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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진 Yejin Lee Feb 01. 2024

나의 스위스 출산 일기

임신부터 아기와의 첫 만남까지

아들 리암이가 태어난 지 벌써 10개월 차에 들어섰다. 국제보건학을 공부하고 국제보건기구에서 일하며 모자보건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고 경험을 했지만, 내가 임신과 출산이라는 경험을 직접 하게 되니 현실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들도 많이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 기억이 더 희미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더 늦기 전에 내가 경험한 출산과 육아의 과정을 간단하게라도 정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임신과 출산 이후 나의 짱짱했던 기억력은 급격히 감퇴하고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방금 했던 생각도 까먹어서 무조건 생각이 들면 바로 핸드폰 캘린더나 노트에 적어두는 습관이 들 정도이니까 말이다.


나의 첫 임신 기간을 돌이켜 보면, 뭐가 제일 힘들었을까. 다행히도 나는 입덧이 심하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입덧 때문에 엄청 고생을 한다는데, 나는 큰 어려움은 없이 지나갔었다. 임신 기간을 통틀어 한 번 정도만 구역질이 나서 화장실에 달려갔고, 그 외에는 뭐든 잘 먹었다. 그리고 많이 먹었다. 나는 임신 기간 내내 그 어떤 것보다 배를 바닥에 두고 누울 수 없는 점이 제일 불편했다. 옆으로 혹은 반대로 뒤집으며 뒤척이는 게 나의 잠버릇인데 똑바로 천장만 보고 자야 한다니 너무 힘들었다. 임신기간에는 태아가 뱃속에서 눌릴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소리에, 자다 뒤집으면 절대 안 된다고 다짐하고 신경 쓰며 자려니 깊은 잠을 자기도 쉽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잠결에 뒤집어 누워 아기가 눌리면 어떡하나 계속 노심초사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배가 불러오면서는 몸 안에 장기나 방광이 눌리기 때문에, 소변도 더 자주 마렵게 된다. 낮이건 밤이건 화장실에 들락날락해야 하는 횟수도 늘어나는 건 또 다른 불편함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특히 밤에는 소변이 마려워 자주 깨는 건 통잠을 방해하고 수면의 질을 떨어뜨리는 최대 방해요소였다. 임신 중기와 후기에 남편과 둘이서 런던 그리고 이스라엘 여행을 갔었는데, 같이 조금만 걷다가도 화장실에 들러야 하고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아프고 힘들다 보니 예전처럼 여행 스케줄을 빡빡하게 짤 수도 없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방문할 때는 아침 새벽에 출발해서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그룹투어를 많이 하는데, 우리는 비용이 더 들더라도 개인택시를 대절해서 프라이빗 여행을 해야만 했다. 임신한 나 때문에 중간중간 화장실도 자주 가야 하고, 좀 더 오래 쉬었다 출발해야 하고, 새벽이 아닌 늦은 오전 시간에 출발해서 숙소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만 37주가 지나가자 슬슬 긴장되기 시작했다. 아기가 언제 나올지 알 수 없고, 임신예정일이라고 계산된 날짜도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진통이라는 신호를 기다려야만 하는데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뭐가 진통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만 배가 아픈 거 같으면 혹시 진통이 아닌가 스스로 의심해 보는 날이 계속되었다.


만 38주까지 회사 일을 하고 예정일 2주 전부터 출산휴가를 시작했는데, 비슷한 출산예정일을 가졌던 다른 병원 임신 동기들이 자신의 출산 소식을 알려왔다. 채팅방에 신생아 사진이 계속 올라오기 시작하자 나의 아기는 도대체 언제 나올까 살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막 시작된 나의 출산 "휴가"는 며칠 더 누릴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그리고 나의 산후조리를 도와주기로 하신 부모님은 출산 예정일 1주일 전쯤 스위스에 오시기로 했는데, 혹시 아기가 더 일찍 나오지는 않을까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막판에 임신 38주, 39주 차는 상당히 긴장감 있게 흘러갔던 것 같다.  


사실 초산의 경우에는 임신예정일을 지나 낳는 경우가 많다고는 한다. 특히 첫째가 아들일 경우에. 그런데 출산 예정일에도 아무런 진통이 없자, 앞으로 아무리 길어도 1주일 내로 아기는 분명 나오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앞섰다. 다만 진통이 오지 않은 덕분에, 회사일을 쉬면서 2주간 못 만난 친구들도 만나고, 마지막으로 꼭 먹고 싶었던 레스토랑들도 가서 먹고 오고, 산책도 하고 심지어 출산예정일 전후로 3일간 진행된 교회 부흥회도 부모님과 다같이 참석할 수 있었다. 출산예정일까지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다 하면서 신나게 놀고 나니, 이제 출산을 해도 아쉬울게 없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진통과 출산의 고통이란 것은 무엇일까 상상이 되지는 않았다.


