능한 활자와 비교했을 때, 그리 수준이 높지 않은 영상을 몇십 분이고 가만히 보아야 하는 일은 고역으로 느껴진다. 영상을 중간에 건너뛰거나 배속을 빠르게 해서 보면 될 일인데, 무언가를 놓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계속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따라서 모든 것을 종합해 이렇게 결론을 지은 바 있었다. 유튜브는 시간낭비다.


  얼마 전 한 유튜버의 영상을 정주행 하게 되면서, 앞서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말을 몽땅 부정하게 되었다. 이거야말로 유튜브라는 플랫폼이기에 가능한 형태의 기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아마추어', 진정한 '덕후'이기에 제작 가능한 영상. 작정하고 시간 들이고 돈 들여 스케일 갖추기에는 하찮다. 수익이 날 리 없으니 전문 제작사에서 나설 리 만무하다. 하지만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소수에게는 흥미를 끌기 충분하다. 내 돈 들여 가보기에는 시간도 열정도 고생할 의지도 없지만, 호기심이 일고 적당히 공부하는 기분을 주면서 궁금증을 느껴봄직한 것들을 대신 전해주는 유튜브 채널. 이름하여 '기행장군 양양이' 되시겠다.



삼국지와 나


  삼국지에 푹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가 시작이었다. 학교에서 구독하던 '어린이 신문'이 있었다. (그때는 '소년○○' 같은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린이○○'이 되었다.) 신문 기사보다 하단 광고면을 더 재미있어했다. 어린 마음을 자극하는 광고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만화전략삼국지 60권(요코야마 미츠테루作)'에 관한 것이었다. 왜 제갈량의 남만 정벌을 메인으로 내세워 광고를 했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올돌골이니 축융이니 하는 인물들에 관심이 갔다. 문제는 이 전집이 누군가의 기증으로 우리 반 교실 뒤편의 학급문고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만화책이어서, 멋있어서, 어린이의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남자아이들이 학급 문고에 매달려 만화책을 읽고 또 읽었다. 단연코 내가 1등이었다. 이것을 얼마나 좋아했느냐면,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컵라면 용기 등을 활용해 모자를 만드는 활동을 하면, 만화책에 나오는 모양으로 제갈공명이 쓰는 와룡관을 만들어 쓰고는 혼자 좋아하는 지경이었다.

실제 와룡관(左), 흥선대원군이 쓴 와룡관(中),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의 제갈량의 관(右). 물론 컵라면 용기로 이런 퀄리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음은 게임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처음 해 본 'KOEI 삼국지' 시리즈는 인생 게임다. 초등학생 성인이 되기까지, '삼국지 5'에서 '삼국지 14'에 이르기까지. 시리즈마다 개근했다. 삼국지의 등장인물 이름과 능력치, 한위(漢魏) 시기의 중국 지명과 성읍의 이름, 지도에서의 위치를 줄줄 외웠다. 소설 '삼국지연의'도 읽어 보고 싶어졌다. '이문열 삼국지'로 시작해서 다양한 책들을 섭렵했다. 얼마나 열정이 넘쳤는지. 삼국지 정사와 소설의 차이를 비교하는 책을 접한 중학교 시절에는 '컴퓨터' 교과 시간(라떼는 컴퓨터라는 교과가 있었다)에 '나모웹에디터'(아직도 있나 몰라)라는 툴을 활용해 삼국지를 주제로 한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만화, 게임, 소설, 영화, 드라마, 관련 도서... 삼국지 관련 콘텐츠에 정말 미친 듯이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 역사 공부를 업으로 삼게 만든 이유의 근원을 따라가면 나타나는 세 가지 중 하나가 삼국지였다. 천재 제갈량을 좋아했고, 젊은 후계자 강유를 사랑했으며, 간웅 조조에게서 매력을 느꼈다. 이 엄청난 이야기가 중국사의 전부인 줄 알았다. 중학교 교과서의 한 문단으로 요약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PC게임 유행 종말과 함께 삼국지 게임의 새 시리즈를 기대하기도 어려워졌고, 모바일 버전 삼국지 게임은 장수들을 미소녀로 바꾸어 놓은 이상한 것들로 가득하고, 오우삼의 '적벽대전' 시리즈 이후로 볼만한 삼국지 소재 영화도 고갈되었으며, 95부작 드라마 신삼국을 다 챙겨볼 만큼의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줄줄 외우던 삼국지 이야기에서 더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 없다고 느끼던 그때, 삼국지 역사의 실제 현장을 찾아다니는 유튜버가 있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참신하고 정성 가득한 콘텐츠인데 구독자 수나 조회수가 그렇게 잘 나오지 않아 안타깝다는 뉘앙스였다. 그게 가슴을 울렸던 것 같다.(누구나 마음속에 삼국지 한 페이지쯤은 있잖아요) 추억을 되짚으며 유튜브에서 해당 채널을 검색해 구독을 눌러놓기는 했는데, 유튜브 기피증으로 굳이 영상을 재생해보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방학이 되었고 우연히 생각이 나서, 영상 하나 길이가 15분 남짓 정도밖에 되지 않길래, 이런저런 이유로 역사 기행 시즌 2의 시작 영상을 하나 틀어 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정주행은 시작되었다.



