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일기
"10대, 20대 시절 내가 나와 남자들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 애쓰며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들이 성취한 것에 무임승차해 대리로 포상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내 내부에도 불꽃이 있었지만 혼자서는 그것을 어떻게 태워야 할지 몰랐고, 섹스와 사랑에 공격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과 적극적으로 세상을 사는 태도를 혼동했다." (042)
리사 콩던, [우리는 매일 새로워진다], 아트북스, 2018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불안과 혼란이 가중되었을 때 더 그랬던 것도 같다. 보이는 것이 그대로일 때도 있었고 사람들이 잘못 볼 때에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순간도 있었다. 탈을 쓰고 행복한 척 웃는 게 지겨울 때는 단골 술집에 가서 독한 술을 두 잔씩 석 잔씩 마시기도 했다. 시선이 흐릿해지는 순간이 좋을 때도 있지만 그 흐릿함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갈까봐 두려워 입술을 꽈악 깨물고 과거로 시선을 회피하기도 했다. 친구들이 좋은 건 언제든 속을 내보여도 좋으니 그런 걸 테지만 나이테를 하나씩 둥그렇게 내 몸에 말아갈때 시선과 판단의 온기와 냉기조차 싫어서 더 안으로 파고들었던 것도 같고.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여겼다. 그리고 정확히 마흔이 넘어서면서부터 나이 많은 언니가 이야기한 것처럼 투명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이게 참 싫을 거 같았는데 이게 딱 맞는 옷처럼 느껴져서 깜짝 놀랐다. 중년이 된 우리들이 가끔 서로에게 닿지 않는 위치에서 툭툭 속을 털어놓는 일이 좋다. 파트너 이야기를 하거나 가끔 파트너와의 육체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오랜 시간을 함께 할수록 열에 일곱은 더 이상 육체 관계를 갖지 않는다, 연례 행사처럼 하기도 하지 농담을 말하는 것처럼 진실을 말하고 아이들 이야기를 나눈다. 육아는 생각 외로 고달프다. 중년이 된 우리에게도 아직 아이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이기적으로 굴 때가 많고 내가 아이였을 때 느꼈던 그 무한한 외로움이 내 아이에게서 보여질 때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기도 한다. 다만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외로움이 구체적인 형태로 변할까봐 표현을 차마 하지 못했고 내 아이는 표현을 너무 구체적으로 잘 서술한다는 것. 그럼에도 책임은 나날이 흐를수록 더해져가고 나이드신 부모님이 언제 아플까봐 언제 큰 병을 얻게 될까봐 언제 돌아가실까봐 전전긍긍. 만나야 할 이들은 늘어가고 그게 공적이거나 사적인 테두리가 아니어도 억지로 만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더 힘이 생긴 것만 같은 느낌은 그 불안이 다른 식의 베일을 갖추고 있기에 그런 게 아닐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더 늘어가는 것도. 누구는 벤츠를 몰고 다니고 누구는 아우디를 몰고 다니고 누구는 여전히 버스를 타고 다니고 누구는 아직도 뚜벅이다. 나날이 자본의 안정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건 우리가 그만큼 더 이상 반항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서서히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데 어딘가에서는 겨울 바람과 같이 매서운 바람이 불어 두꺼운 파카를 입고 바다를 향해 낚시줄을 던진다. 나이테가 서서히 몸을 향해 달려온다. 나이들어 멋진 이들은 여전히 이삼십대 같기만 하다. 아름다워 보기 좋지만 그건 어쩐지 비이성적으로 느껴진다. 아름다움을 싫어할 까닭은 없다. 그 아래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 피똥 쌀 정도로 인내하고 고통을 겪을 테니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내 몸을 그렇게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찌그러지는 주름살이 너무 보기 싫다고 비싼 크림을 이모들이 갖다주어도 한 번 바르고 한 달이 지나는 동안 깜박 하게 된다. 화장품보다 책이 더 좋아, 책 사줘 하면 책은 주름살만 더 늘게 해, 그러니 그딴 걸 뭘 읽어 말하는 이모는 주름살이 하나도 없다. 예순 다섯인데. 화장품을 하나 사서 바르면 책도 한 권 사서 읽어주어야 해, 그래야 나중에 치매 안 걸린다 하하 웃으면 뭐라고 이년아! 버럭 하는 우리 이모. 나도 이모 따라 헬스장에 따라가 한 시간 동안 운동해봤지만 솔직히 예순 다섯인 우리 이모가 나보다 더 체력 좋은듯. 젊은 것이 고거 하고 헥헥거린다고 구박받았다. 반성합니다 하고 헥헥거리고 또 운동을 안 해요. 이번 생에 운동짱은 못하려나보다 체념을 살짝 하고 싶었던 찰나 [우리는 매일 새로워진다] 나이든 언니들은 못하려나보다 이딴 소리 하지 마, 말씀하신다. 하나를 얻게 되면 하나를 잃는다. 그게 바르게 느껴진다. 근데 운동도 하고 책도 읽어야 하다니요 볼멘 소리가 나오기도. 오늘은 페이지들을 조금 여유있게 뒤적일 수 있는 날. 아침을 먹으면서 아몬드의 곤 이야기를 했다, 딸아이와. 곤이는 영혼이 깨끗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계속 이용만 당했던 건데 영혼이 얼마나 천사 같았으면 그렇게 이용을 당했는데도 나쁜 아이가 안될 수 있었을까? 엄마. 정말 대단한 아이 아니야? 나 같았다면 진짜 악마 같은 아이가 되었을 텐데_ 작가가 그린 곤이의 깨끗한 영혼을 그래도 캐치했군 아 하고 토스트를 깨물다말고. 새벽 일찍 일어나 백래시를 좀 읽었고 여유가 된다면 에코페미니즘 진도를 좀 나갈 수 있을듯. 시간이 흐른다. 나이테가 서서히 둘러진다. 노래는 계속 흐르고 언니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아름다워지는 거 같다. 오늘도 선택을 하고 이 일을 하면서 저 일을 생각하고 이 사람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저 친구를 떠올리기도 한다. 읽고싶지 않은 책들은 한곳에 정리해놓고 읽어야만 하는 책들은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둔다. 사놓고 모시기만 해놓았던 책들. 입술을 동그랗게 내밀고 소녀인 척 빨래를 넌다. 실은 팔자주름을 펴주기 위한 얼굴 스트레칭이다. 하늘이 흐리다.