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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Jul 31. 2021

<없는 것> 上

단편소설

1


   그는 생각했다. 생각했다. 생각이라는 것으로 문장을 시작하는 것은 적절했다. 그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 생각이라는 말이 주는 인상은 그런 것이었다.


   이별했다. 서른의 나이가 성큼 다가오던 때였다. 이별의 말을 그는 먼저 꺼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말할 결심이 서고 실천으로 옮기기까지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별의 이유는 많았다. 이별을 망설이게 하는 이유도 많았다. 그래서 결정이 빠를 수 있었다. 이별을 생각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어그러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도 그는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을까? 그가 이야기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알 수 없다.


   다시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가 말하자 그녀는 울었는데, 순간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익숙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가 돌아서는 순간까지 그녀는 붙잡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히 대답을 들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모두 길 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길 위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그 길 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어느 것 하나 기억하지 못했다.

   아프지는 않았다. 이별을 망설이게 만들던 이유 하나가 사라진 셈이었다. 좋았었고 그러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차마 행복했었고 사랑했었고 그러면 그것으로 되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것이 행복했었기 때문인지, 혹은 그렇게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지 역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시간이 지나자 그에게 외로움이 밀려왔다.


   외로움이 밀려왔다. 별생각 없이 의미 없이 연락할 곳이 없음에 그는 몸을 떨었다. 그녀와 함께 했던 세월은 짧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 동안 그는 다른 이들에게 소홀했었다. 멀어진 그들을 다시 돌아보는 것에 그는 자신이 없었다. 눈을 뜨고 자리에 누워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그의 근처에는 그녀의 흔적이 퍽 많았다. 그녀와 연관된 물건들을 본다고 마음이 아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딱히 그녀가 생각나는 일도 없었다. 그가 냉정한 것일까? 어쨌든 그는 그녀를 생각하지 않았다. 전화기에 저장된 사진들을 그는 지우지 않았다. 그녀의 사진들을 또는 그와 그녀가 함께 찍힌 사진들을 그는 지우지 않았다. 간직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 하나하나를 일일이 지우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려내어 지우기에 사진은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그는 사진 전부를 단번에 없애지도 못했다.


   그녀가 가끔은 꿈에 나왔다. 그녀가 꿈에 나오면 그는 불쾌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그런 날이면 그는 불콰하게 술에 취한 채로 잠에 들었다. 그에게는 그런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저 그런 날들이었다.


2


   그를 붙잡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먼저 문을 나왔던 날이었다. 따로 약속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과 어울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봄날이었고, 아침에 챙겨 입은 스웨터가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지던 날씨였다. 몇 걸음을 걸었는데, 그 몇 발자국 사이에 그는 마음으로 행선지를 바꾸게 되었다. 그는 계획 없이 행동하는 것을 불안해했지만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또 아니었다. 꼭 그의 바지 뒷주머니에 구겨져 들어 있는 담뱃갑과 같았다. 끊은 지 일 년도 더 된 담배였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그것을 꼭 소지하고 다녔다. 놀라운 것은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그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피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사진전이 열리는 미술관에 도착했다. 왜 이곳에 왔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현대 미술 전시를 관람하는 것을 그는 좋아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답을 얻을 수 없는 그림들을 그는 좋아했다. 미술 전시를 보고 나오면 머리가 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한 상태를 그는 즐겼다. 그러나 사진전은 처음이었다. 그는 사진의 네모난 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자주 다니던 시립 미술관과는 다르게, 이 전시는 매표소에서 발권을 해야 했다. 유명한 사진작가라고 했다. 듣고 보니 그도 어설프게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사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사진이라는 장르에 대한 문제였고, 그가 오랜 시간 동안 키워오던 뿌리 깊은 편견에서 기인한 것이었으므로 그리 주목할 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배경 사진은 그 실제를 가늠하기 어려웠고 인물 사진은 렌즈를 바라보는 피사체의 동공과 홍채에 반사된 빛이 공포를 전해주었다. 정지된 화면은 답답했다. 절친했던 동성 애인의, 혹은 친아버지의 임종의 순간을 담은 사진에서, 그는 어떠한 혐오감마저 느꼈다. 아버지의 주검을 확인하고 카메라의 렌즈를 조율하는 작가의 모습을 그는 상상해야만 했다.

   전시관과 전시관 사이의 작은 공간에서 사진작가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을 반복하여 재생했다. 그는 그것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으므로 빠른 걸음으로 전시관의 복도를 통과하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 둘, 셋을 셀 만큼의 시간을 보냈다. 정확히 셋을 한 번 더 센 다음에


   걸음을 마저 하여 남은 사진들을 아주 천천히 돌아보았다. 느린 걸음으로 전시장을 나가던 그가 문득 관람 순서를 거슬러 다큐멘터리 상영실로 걸음을 떼었다. 그곳에는 여전히 [여자]가 있었다. 이번에는 다섯까지 세고 나서, 다섯에 또다시 다섯을 세고 나서야 전시관을 빠져나왔다. 전시장 출구 앞 의자에 앉아 그는 잠자코 [여자]를 기다렸으나, 삼십 분 여가 지나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시간이 흘러, 자신을 알아본 것이냐는 <여자>의 질문에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 또한 진실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그는 [여자]를 만났다.


