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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신 Jun 25. 2024

엄마의 밥

지금의 볶은밥이 더 맛있는 이유는

"애들이 커서 엄마음식에 대한 기억이 뭐가 있겠어"

핀잔주듯 말하는 그의 지적질에 뒤통수를 날리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말없이 볶음밥을 휘젓거렸다.

"다 잘하지 안 해도 된다고. 그냥 시켜 먹자!"라는 그의 말에는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하냐는 나의 소심함과 무시되고 상처가 된 마음이 비빔밥처럼 범벅이 되어 내 마음은 더 굳게 닫아졌다.


요리를 해본 적은 없었다. 다만 명절에 만두 빚는 것을 도와드리고 전 부치는 것을 눈으로 본 것 밖에는 없는 

내가 결혼 후 직접 해 보려는 노력은 많이 했다. 

'요리란 재료를 썰고 함께 볶고 양념하면 되지'라는 나의 단순한 생각은 단순히 MSG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것저것 신경 쓰다 태우고 퍼지며 맛이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들 내 음식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나는 늘 서운함이 있었다. '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일도 하고 애들도 키우며 나름 내가 만들어 먹이려고 한다고!' 그 마음에 대해 돌아오는 반응이 훈계나 지적이면 눈이 아닌 마음의 눈물이 올라왔다.

그렇게 나는 바쁜 시간을 쪼개 요리할 때면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 볶음밥 위주로 요리를 했었고 

나의 시어머니는 맛깔스러운 고기가 듬뿍 들어간 된장찌개 위주로 음식을 만드시곤 하셨다.


그렇게 나의 시답지 않은 볶은밥은 시어머니의 된장찌개로 한판 패배를 당하고 시댁에서는 주방보조로 낙찰 돼버렸다.


가끔 엄마집에 애들을 데리고 갔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가자미 구이와 감자 샐러드 그리고 미역줄기를 볶아놓으시고 국물이 있는 닭볶음탕을 해 주시곤 하셨다. 공부만 하고 직장만 다니던 딸이 결혼해서 일도 하며 애들도 키우느라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운 엄마는 그렇게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한 상 차려 주셨다.


우리 집은 외식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어릴 적 해주셨던 감자탕, 일본식 일본전 골 그리고 가끔 히 해 먹었던 흰 종이가 깔렸던 카스텔라까지 우리는 거의 모든 음식을 집에서 해 먹었다. 외식이라면 가끔 짜장면이나 냉면정도를 외식했었던 기억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결혼 후 시댁은 늘 바쁘셨던 시어머니와 육식을 좋아하는 가족 모두의 식성이 외식 위주의 식생활을 익숙하게 했다. 그렇게 나도 아이들도 그 음식문화에 길들여지게 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집에서 만든 카스텔라나 감자탕 문화라 배달문화에 온갖 음식으로 입맛이 길들여진 세대와는 다르다. 요리를 함께 만드셨던 아버지의 모습과 그렇지 않은 남편의 모습 속 가족문화도 달랐다.  그 다름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와 환경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고 그것만이 선택이 되는 것은 아쉽다. 


내가 해 먹이고 싶은 마음에 부족한 요리실력에도 하려고 했었던 나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만 당당히 남편에게 요구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못한 나의 수동성이 아쉬웠다. 집안의 안주인으로 균형을 맞추지 못한 나의 고지식함이 엄마의 음식을 온전히 아이들에게 전하지 못한 부분은 아쉽다. 그래서 지금 내가 요리를 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모든 재료를 한 번에 넣어 볶고 굽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재료 하나하나의 특성을 바라보게 했다. 마치 모든 사람도 다르고 자신의 때가 있듯이 볶은밥에도 이제는 한 번에 모든 재료를 넣지 않는다. 


양파를 잘게 썬다. 피망과 당근도 그렇게 썬다. 볶음밥에 들어갈 햄 또는 스팸도 잘게 썬다.

달걀노른자를 식은 밥과 섞는다. 불 위가 아니라 큰 그릇 안에서

인덕션에 올라간 웍에 기름을 넣는다. 달궈진 팬에 온갖 야채를 넣고 볶는다.  다진 파도 올린다. 

볶은 채소는 그릇으로 옮겨지고 노른자가 들어간 밥을 기름에 볶는다. 볶아진 야채를 더한다. 다른 팬에서 볶어진 흰자도 넣고 굴소스도 뿌려 간을 맞춘다. 

이렇게 볶으니 밥알이 살아 있다. 야채가 무르지 않는다.

섞인 재료가 본연의 식감을 잃지 않는다.

그 이치를 깨닫게 되는데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와 그의 다름을 알고 그 특성을 살려서 조화를 이루는 것 또한 인관관계에서 꼭 필요함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때는 그냥 바빴다.

그때는 내가 다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때는 그래야만 되는 줄 알았다.


지금의 깨달음은 그때의 나를 어루만져줄 만큼 성숙했다.

지금은 기다릴 줄도 안다.

지금은 내가 안 해도 됨을 안다.

지금의 나는 싫은 말도 하고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니 그때와 지금의 볶은밥의 맛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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