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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흐름 Nov 27. 2023

'바치라'는게 아니고

[성경] 창세기 22장



창세기 22장을 읽는다.

아브라함이 신의 시험에 든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 번제란 제물을 불에 태워 신에게 드리는 제사. 신의 분부에 아브라함은 '네' 하고는 신이 일러준 장소로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선다. 부자가 나아가는 도중에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제물로 드릴 양이 어디 있느냐 묻는다. '제물은 신이 친히 준비해 주실 것이다' 대답하고 둘이 계속 나아가 마침내 번제를 드릴 장소에 도착한다. 이제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이삭을 위에 눕히고는 막 칼로 손을 가져가는 순간에! 천사의 목소리가 그를 막아 이르기를,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이에게 손대지 말아라. 니가 내게 외아들 바치기를 망설이지 않았으니 신을 향한 너의 경외심이 얼마나 깊은 줄 알겠다."

그제야 아브라함이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니, 산양 한 마리가 뿔이 수풀에 걸려 제 스스로 잡혀 있는 것이었다. 곧 그 양을 잡아 아브라함이 번제를 올리고, 그 장소를 '주님이 친히 준비하여 주신다'라고 부른다. 그리고 천사가 다시 아브라함에게 천국에서부터 소리 내어 이르되, 신이 맹세컨데 그가 오늘 순종한 일로 말미암아 그의 자손이 번영에 번영을, 축복에 축복을 더할 것이다. 아멘.





창세기 22장의 내용을 읽으면, 공포영화가 따로 없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버지와 그것을 명령하는 신이라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그가 100 되었을  아이 갖지 못하는 아내의 태를 열고 신이 , 그야말로 귀하디 귀한 아들이다. 기록의 맥락을 보면 신은 아들을 줬다가 뺐었다가 다시 주는,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가혹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 신이 아브라함에게 기대한 것은 신을 향한 '믿음'이지 아들의 목숨이 아니다. 그것도 ' 믿음' 아브라함 안에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자  것이다.  믿음을 확인코자 하면, 진정 소중한 것을 신에게 내놓을  있는지를 보고 신이 세상 어느 것보다 우선되는지를 보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들이었고, 만약에 소중한 것이 돈이었다면 , 땅이라면 , 나무 한그루라면  나무,  한 줌이라면   줌을   있겠느냐고 했을 것이다.


도대체 그 믿음이 뭐길래?

여기서 사람이 가지기를 기대하는 믿음이란, '신은 신이 스스로 내 건 약속을 꼭 지킨다는 확신', 그리고 '내가 신의 사람으로서 신과 뜻을 함께 한다는 합심'이다. 아브라함의 경우, 22장 훨씬 이전부터 아브라함에게 신이 주었던 약속은 100세되어 아들을 주겠다는 것과 그 아들을 통해 그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번창할 것이라는 것(22장에 천사가 같은 축복을 언급한 것은 이미 준 약속의 재확신이다), 또 그런 신을 믿고 신과 합심하여 나아갈 때 아브라함은 신의 민족을 이루는 지도자가 된다는 것. 실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불가능한 조건을 넘어서 신을 통해 아들을 얻었다. 그리고 그 이전부터도 약속의 실현을 체험하고 살았다. 그러니 후손 번창의 약속이 이행되려면 아들이 허무하게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신의 말을 따른 것이다. 비록 희한한 방법으로 일하시는 신을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 신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다. 신의 방법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신에게 맡겨 둘 수밖에.


'확신'은 신이 자기 손으로 사람에게 주는 믿음이고, '합심'은 신이 준 확신에서 비롯되는 사람의 의지이자 믿을만한 주권자를 따르는 안심된 마음이라고도 본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신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면, 그다음에 성경의 신은 어떻게 했을까?