산부인과 의사는 예정일인 금요일에 진통이 없으면, 주말 지나고 일요일 밤에 병원에 입원해 유도분만을 시작해 보자고 했다. 결국 진통 없이 병원에 두 발로 직접 걸어가게 되었다. 주변에서 아기가 언제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병원 가방은 일찍 준비하라고 했다. 그렇게 한 달 전부터 이미 싸둔 나의 병원 가방에 아기 신생아 옷 몇 벌 그리고 나와 남편의 세면도구, 잠옷, 슬리퍼 등이 들어있었는데. 그 가방을 집어 들고 병원으로 씩씩하게 출발했다. 일요일 밤 11시, 남편과 둘이 집에서 5분 동안 천천히 걸어 집 앞에 있는 La Tour 병원에 도착했다.  


내가 상상했던 출산 장면은, 양수가 터지고 진통에 괴로워하며 남편 손을 붙잡고 끙끙거리며 차로 병원에 실려가 진통을 겪다 힘겹게 아기를 낳는 거였다. 근데 현실은 내 두 발로 멀쩡하게 걸어 들어가서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병상에 누웠다. 간호사가 밤이니까 먼저 탐폰을 넣어 유도분만을 준비해 보고, 새벽에 옥시토신을 투여해서 낮 시간에 출산할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 했다. 그래서 알겠다고 했는데 탐폰을 넣고 한두 시간 만에 우리 아기가 뱃속에서 나올 준비를 빠르게 완료한 것이다. 엄마를 닮아서 성격이 급한 건지, 새벽 12시쯤부터 바로 진통이 시작되었는데 밤 사이 미친 듯이 아픈 진통의 시간이 다 지나가고, 새벽 6시 반에 자궁문이 충분히 열려서, 산부인과 의사가 아침 일찍 출근해 우리 아가를 받아 주었다. 그렇게 2023년 4월 3일 새벽에 아들 리암이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초산임에도 6시간 반 정도 만에 출산을 한 것이다. 


사실 나는 출산을 하면서 무통주사를 맞을 생각은 별로 없었다. 진통이 힘들어봤자 얼마나 힘들까 싶어서 그냥 참으려고 했다. 그래도 간호사는 혹시 모르니 준비는 해두겠다며 나의 팔목에 커다란 주사기 바늘을 꽂아 두었다. 혈관을 잘 못 찾아서 큰 주사 바늘을 계속 여기저기 쑤셔 넣은게 더 아프고 힘들었던 거 같다. 실제로 임산부들이 주사 바늘 넣는걸 진통만큼 많이들 힘들어한다고 하더라. 그런데 새벽 진통이 시작되고 나니까 정말 너무 힘들었다. 출산 준비 과정인 분만 수영 중 연습했던 출산 호흡법도 다 해봤는데 통증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몇 초에 한 번씩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아픔이 밀려왔다 다시 괜찮아졌다를 반복했다. 3시간 이상의 진통을 겪고 새벽 3시가 넘어가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간호사에게 무통주사를 놔달라고 부탁했다. 


마취가 의사가 금방 올라왔다. 그리고 스위스 의사답게 먼저 와서 누워서 진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나에게 차분히 인사를 하고 자기소개를 해주셨다. 오늘 나의 마취를 담당할 누구누구 의사이고, 만나서 반갑다고. 그런데 나의 머릿속에 인사는커녕 왜 지금 당장 나에게 무통주사를 놓아주지 않는지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아니면 성격 급한 한국 임산부라서 그런 거였을까. 그렇게 5분 뒤에 무통주사가 등 쪽으로 흘러 들어오고 통증이 잦아지고 진정이 되었다. 옆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남편 말로는 주사 맞고 30분 뒤에는 내가 잠깐씩 잠도 자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렇게 새벽 5시 반 정도가 되자, 간호사가 생각보다 진통이 빨리 진행되어 아기가 곧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아침 6시, 출근하자마자 나에게 달려와주신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 회음부절개는 보통 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나의 산부인과 의사는 가능하면 자연적인 방법으로 출산을 돕는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인 아기의 머리가 다른 스위스나 유럽 아이들의 머리보다 훨씬 크다는 걸 잘 모르셨던 것 같다. 분만을 진행하시다가 갑자기 나한테 정말 미안하다고 아기 머리가 생각보다 크다고 얘기하시면서, 회음부 절개를 조금 해야 할 것 같다 하셨다. 얼마나 미안해하시던지. 나는 당연히 괜찮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자연분만 시 회음부절개를 당연시하는데 여기서는 워낙 머리가 작은 아이들만 받아 보시다 보니 엄청 미안해하면서 회음부 절개를 하시는 게,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는 아기 맥박이 떨어지고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빨리 꺼내야 할 것 같다고 베큠을 사용했다. 