기행장군 양양이와 나


  신기했다. 유튜버 '양양이'는 중국어로 의사소통이 원활한 사람이었다. 그가 중국의 (깡촌) 시골마을을 돌며, 마을 어르신들에게 물어 물어 인터넷이나 지도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 삼국지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콘텐츠였다. 중국의 노인들은 친절했고 한국인을 좋아했다.(일본에 대해서는 여전히 엄청난 적개심을 드러내었다. 유튜버가 자신을 한국인이라 소개해도 일본인이 아닌지 여러 차례 확인하려 들었다.) 방언이 심한 탓에 소통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평생을 지켜온 자기 고장의 역사 이야기를 비교적 잘 알고 있었고, 그에 관심을 갖는 이방인에게 어떻게든 전달하고 싶어 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역사'가 무엇인지 너무 이해가 되었다.


  놀라웠다. 중국 각지의 시골과 도시의 풍광이 여과 없이 화면에 담겼다.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한위시기 유적과 흙벽의 고성은 그 흔적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오랜 세월에 덮였고, 운 좋게 살아남은 것들은 문화 대혁명으로 철저히 파괴된 채였다. 이천 년 풍파 숨 가빴던 삼국 역사의 현장은 허허벌판으로 퇴색된 지 오래였고, 무덤과 비석은 무성한 잡초와 제멋대로 자란 나에 덮여 접근조차 힘든 상태였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낮은 비석의 흐릿한 글귀가까스로 흘러간 과거 한 때의 빛나던 순간을 무력하게 전할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삼국의 영웅들이 서로 차지하고자 목숨을 걸었던 중원의 낙후도가 더 심했다. 한말의 경쟁에서 조금 빗겨 나 있던 중국 남부 대도시 몇에 삼국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관광지를 대대적으로 조성해 놓은 모양새였는데, 지나치게 화려하고 지나치게 넓고 지나치게 부담스러웠다.


  대단했다. 삼국지의 기록과 중국의 지형에 관한 해박한 이해를 바탕으로 기록의 진위와 현실적 가능성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드론을 띄워 전체적인 풍광을 담았다. 숱한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자연의 위대함과 이천 년 전 인물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중에서 장안을 잇는 자오곡의 험난한 외길은 여러 차례에 나누어 대중교통 등으로 직접 이동을 시도하며 온몸으로 가능성을 체크하기도 했다. 특히 여정이 이루어지던 시기가 코로나19가 한참 극심했던 상황으로, 중국 정부가 도시 봉쇄 등의 조치를 취하며 적극적으로 이에 대응하던 때였다. 이방인에게 호의적이기 어려운 체제에 강압적으로 인간과 물자의 이동을 막는 상황까지 맞닥뜨려 드라마틱한 상황이 펼쳐졌다. 신분 증명과 매매를 휴대전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시스템에서, 휴대전화까지 잃어버리며 겪게 되었던 고충에 관한 에피소드는 뉴스로만 전해 들었던 중국의 코로나19 대응 상황을 실감 나게 체험할 수 있는 기록이 되었다.


  시즌 2를 마무리한다는 소식까지 접하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최근 새로 영상이 다시 업로드되고 있다. 또 중국여행을 시작하였는지 창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세 번째 기행이 시작된 모양이다. 홀로 하는 외로운 여행에 다시 뛰어든 노력과 정성에 박수를. 

매거진의 이전글 텍스트의 맥락적 이해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