3


   버스를 기다리다가 문득, 그녀의 동선에 있는 정류장이라는 것을 그는 알아차렸다. 당연히도 그는 그녀가 출퇴근 시 이용하던 버스 노선을 알고 있었다. 그는 버스가 잠시 멈추었다 지나가는 짧은 시간에, 먼지가 뿌옇게 앉은 차창 틈으로 버스 내부의 사람들을 전부 확인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 같은 노선의 시내버스 네 대를 보내고서야 그는 자신이 타야 할 마을버스에 올랐다.


4


   그는 친구와 술을 마셨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면제를 복용한다던 친구가 그에게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유부녀를 만나볼까 해.

   재차 묻는 그의 말에 친구는 동일하게 대답했다. 유부녀를 만나볼까 해. 그는 잠시 생각했으나 친구에게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친구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정말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 친구가 두 눈을 깜빡였는데, 그는 친구의 얼굴에서 처음 그를 만났던 어린 날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술집의 은은한 조명 탓이라고 생각했다.

   얘기는 이랬다.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직장에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다고 했다. 몇 년 안 되어 과장으로 승진할 연차인데, 지금은 대리라고 했다. 가정이 있는 여자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가정이 있는 여자였기에 친구의 호기심을 자아낸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만나고 싶은 이유가 유부녀이기 때문이라는 건가?

   응.

   그의 물음에 친구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유부녀이기 때문에 접근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유부녀와 만나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 졌다. 독특한 관계로 인해 재미없는 인생에 몇 안 되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것이 친구의 말이었다. 독특한 관계라고, 친구는 말했다. 그 여자에게는 남편이 있고, 친구에게는 4년을 만난 여자 친구가 있다. 그중 2년은 함께 살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했다. 이 독특한 관계로 인하여 많은 것이 고통스러울 것이고, 바로 그 고통이 일반적이지 않은 감정으로 이끌어 줄 거라고 했다. 친구가 어린아이와 같이 진지했기에, 그는 그 말을 더 이상 장난이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친놈.


   친구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고, 예술가의 사랑은 보다 극적이어야 한다. 형수를 사랑할 수도 있고, 처제를 사랑할 수도 있다. 일흔넷의 작가는 열아홉 소녀를 사랑했으나 세상은 그것을 불경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친구의 생각에는 망상이라 할 만한 것도 있었고, 삼류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볼 만한 장면들도 더러 있었다. 친구의 시나리오에는 여자의 남편과 벌이는 몸싸움도 포함되어 있었다. 퇴근 시에 그 여자를 데리러 온 남편이란 자의 체구를 보아하니 결코 밀리지는 않을 것 같단다. 친구는 신이 나 보였다. 그는 그저 잠자코 친구의 실없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여자 친구를 생각하라거나, 가정이 어쩌고, 양심에 호소하는 종류의 잔소리를 들어놓을 마음은 그에게 들지 않았다. 다만 그는 친구의 망상이 현실이 되었으면, 그런 일이 그의 주변에서도 한 번은 일어나 보았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왜 그러한 생각이 들었는지는 그 또한 모를 일이었다. 친구는 호쾌하게, 잘되면 그 여자와 인사시켜 주겠노라 이야기했다. 그는 그저 친구에게 술 한 잔을 더 권하는 것으로 답했다. 다만 그는 그 여자의 생김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말이야,


   너 환지증이라고 들어 봤어?


   친구가 화제를 바꾸었다. TV에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고 했다.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사람들이 없어진 부위를 자각하지 못하는 증세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친구가 또, 그런데 말이야, 하고 말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느끼는 정도가 아닌가 보더라고. 팔이 잘린 사람이 있는데, 이제는 없어진 그 사람의 뭉툭한 팔 끝을 만지면, 이 사람은 그 감촉을 마치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는 것으로 느낀다는 거야. 볼이나 이마와 같이, 얼굴의 어느 부분을 만질 때에도 누군가 손가락을 만져주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데. 이상하지?

   오, 그래,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친구의 말에 그가 화답했다. 왜 그럴까? 없는 것에 왜 있는 것처럼 감각이 전해질까?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 애쓰던 친구가 미간을 찌푸리다 웃었다. 아, 모르겠다. 기억 안 나. 대뇌가 뭘 어떻게 한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술잔을 부딪치며 친구가 말했다. 그거야 대뇌가 알아서 하겠지. 어려운 질문에 결론은 간단했다. 대뇌가 알아서 할 거야.<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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