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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타 Jun 01. 2021

보봐르 얼굴

-나폴리4부작 완독






 "하염없이 남편만 바라보면서 인생을 보내는 건 통째로 내 삶을 내다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야." 



 이민 이야기를 농담조로 했다. 한국이 망할지 지구가 망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리 낙관적인 나도 때때로 이렇게 나날들을 보내는 게 언제까지 가능할지 의문에 사로잡힐 때 있다. 넓지 않은 텃밭을 가꾸며 살아가지만 두 분 드시기 넉넉하게 밭을 일구신다. 날씨가 이래서 아이들이 모두 다 시들시들하다. 해를 받아 쨍쨍하게 자라줘야 하는데 걱정이구나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굵은 소금에서 후라이팬까지 이야기를 여기저기로 나누어 하다가 농담조로 이민 이야기를 꺼내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얼른 능력 키워 대한민국을 떠나 더 좋은 나라로 떠나라 모두 데리고 라고 농담조로 말씀하시다가 문득 진지하게 하염없이 남편만 바라보면서 인생을 보내는 건 통째로 내 삶을 내다버리는 짓과 마찬가지라는 말씀. 순간 우리 엄마랑 통화하는 줄 알았다. 어머님도 우리 엄마도 모두 한 남자만을 바라보며 인생을 통으로 흘려보냈다. 자식들에게 헌신적이었고 불완전한 사랑에 절망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바닥에 쓰러진 적 없다. 전화통화를 끝내고 며칠 동안 소설을 읽느라 엉망인 집 안을 휘휘 둘러보다가 오늘은 좀 치워야겠군 하고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보봐르의 좋아하는 사진을 컬러프린터기로 커다랗게 뽑아서 냉장고 앞에 한 장, 책상 앞에 한 장, 공부하는 투명파일 앞에 한 장 끼워놓았다.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알았다. 우리 엄마와 시엄마의 얼굴이 보봐르 얼굴 사이로 겹쳐 보였다. 아 그렇군. 릴라와 레누 얼굴도 그 사이로 겹쳤다. 엄마는 내게 수시로 하는 이야기니 그러려니 했는데 결혼한 이래로 처음 어머님은 내게 자신의 생각을 말씀하셨다. 그 짧은 한 마디에 너는 그렇게 살지 말아라, 너는 꼿꼿하게 네 길을 가라. 그렇다고 자식 새끼랑 남편을 버리라는 말은 아니고. 여성 대 여성으로 서로를 마주한 찰나. 주체로서의 삶을 한평생 계속 살아왔고 현재도 그러하지만 나보다 덩치가 크고 나보다 더 목소리가 큰 사람의 등이나 옆에서 자그마하게 어깨를 움츠리고 목소리를 가만가만 내는 일이 여성의 삶이라고 배워온 나의 엄마들. 그들이 새하얀 머리카락을 짧게 치고 등이 굽고 어깨가 굽고 허리가 굽은 몸으로 세월의 나이테가 그어진 얼굴로 내게 하는 말,말,말들. 그것이 아니었더라.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었더라. 너는 아직 머리에 새하얀 눈발이 내린 것도 아니고 온몸의 뼈에서 아구구구 소리가 나지도 않고 얼굴에 나이테도 몇 개 지니지 않고 있으니 시작을 말하기 너무 딱 좋구나. 갈등은 끝없으니 그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길이 아닌가 하고. 그러니 너는 커다랗고 드넓은 남자의 등만 바라보고 살지 말아라. 그런 말,말,말. 길고긴 소설을 완독하고난 후 허무할까봐 약간 쫄보 마음을 품었다가 무사히 완독했다. 마침 6월이다.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새소리도 흐린 구름들 사이에서 끝없다. 


나폴리 4부작은 내 욕망을 명확히 거울처럼 보여주는 소설이다. 닮고싶은 인물들. 꿈속에서나 꾸어보는 욕망들. 유약하고 저질 체력이지만 그럼에도 이번 인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어떤 사람들과 사랑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가. 그들과 시간을 보내며 함께 하고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그런 것들을 세세하게 보여주어서 저 머나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상상하기 힘들다. 레누와 릴라가 내 친구와 나 같았고 내 이모와 내 엄마 같았다. 인간에 대해서 여성에 대해서 엄마에 대해서 딸에 대해서 그 모든 조건들을 헤아리면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들며 읽어나갔다. 결국 나는 어떤 인간이 되고싶은가. 기나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물어보았다. 


 에피소드 하나, 


 "격정적_인 이게 무슨 뜻이야?" 책을 읽고 있던 내 뒤로 살그머니 다가와 딸아이가 물었다. 응? 읽는 책에 그런 단어가 나오니? 놀라서 물었더니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내가 읽고 있던 책의 한 구절을 가리킨다. 나폴리 4부작 4권을 읽던 중이었고 딸아이가 가리킨 문장에 '격정적인 섹스'가 있었다. 순간 당황해서 아빠한테 물어봐 했다. 아이 아빠는 격정적인_ 한자 뜻을 알려주며 설명해주다가 그런데 이런 단어가 나오는 어려운 책을 읽니? 책 제목이 뭐니? 물어봐서 아이는 내가 읽고 있던 책을 냉큼 가져가며 엄마 잠깐만! 서재에 있는 제 아빠에게 달려가 그 구절을 보여주었다. 둘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문 너머 들렸다. 빨리 내 책 가져와! 소리를 지르니 아이가 책을 가져와 주면서 어제 선생님이랑 이야기하면서 안나 카레니나가 그런 막장 내용이라면서요? 선생님 하니까 선생님이 막장 중의 아주 최고 막장입니다. 라고 답했어. 안나 카레니나가 너희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라고 하셨지? 응 엄마. 그래서? 그리고 선생님이 곧바로 무슨 말씀을 덧붙이시든? 물어보니 막장 중의 최고 막장인데 거기에 인생이 모두 담겨 있어서 그래서 배울 것들이 아주 많다고 하셨어. 그래서 추천해주신 거래. 응, 좋지. 읽어볼 만하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근데 엄마, 엄마 안나 카레니나 보니까 뒷부분 깨끗하던데. 다 안 읽은 거지? 그래서 얼굴이 붉어졌다. 올해 꼭 완독하고 말 테다.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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