그리고 몇 번 힘을 주고 나니 아기가 나왔다. 남편은 옆에 있다가 우리 아기의 탯줄을 잘랐다. 나중에 듣기로는 질긴 고무줄을 자르는 것 같았다고. 내가 드라마에서 봤던 한국의 분만 장면은 의사랑 간호사 그리고 산모가 모두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쓰며 힘겹게 출산하는 모습이었는데, 스위스 병원은 모두가 다 차분했다. 간호사는 중간중간 나의 손을 잡고 너무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었고, 의사는 마지막까지 침착하게 자기가 하는 모든 과정을 말로 공유하고 나의 의견을 들어주고 분만을 다 마치고 나에게 너무 잘했다고 하며 "You did a great job. You are a tough woman!"이라며 환한 미소와 함께 칭찬을 해주었다.


또 한 가지 스위스에서 첫 출산이 뜻깊을 수 있었던 이유는 skin to skin (살과 살을 맞대는)이다. 내가 출산했던 스위스 병원은 아기가 나오자마자 그대로 엄마 몸 위에 올려서 스킨투스킨을 시켜준다. 맨 살과 살을 맞대게 하여 엄마의 체온을 아기가 그대로 느끼게 하고 아기에게 가장 익숙한 엄마 심장 소리를 계속 듣게 해 준다. 그리고 모유수유를 시작하기 위해 아기가 자연스럽게 엄마의 젖을 찾게 만든다. 이 모든 과정을 엄마랑 아기가 원하는 만큼 몇 시간씩도 갖게 해 주는데 아기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첫 시간을 분주하게 보내지 않고 차분히 여유를 갖고 보낼 수 있어서 너무 소중하고 좋았다. 양수 속에 둥둥 떠서 편하게 모든 영양분을 탯줄로 받던 아기가 이제는 세상에 나와 코로 숨을 쉬고 스스로 젖을 빨아 생존하게 되었다. 


그렇게 30분 가까이 내 위에 올려진 아기를 보며 나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배 속에 있을 때만 해도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렴풋이 보이고 상상만 했던 아기가 실체로 내 눈앞에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물론 아기가 내 눈앞에 있다고 그 순간부터 모성이 생기고 내가 엄마가 된 것이 바로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그냥 이상했다. 한 생명이 태어났고, 내가 이 아이를 낳았고, 앞으로 이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책임지고 키워야 할 엄마라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도 이상했다.  


어떻게 보면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 하나인 스위스, 거기서도 가장 좋은 모자보건 시스템을 갖춘 제네바 사립 병원에서 출산을 경험한 건 큰 행운이었다. 국제기구 직원 보험이 되었기 때문에 다해서 3만 프랑 (4500만 원) 가까이 되는 사립병원 출산 비용을 보험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누릴 수 있었던 혜택이었다. 4박 5일의 입원 기간 동안 나를 전담하는 간호사가 늘 있었고, 벨을 누르면 바로 달려와 수유 자세를 교정해 주고 나의 건강 상태를 매일 아침 저녁으로 확인하며 불편함을 해소해 주는 간호사가 여러명 있었다. 모유수유를 처음 하는 나로서는 어려움도 많이 느꼈는데, 병원에서 첫 1주일간 아기와 모자동실을 하며 울면 바로 젖을 물리고 여러 자세로 시도한 게 완모를 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덕분에 너무 편안하게 출산하고 모자동실에서 아기랑 함께 첫 시간을 보내며 도움을 받고 쉬다 퇴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제보건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의료 시스템과 의료진의 도움을 받으며 원만하게 출산 과정을 겪고 나니 그렇지 못하는 산모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던 중, 나의 병실에 나를 전담하는 간호사랑 같이 들어온 인턴이 알고 보니 WHO 동료의 전 동료였다. 예전에 WHO에서 5년간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직접 병원에서 환자들을 보고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어서 조산사 (스위스에는 midwife라는 직업이 따로 있다) 공부를 하고 실습 과정에 있다고 했다. 뒤늦게 나이도 많고 아이도 있는데 커리어 체인지를 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그리고 나중에는 이 직업을 통해 누군가 돈이 없어서 출산이나 모유수유 과정에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무료로 도와주고 지식 공유도 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 좋아 보이고 행복해 보였다. WHO에서 사무직으로 책상에 앉아 일하며 말과 글로만 일을 하다가 현장에서 직접 산모와 아기에게 도움을 주며 모자보건을 실천하는 일을 한다니 의미 있어 보였다. 그리고 이번 임신과 출산을 통해 나는 엄마와 아이가 건강할 수 있는 환경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경험을 통해 피부로 와닿도록 직접 깨닫게 되어 너무 감사했다. 나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산모와 아기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서도 일해보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글이 길어진 것 같지만, 출산한 지 10개월이 지난 시점, 아직 임신과 출산에 대한 기억이 어느 정도는 나서 다행인 것 같다. 다른 글에는 모자보건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 그리고 나의 험난했던 모유수유 완모과정과 엄마의 산후 정신 건강에 대한 내용도 더 정리해서 올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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