나는 신이 더 노력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신으로서 더 견고한 확신과 믿음을 사람에게 주기 위해. 그리고 실제로 신은 이후에 시대가 변하며 점점 사람들이 세속에 눈멀어 타락을 거듭하고 신과의 관계가 엉망진창 구제불능 상태가 되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사랑하고자 자기 자신의 외아들인 예수의 목숨을 희생제물로 내놓기에 이른다. 아니, 정확히는 사람과 신이 화해하는 '화해제물'로 내놓기에 이른다. 타락하는 사람들을 멸해버리는 대신에 사람의 죄를 예수가 끌어안고, 사람 대신 예수가 아들의 목소리로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랑의 제물이 되고, 신과 사람의 관계를 정화하는 다리가 된다. 신이 사람이 여지껏 하는 꼴을 보고 사람에게 데이기를 반복하면서 사람은 못믿을지라도, 아들을 통해서라도 끝까지 믿고 보듬어 안겠다는 신의 창조주로서의 의지이자 신이 피눈물이 나도록 쥐어짜 사람에게 주는 확신이 바로 예수라는 존재이다. 그야말로 22장에서 아브라함이 말했듯 '신이 친히 사람을 위해 준비하시는 제물'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신의 마음이 사람과의 절대적인 약속인 모양이다.


한편,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신이 사랑하면 뭐, 뭐가 되는데?

그 뭐는, '사랑 안에 살게 된다'는 것이다. 신과 나와 다른 생명과 서로 사랑하면서. 우리는 찐사랑으로 생을 살 때,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다 받아들여지고 이해되고 다 괜찮고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어떤 식의 위협(경쟁, 거절, 차별, 다툼, 편견, 이기심 등)도 힘을 잃기 때문에. 그게 곧 치유이고, 인정이고, 존귀함이고, 부자이고, 힘이고, 온전함이기 때문에. 그게 바로 안심, 평화, 자유이기 때문에.


성경의 신은 내놓는 신이다. 빼앗는 신이 아니라. 자신이 사람에게 먼저 확신을 내놓고, 믿음을 내놓고, 사랑을 내놓는다. 그리고 대신에 사람의 안심을 취한다. 22장 신의 메시지는 '바치라'가 아니다. 오히려 신이 사람에게 약속, 믿음, 사랑을 바쳤으니, '안심하라'이다. 신은 안심되는 존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번 장에서 아브라함이 참으로 느끼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가 타락해 가는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귀하고 온전하게 살며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경외심은 그 이해의 깊이만큼 자동으로 깊어진다. 결국 아브라함이 신에게 받은 최고로 소중한 것은, 아들 이삭이 상징하는 신이 준 확신과 믿음, 그리고 22장의 사건을 통해 증명하는 안심이다. 그리고 이로써 신과 서로를 안심하여 신뢰하는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내가 오늘, 신을 받드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불안하잖아?

그래도 걱정 않는다. 신이 더 노력한다는 것, 그것의 증거로 신이 사람에게 바친 자신의 아들 예수가 내 안에 살아서 나를 위해 기도하고 신과의 관계를 다시 세운다는 것을 아니까. 신이 사랑한다는 것과 신이 추구하는 사랑의 방향으로 내가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아니까.

다만, 우리는 신이 주는 참사랑이 어색한 거지. 그동안은 사람이 사랑이라며 주던 오락가락 갈팡질팡 제멋대로의 조건부 애정표현에 절절매고 불안해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의 태도에 상처받고 그것을 불신하던 것에 익숙해왔으니까. 불안이란 그저, 안심과 참사랑을 아직은 좀 낯설어하는 것일 뿐.

나는 믿음에서 비롯된 안심과 참사랑에 점점 익숙해져 갈 것이 예정되어 있다. 나를 선한 신의 뜻에 맡겼으니까. 치유와 존귀함과 온전함, 평화, 자유를 원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신이 주는 안심과 참사랑을 받아들일 것. 신이 무엇보다 우선될 것.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말하는 사랑을 먼저 기준 삼아 신의 사랑을 그 한계에 끼워맞추느라 헤매며 잣대질하지 말고서.


안심하고 사랑하기.

신과 사람 사이의 사랑의 서약으로

"나 너 안심하고 사랑한다."

"나도 당신을 안심하고 사랑합니다." 하고.

마음껏 뒹굴자, 신과 너무 좋아서 끌어안고 희로애락에 같이 울고 웃으며

애정행각 눈꼴시다 못해

눈부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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