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학자인 톰과 심리상담가인 제리는 누가 봐도 모범적인 부부다. 둘 사이는 존중과 사랑으로 맺어져있고 아들마저 효자다. 주변에도 인정을 베풀고 살아 삶에 지치고 외로운 메리는 그들 부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한다. 그런데 이 부부의 아들인 조가 여자친구를 데리고 오면서부터 부부와 메리의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겨울을 맞이한 이들의 관계에 다시 봄은 찾아올까?
이 영화를 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라 짐작한다. 마이크 리라는 감독의 이름도 생소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꼭 이 영화를 소개하고 싶었다. ‘위선’에 관한 영화는 많이 있지만, ‘관계’에 현미경을 들이댄 위선에 관한 영화라면 나는 이 영화보다 더 좋은 영화를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보고 나면 ‘도대체 이 감정이 뭐지?’ 한동안 세상 불편한 그 마음을 규정할 길이 없어 찝찝함이 남을 것이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려면 꽤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들에게서 발견한 위선이 내 안에도 똑같은 형태로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는 아무리 컥컥거려도 떨어지지 않는 가래처럼 내내 마음을 답답하게 할 테니까.
톰과 제리는 누가 봐도 완벽한 부부다. 변호사로 장성한 아들 조까지 합하면 그들이 이룬 가정은 판타스틱한 이상형의 조합이다. 그들은 내부적으로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우며 외부적으로는 가족과 이웃에 넉넉하다. 제리의 직장 동료인 메리와 톰의 친구인 켄은 그들이 관용을 베푸는 ‘가족 같은’ 사람들이다. 그 부부가 그토록 그들을 챙기는 이유는 메리와 켄이 너무 외로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외로움뿐만 아니라 그들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메리는 경제적인 결핍이, 켄은 외모적인 매력이 떨어진다. 만성적인 외로움이 그 둘을 코너로 몰아넣은 것인지 그 완벽한 부부의 옆에 있으니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유가 뭐든 메리와 켄의 행동은 참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다. 지나치게 수다스럽고, 오지랖 넓고, 툭하면 울고, 술주정을 해대고, 눈치 없이 여기저기 들이댄다. 한 마디로 민폐종합세트. 보는 내가 다 부끄럽고 민망해진다. 그런 그들을 향해 그 부부는 ‘오! 가여운 내 친구!’ ‘오, 불쌍한 여인!’처럼 끝도 없이 ‘오~!’를 관용적으로 내뱉는다. 그들을 향한 사랑과 연민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그러나 우리는 속고 있다. 감독은 매우 치밀하게 우리의 눈을 속인다. 우리를 진정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메리와 켄인지, 톰&제리인지.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지적이고 부드러우며 포용 넘치는 완벽한 톰&제리에게 현혹당하고 만다. 그들이 그어 놓은 보이지 않는 ‘선’은 애써 외면한 채 말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관용과 사랑, 연민은 그 관용과 사랑과 연민을 받는 자들이 그 ‘선’을 넘어오지 않을 때만이 가능하다. 침범하는 즉시 ‘아웃’이다.
“사람은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해 메리!”
이것이 ‘아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메리를 향해 제리가 설명해 준 ‘아웃’의 이유다. 아웃은 우리가 저지른 게 아니라 네가 자초한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 일침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 거의 모두는 심정적으로 제리의 이 일침에 동의를 하게 될 것이다.
부부는 한없이 주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얼핏 보면 칭송받을만한 훌륭한 친구이자 이웃이지만 그들이 주는 관용과 사랑과 연민을 받는 사람들의 속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받는 자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부러움 그리고 끝내 그 선을 넘어가서라도 벗어버리고 싶은 이질감 따위는 자신들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는 듯하다. 봄, 여름,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어서야 감독은 서서히 자신이 봐주고 싶은 사람이 메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삼계절 동안 꼭꼭 숨겨왔던 완벽한 부부의 속내를 터트리면서, 코너로도 모자라 바닥까지 처박히는 메리를 통해 실은 이 사람이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너라면?! 하는 질문을 직설로 던지고는 사라진다.
‘첫 번째 매트릭스가 실패한 원인은 완벽한 세계를 설계했기 때문’이라고 신영복 선생님은 「담론」에서 얘기했다. 애초에 작은 틈조차 없었던 톰&제리의 부부관계는 그들 주위에 그 누구라도 제대로 된 관계가 형성될 수 없음을 전제한 것이다. 감독은 마지막 계절 겨울에 만난 톰의 형 로니조차도 메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끝내 증명해주었다.
신영복 선생님은 또 말한다.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을 넘어 서로를 따뜻하게 해 주는 관계, 깨닫게 해 주고 키워 주는 관계라고. 관계의 기본은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양방성’에 있다. 긴 시간동안 특정 시점에서는 누군가가 주고 누군가는 받는 일방성이 존재할 수 있다 해도 고착화된 일방성은 결국 그 관계를 망가뜨린다. 아니, 심각히 훼손한다. 관계에서의 우월의식은 대단한 만용이자 착각이다.
자, 이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자. 자기만족적 관계, 우월의식을 느꼈던 관계, 함부로 ‘선’긋기놀이를 한 관계는 없는지. 때로는 주는 것만으로도 ‘관계’에서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한번쯤 생각해보자. 선의를 가장한 폭력은 의외로 많을 것이니.
나의 경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한 번은 휠체어에 탄 어느 장애인 분께서 횡단보도 앞에서 끙끙대시기에 곁에 다가갔다. 휠체어가 무엇에 걸렸는지 나아가지 못하고 계셨다. “좀 도와드릴까요?” 조심스럽게 여쭤 본 내 물음에 그 분은 날 쳐다보지도 않고 대뜸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냥 가세요.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잖아요.” 순간 당황하고 불쾌했지만 한참 뒤 나는 알게 됐다. 일방적으로 내가 그 분을 도와야 한다는 인식이 그 분 입장에서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분을 도와드리면 나는 아마 ‘아, 나 오늘 좋은 일 하나 했네!’하며 자기만족적 우월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우리 둘을 진정한 관계로 맺는 길은 그 분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기꺼이 손을 내미는 것이었으리라.
두 번째 경우는 늘 선거철이 되면 고민하게 되는 문제이다. 정치를 하려는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갖는 ‘관계의 갑’ 의식. 선거 직전에야 철저한 을이 되어 자신에게 표를 달라 구걸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시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PR한다. ‘봉사’와 ‘능력’이라는 포장지를 씌운 채 말이다. 나는 이것을 폭력성이 내재된 시스템적 선의라고 규정한다.
정치인들이 유권자들과 일일이 개인적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관계맺음 없이 한 사람을 인식하고 마음을 주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정치권에서 스태프로서 일했을 때 나의 고민은 그 관계맺음의 방법론에 관한 것들이었다. 유권자의 입장을 세분화해 맞춤형 공약으로 접근해야 할까, 스킨십을 늘려야 할까 정도를 고민했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지금은 현장을 떠나 있어 유권자로서만 그들을 만나지만 여전히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저들이 나와 관계맺음을 하려고 보여준 노력은 무엇인가? 서울, 부산시민은 아니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 나 역시 두 지역의 선거에 관심을 쏟고 있다. 정치공학적 셈법이 아닌 시민들과의 진정한 관계를 맺는 후보, 이번엔 기대해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