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신 Jun 23. 2024

선택하는 자와 선택된 것을 먹는 자

지금의 나는 어디쯤일까

“감자볶음은 1번, 장조림 2번, 김치 3번, 그리고 순두부는 4번이에요”


 조리된 음식의 번호를 매기며 식판에 놓일 순서를 정하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했다. ‘대충 색깔이 어울리게 놓으면 되지 뭘 그렇게 음식에 순서를 매기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생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요양보호사들은 재빨리 반찬들을 식판 위에 순서대로 놓고 일부는 갈반을 만드느라 분주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나눠지는 반찬들이 쭉 놓인 식판으로 분배되며 밥과 국이 올라간다. “선생님 사진 찍어주세요”라고 식판 가득히 채워진 음식들을 기록 사진으로 찍으라고 한다. 그 한 장의 사진이 찰깍거린 후 식판들은 각기 이동 조리대로 움직여지며 요양보호사들의 발길이 빨라진다. 어르신들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다 어느새 밀물처럼 빠져버린 조리실에 혼자 남겨진다. 새벽부터 바쁘게 준비한 아침식사가 7시에 올라가며 잠시 숨을 돌린다.


 미리 전처리를 거친 재료를 한 끼의 메뉴로 만드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지만 밥과 국 그리고 반찬 여러 개를 동시 다발적으로 하는 것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 같다. 현악기의 움직임에 관악기가 더해지며 오늘의 주인공이 독주 연주를 하는 것을 지휘하는 것처럼 나는 모든 메뉴의 진행을 꽤 차고 있으며 시간과 요리의 진행과정을 일사천리로 운영해야 한다. 중간중간 진행되는 전처리와 세척은 마치 무대 위의 여러 댄서들의 움직임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 이것도 먹어봐요, 맨날 미역국만 드시려 하지 말고” 나의 말에 엄마는 연실 “미역국이 시원해”라는 말만 반복하신다. 예전에는 여러 반찬도 함께 드셨는데 이제는 곁들여진 김치도 먹지 않고 미역국만 드시려고 한다. 점점 낯설어지는 엄마의 모습을 한참 쳐다보다 이전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시는 음식은 냉면이다. 냉면에 식초와 겨자를 더하면서 침을 꼴깍 삼키는 엄마의 모습은 늘 웃음을 자아냈다. 냉면 그릇을 가득 채운 곱빼기를 시키면 체구도 작으신 엄마는 국물까지 말끔히 비우며 정말 맛있게 드셨다. 간혹 만두까지 시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다 드시는 모습이 신기했었다. 그래서 외식은 주로 냉면을 먹었고 집에서는 가끔 아빠가 국수를 삶아 저녁식사를 함께 하곤 했었다. 그때도 늘 엄마의 그릇은 내 것보다 배는 많은 면발이 담겨 있었고 김치와 양념장을 올려서 맛있게 드시는 엄마의 모습은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결혼 전 엄마의 식성을 알고 있었던 나에게 변해가는 엄마의 입맛은 점점 흐려지는 엄마의 눈과 함께 안타깝게 다가왔다. 그 시작이 언제였을까 생각해 보니 기억력이 사라지는 엄마가 부엌에서 뭔가를 하는 것이 불안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인 것 같았다. 가스불에 음식 올려놓고 잊어버려 냄비도 많이 태웠다. 불안해서 가스밸브에 타이머를 달아 놓았다. 더 이상 간이 맞지 않는 음식에서 엄마의 손이 가지 않게 자제하게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점차 엄마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제한되었다. 두 손 두 발이 있어도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드니 엄마는 점차 위축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느껴졌어도 나는 그 범주에서만 움직였다. 명랑하던 엄마가 말수가 점차 줄어들고 다양한 얼굴 표정도 무표정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게 엄마는 부엌에서의 활동이 줄어들며 엄마의 방으로 낮에는 주간보호 센터로 좁아지게 되었다.           


밥과 국 그리고 4개의 반찬이 놓일 식판의 구성처럼 매일 준비하는 음식은 식단에 따라 그 구성이 맞춰진다. 1부터 4까지 매겨지는 번호처럼 365일 만들어지는 반찬들은 돌아가며 식판에 놓이도록 조리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은 씹지 못하는 어르신께는 갈아서 무슨 모양인지도 알아볼 수도 없는 채 식판에 담긴다.. 아직 건강하신 분들은 스스로 드시기도 하지만 대체로 본인 입맛에 익숙한 반찬 위주로 드신다. 

마치 엄마가 미역국만 드시려고 하신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스스로 요리하든지 외식을 하든지 선택해서 먹는다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내 의사 결정을 스스로 한다는 것이고 경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고 교통수단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포함이 된다. 그 선택에는 내 욕구가 무엇인지 알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도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육체적 정신적 노화가 진행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느새 내가 나답지 않다는 생각이 점차 들기 시작하면서 그 능력이 우회하기 시작한다. 

가던 길을 돌아 세월을 거슬러 가는 모습처럼 그 선택은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정해지기 시작한다. 

그것이 하나하나 늘기 시작하면 점차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처럼 시간의 흐름은 거꾸로 흐른다. 

노년이 유아기의 모습으로 가게 된다.


선택하는 것을 먹는 자가 선택된 것을 먹는 자가 된다. 그러기에 간혹 먹게 되는 아이스크림의 그 달콤함이 배가 되고 냉면의 맛이 이 세상 음식이 아닌 것처럼 황홀하게 된다.


두 손 두 발로 움직이고 걷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모독이다. 

내 육신이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뇌가 아직 건강하다는 증거이다.

내 컨트롤 타워에 있는 사령관이 제 몫을 하는 것이고 그 부대원들이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 균열이 생겨 점차 변해가는 것조차 인지 못하다 어느 순간 직면하게 되는 자신을 자신이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슬프다. 

이것을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느낀다는 것은 그 선택이 결국은 자신인 아닌 상대가 가져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절벽에서 끝없는 추락을 하듯 나의 엄마는 치매로 흐려지는 정신으로 약해진 육신이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리셨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선택된 음식을 드시는 어르신들을 위해 음식을 만든다. 

움직일 수 있는 선택을 하는 내가 그렇지 못한 분들의 삶을 마주하게 된다. 


선택하는 것을 먹는 자와 선택된 것을 먹는 자로


작가의 이전글 무쌈과 짜조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